72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7)
「제가 연모하는 레이디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당신의 기사가 그녀를 비호하더군요.」
연모하는 레이디…. 그러니까 아멜리 말하는 거지?
아멜리 얘기하는 거면, 내 수하는….
‘리나, 얘가 들켰어?’
하긴, 은신한 그림자 기사의 수도 알아맞힌 그이니, 놀라울 일도 아니었지만….
혹시 그걸 불쾌하게 여기는 건 아니겠지…? 나는 우선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글쎄에, 누구 얘기일까? 모르겠네?”
「얼마 전 에스메르 상단주와 함께 있던 여기사 말입니다.」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네.
큼큼, 나는 목을 가다듬고서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아아, 그 친구…? 오늘 휴무였을 텐데, 워낙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우연히 마주쳤나 봐.”
난 모르는 일이야, 응?
나는 새초롬한 말투로 뻔뻔히도 거짓을 말했다.
…이렇듯 손거울을 통해 루시페우스랑 대화하는 게 익숙해졌다는 사실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프랑 자작의 숨겨진 손녀라도 되지 않는 이상 그 정원에 있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내 변명 따위 애초에 통하지도 않은 듯이 떠오른 메시지.
으윽, 리나는 들켜도 하필 그런 데서 들켜서!
지난번에 마르크 백작 때처럼 길거리에서였다면 먹힐 만한 변명이었는데 말이다.
‘은신해 있다가 들킨 걸까? 혹시 아멜리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던 건 아니겠지…?’
정말 그랬다면 바로 보고가 들어왔을 테니까.
내가 낭패감에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을 때였다. 내 답을 기다리다 못했는지 두 번째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 덕분에 그 레이디께 새로운 흥미가 생겼습니다.」
뒤이어 떠오른 문장을 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레이디에게 흥미가?
나 때문에, 더…?
‘관심 끄라고 한 일인데?’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6월 자선 파티에서 레오폴트와 첫 춤을 추도록 도와주고, 심지어 비밀 경호까지 해주고 있으니, 내 관심이 이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리나 얘는, 어쩌다가 들켜서…!’
루시페우스가 관심을 거두길 바라며 한 일인데 오히려 흥미를 돋우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이런 게 원작의 억지력인 걸까?’
나는 초조한 마음이 되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레이디와 가까워지면, 당신의 의중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아멜리와 가까워지겠다고?’
안 돼!
나는 정말로 그렇게 외칠 뻔했다.
입을 반쯤 벌렸을 때, 루시페우스가 이 손거울을 통해 내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내어 참을 수 있었지만.
“…정말로 우연이라니까. 경, 의심이 많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모르는 바 아니야.”
원작에서 흑막으로서도 그러했고, 지금 내게 이 마도구를 붙여놓은 것만 봐도 확실했다.
거기다가 내 손을 만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구는 것만 생각해봐도….
‘정말 진지한 기색이긴 했지.’
내 손을 내려다보던 그 반쯤 닫힌 눈꺼풀이나 가까이서 보니 결 좋은 속눈썹, 진지하게 다물린 입매 같은 것들….
나는 왠지 모르게 그때 잡혔던 손끝이 또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모르는 바 아니시라니, 영광입니다.」
“내, 내가 알고자 하면 다 알지.”
「그럼요. 누구신데요.」
이어지는 메시지들이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것뿐이라, 나는 자꾸만 바보같이 둘러대게 되었다.
저 너머의 그가 왠지, 입매를 근사하게 들어 올려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면 착각이겠지….
리나가 제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내 집무실에 들른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프랑 자작과는 잘 해결됐어?”
“제가 그 댁에 간 건 어찌 아셨습니까? 케인이 말하던가요?”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하는 말에, 리나는 의아한 낯이 되었다.
리나는 아멜리가 어딜 가는지 알고 따라다니는 게 아니니 제 행선지를 미리 보고할 수도 없었으니까.
나는 루시페우스에게서 들었다고 말할 수 없어 세실리아의 얼굴을 십분 활용해 생긋 웃고 말았다.
“전하의 미소는 오늘도 눈부십니다만, 전하께서 그리 미소 지으시는 건 늘 불길한 징조던데요….”
“편할 대로 생각해.”
“아니면 엘런인가? 아우렌바흐 소공작? 아닌데, 그 영애께서 최근에 데이트하신 적이 없는데.”
리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직 보고하지 않은 내용을 내가 어찌 알았나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뭐, 전하께선 아시고자 하시면 어떻게든 아시니까는….”
나름대로 답을 만들었는지, 거기까지 말한 리나는 헨리에테가 내어준 냉과일차를 들이켰다.
“프랑 자작가에 방문하신 것은 맞는데요…. 정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루시페우스에게 들킨 건데…?
나는 요 며칠 가장 궁금하던 이야기를 듣게 되어, 리나를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음, 그 자작은 로즈버리 아가씨께서 차용증을 들이미시니까 자기들 우정을 종이 쪼가리 하나로 빛바래게 했다고 역정을 내고.”
헐, 우정이 있기나 했고?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로즈버리 아가씨는 차용증이 우습냐고 원로원에 중재 신청을 한다고 하시고. 이야, 로즈버리 아가씨 아주 당차시던데요.”
“프랑 자작이 퍽이나 무서워했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인 둘이 달려 나와서 끌어 내치려는 걸 혼자서 버티시다가 넘어지시고….”
“저런. 그걸 그냥 놔뒀어?”
“네? 그게 사실….”
거기까지 말한 리나가 냉과일차로 입을 축이는 척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지시한 게 비밀 경호였으니 개입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 했으니까 루시페우스가 발견한 걸 테지.’
리나가 쉽사리 입을 열 기색이 아니어서, 나는 다른 미끼를 던졌다.
“혹시 로즈버리 영애가 다치기라도…?”
“아, 아뇨!”
리나가 화들짝 놀랐다.
경호 대상이 다친 것에 비하면 들킨 것 정도야 경미한 잘못이니, 마음 편히 얘기하렴.
“그때 사실은….”
리나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끌었다.
“로즈버리 아가씨께서 곤란을 당하고 있는데 거기에….”
눈치를 보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게, 저도 루시페우스에게 들킨 게 예삿일은 아닌 걸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누구라도 마주친 거야…?”
“윽. 제가 전하를 속일 수 있는 날이 올까요.”
리나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곳에 알비누스의 차남이 있었지 말입니다.”
“어머, 그랬구나.”
“프랑 자작가도 알비누스의 일에 연관돼 있나 싶더군요.”
“아,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네.”
나는 대충 그렇게 말하고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루시페우스가 프랑 자작가에 간 걸 두고도 아멜리 쫓아다닌 것만 놓고 생각하다니…. 전략실장 직함이 운다….’
내 이번 생의 목표를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행복한 사랑에 두었어도, 황실 직계로서의 본분은 잊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아멜리랑 친해지는 걸 훼방 놓으니까 오기 생긴다는 식으로 말해서 그래.’
그래. 그래서 자꾸만 신경이 쓰는 거였다.
앞으로는 좀 더 자연스럽게 아멜리와 그의 사이를 떨어뜨려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근데 전하, 그 알비누스의 차남이 절 알아본 것 같았지 말입니다. 경의 주인이라며, 전하를 언급했으니까요.”
“나를?”
“네, 그때….”
그리 말하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리나의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뭐라고 말할 듯하던 리나는 슬며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데?”
리나의 입꼬리가 올라갈락 말락 한 게 수상했다.
분명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는데…?
“리나, 우리 강령 2조 2항이 뭐였지?”
“아, 임무와 전혀 무관한 감상이었지 말입니다.”
“그래?”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암조 강령 2조 2항, 임무 수행 중에 일어난 일은 사소한 일도 빼놓지 말고 모두 공유한다.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보고 내용을 걸러낸다면 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한 중요한 조짐을 놓칠 수 있으니까.
“진짜입니다. 그 댁 나무가 참 우람했다, 뭐 그런….”
리나의 되도 않는 말소리에 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뭔지 몰라도 말을 하다 만 건 분명한데. 암조 자부심이 넘치는 애라 쓸데없이 속이진 않겠지만….’
…지금껏 지켜본 리나의 성실함을 믿어볼까?
“뭐, 경을 믿지 못해서 하는 말은 아니야.”
“역시 전하께서는 외면보다 내면이 더 아름다우십니다.”
“…수상한데. 정말 별거 아닌 것 맞아?”
리나의 얼굴에 뭔가 음흉한 미소가 깃든 것도 같았지만, 나는 리나에 대한 신뢰를 과시하기 위해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뭐, 경을 알아보기야 했겠지. 그때 이르겐트에서 마주쳤잖아. 내 변장 보닛도 간파했는데, 경들 쓰는 것쯤은 더 쉽지 않겠어?”
“…역시 그렇겠죠.”
그리 말하며 리나는 다시금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지?
“어쨌든 그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야.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게 있으면 엘런하고 상의라도 해.”
“아, 그럴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그럼 어떤 문젠데?”
“문제 될 게 없는 문제…랄까요…?”
그리 말하며 리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 경은 마법 시동에 시간이… 안 걸린다…? 네, 맞네요! 시동어도 수인도 아무것도 없이 마법을 시전하던데요?”
무언가 급조한 말인 게 분명한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녀를 노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그래도 타고난 마력이 대단한데 술식을 스스로 개발하기까지 했으니…. 마탑에서 체계화한 마법과 작동 방식 자체가 다르다잖아.”
내 앞에서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썼던 것이 세 번.
그때마다 그는 손가락을 울리는 것만으로 윌로우 놈을 괴롭히고, 마차를 순간 이동시켰다.
“가만, 그 경이 마법을 시전했다고? 무력으로 부딪혔어?”
“에에, 네, 뭐….”
“조심했어야지!”
“아니, 그게, 로즈버리 아가씨께서 넘어져서 바닥에 나뒹구는데도 손 하나 까딱 안 하더라니까요?”
“그래서 끼어들었다?”
“…괘씸하잖습니까.”
리나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거기 와 있던 목적도 수상하고요.”
“그래, 그건 어떻게 된 건데?”
“글쎄요. 로즈버리 아가씨께서 프랑 자작의 저택에 방문하셨을 때, 이미 거기에 와 있었습니다.”
“로즈버리 영애를 따라간 건 아니고?”
“제가 아는 한, 로즈버리 아가씨께서 그날 거기에 간다고 미리 얘기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리나의 눈빛에 깃든 것이, 짜증…?
내가 자꾸 눈치 없이 루시페우스를 아멜리와 엮는다고 생각하는 눈초리였다.
‘얘는, 주군 보는 눈빛이….’
리나의 불경한 눈빛에 나도 덩달아 눈살을 찌푸려 보일 무렵.
큼큼, 화제를 전환하려는지 리나가 목소리를 다듬었다.
“일전에 마르크 백작 때도 그렇고, 귀족파에서 그들을 비호해 준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이라면….”
“로즈버리 아가씨께서 쫓아다니는 그 양반들요. 알비누스의 차남이 그들의 감시역 같고요.”
리나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나는 슬그머니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래, 그들이 다 귀족파라지만….”
“네. 주류에서 밀려난, 한미하다 못해 미미한 가문들인데 말이에요.”
그건 그래…. 나는 리나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꽃뱀 사기꾼 때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아멜리와 얽힌 가문들이 하나같이 귀족파이며, 그 주류인 알비누스에서 그 처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단순히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따라다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헨리에테가 로즈버리에게 빚진 가문들에 대해 조사한 결과도 수상했고.’
하나같이 당시 귀족파 실세들에게 청탁을 넣었던 곳들이었으니까. 우연의 일치라기엔 확실히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 가문들이 아직도 귀족파에 쓰임새가 있는 걸까, 아니면 로즈버리 선대 남작에게서 돈을 빌린 일부터가 귀족파의 음모인가….
“마르크 백작 쪽은 재판일이 태양제 주간으로 미뤄졌지?”
“네, 쿠로바츠 블랑 경의 일정에 맞춘다고요. 친(親)귀족파 성향의 변호사를 붙이겠다고 그 난리를 치니, 너무나 의도가 선명하죠.”
“거기다가 프랑 자작가에도 알비누스가 붙었고….”
톡, 톡, 톡.
나는 새로이 들어온 정보들을 머릿속에 저장하려는 듯 규칙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원작에서 아멜리는 그 어느 가문에서도 돈을 돌려받지 못했어.’
내가 아멜리의 빚 추심을 도운 건 그게 실패로 이어져서 아멜리의 평판을 깎아 먹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원작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아멜리의 일을 도우니, 수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귀족파의 흐름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혹시, 로즈버리 남작가의 불행에 귀족파의 술수가 개입된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