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6)
절절매며 무언가 하소연을 하고 있는 프랑 자작, 그를 싸늘한 낯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 남자.
검은 양복에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서 안경을 낀, 제 주군께 흑심을 품은 게 자명한 바로 그자였다.
하긴, 눈이 제대로 박혔다면 감히 제 주군께 반하지 않고는 못 견디리라.
‘전하께서 선을 긋지만 않으셨더라면 그 아우렌바흐 소공작도 전하께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리나는 오늘도 주군에 대한 왜곡된 충성심을 한껏 강화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프랑 자작은 또 알비누스랑 어떻게 얽혀 계시나?’
리나는 귀족파 가문들 간의 관계를 머릿속으로 재빨리 되짚었다.
주군께서는 그가 로즈버리 아가씨를 연모하여 그녀를 따라다닌다고 하셨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가 알비누스의 해결사로서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곳에, 어쩌다 보니 로즈버리 아가씨가 번번이 얽혀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남대륙의 인연설을 생각하면 저들도 인연이긴 하겠어.’
리나가 작게 코웃음을 치며 저택 안의 루시페우스와 대문 밖에서 방치되고 있는 아멜리를 번갈아 살폈다.
아멜리가 초인종을 누르고 인기척이 나기를 기다린 지가 벌써 15분이었다.
‘프랑 자작가가 아무리 몰락했어도 이렇게 사용인이 없나.’
아무리 선객이 있다지만 손님을 문전 박대할 정도로 말이다.
저택이 누추한 꼴로 보아 집사나 풋맨이 따로 있어 보이진 않지만….
그런 생각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딸랑.
저택의 현관에서 가정부인 듯한 여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가정부 하나만 두고 있는 건가? 저렇게 어려우면 로즈버리 아가씨께서 빚을 받아내실 수나 있으려나.’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지 않고 수십 년 전에 오간 액수만큼만 돌려받고자 하신다던데, 하필이면 상대 가문들이 하나같이 그조차도 불가능해 보일 만큼 몰락한 곳들이었다.
‘지난번 마르크 백작가는 도박할 돈이라도 있었던 건데. 전하께서 차용증을 사들여 주신 게 로즈버리 아가씨껜 다행일 거야.’
지금껏 지켜보건대 어머니의 옛 지인을 찾은 것 말고는 아무런 소득도 없는 분홍 머리 레이디를, 리나는 마음속 깊이 연민했다.
제 주군의 큰 그림을 경배하는 한편으로.
가정부의 안내로 마당에 들어설 수 있었던 아멜리는, 다시금 현관 앞에서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선객이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나? 저 코딱지만 한 저택에 응접실이 두 개일 리는 없으니까.’
숫제 서서 한참을 기다리시게 생긴 로즈버리 아가씨를 다시금 연민하면서, 리나가 응접실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앗, 벌써 나왔나.’
그새 응접실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이제 나오시겠구먼.’
리나는 퍽 즐거운 기색으로 마당에서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더니, 오늘도 검은색 정장을 제 몸처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밖으로 나왔다.
장갑 낀 손안에서 그의 지팡이가 빛났다.
‘남들 앞에선 마법 안 쓰는 척하려고 들고 다니는 거지. 정말 의뭉스러워. 수상해.’
리나는 눈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아이구, 로즈버리 아가씨, 무서울 텐데도 또박또박 말씀 잘하시고. 뭐야? 저 늙다리는 제가 뭘 잘했다고 호통을 쳐?’
리나는 흥미진진한 낯으로 정원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말싸움이 격해지는지,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는 루시페우스.
‘그래, 그래. 보통 수상한 게 아니야.’
심지어 프랑 자작이 이따금 눈치 보듯 루시페우스를 흘끗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프랑 자작이 하인들을 불러 아멜리를 강제로 끌어내려 했을 때.
‘아이고, 아가씨, 조심…!’
어떻게든 안 나가려고 버티려던 아멜리는, 결국 바닥에 우당탕 자빠지고 말았다.
그걸 지켜보던 리나의 입가에 헛웃음이 흘렀다.
‘저런 게 무슨 연모하는 거야, 전하께서도 참.’
루시페우스는, 그러니까 그녀의 주군께서 로즈버리 아가씨를 연모한다 지목하신 그자는… 당황한 척 허리만 숙일 뿐, 아멜리를 부축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마치 지팡이를 쥐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으로 지팡이만 틀어쥔 채.
다시금 하인들이 아멜리의 양팔을 우악스레 잡으려고 할 때.
‘나라도 도와드려야겠네.’
리나는 순식간에 신성력을 제 주먹으로 끌어모았다. 손에 낀 너클 주변으로 파르란 빛이 어렸다.
쾅!
리나가 나무에서 뛰어내리자, 정원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리나의 주먹이 더 이상 내뻗지 못하고 멈춘 부분에서 난 소리였다.
어느새 루시페우스의 몸 주변에 반투명한 방어막이 생성돼 있었다.
‘칫, 시동도 없이.’
리나는 손쉽게 저를 차단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무기질적인 시선…. 리나가 보기에, 그 눈동자는 아멜리를 향한 것이나 저를 향한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디 한번!”
끼기긱, 너클을 낀 주먹에 아무리 신성력을 더 보태도 남자의 방어막에는 조금의 타격도 가지 않는 듯했다.
‘젠장, 대단도 하네.’
리나는 비쭉 웃으며 목소리를 낮춰 이기죽댔다. 마력 방어막만을 사이에 둔 루시페우스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였다.
“저 아가씨를 지키는 연기를 하실 거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셔야 할 텐데요. 제가 심사위원이라면 5점쯤 드릴 수 있겠습니다.”
물론 만점은 100점이죠. 리나의 얼토당토않은 시비에도, 루시페우스는 방심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신경이 쏠린 것은 오히려 다른 쪽이었다.
‘이 기사는 분명 그때 이르겐트에서 봤던….’
루시페우스는 리나가 정원에 들어선 순간 이미 그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리나가 신성력을 발동해 너클을 강화한 그 순간에, 그는 리나를 죽일 수도 있었다.
‘신성력 좀 있는 인물이 지켜보고 있길래, 어디서 보낸 대담한 날파리인가 했더니.’
얼굴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내버려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수하인 줄은 지금에야 알아차렸으니까.
아, 또 그런 건가.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배어났다.
“경의 주인께서는 참 제 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 미소는, 로즈버리 영애에게 인사를 건넬 때와는 전혀 딴판의 것이었다.
‘이것 봐라.’
‘경의 주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달게도 울리는 말이던가. 그의 낯을 살피는 리나의 얼굴에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일전에 이르겐트에서 감히 제 주군의 손을 쥐는 걸 보았기에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제 주군께서는 아름다우신 만큼 자애롭기까지 하셔서, 주신의 햇살을 받는 모두에게 따스하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리 대꾸하는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그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 따스한 빛을 띠었다.
‘그래, 이런 낯이라야지.’
저나 로즈버리 아가씨를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색.
하긴, 그러고 보면 제 주군께서는 그 아우렌바흐 소공작도 얼마든지 홀리실 수 있는 분이셨다. 본인이 그런 데 관심이 없으실 뿐이지.
하물며 감히 개인적으로 시간까지 보냈다면야.
“너무 자상하신 나머지 경의 인연까지 점지해주신 모양이던데요.”
리나가 장난스러운 눈초리로 아멜리를 흘끗대며 말했다. 리나를 알아봤는지, 아멜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나의 눈동자가 어디로 가는지 보지 않아도 빤했다. 루시페우스의 입꼬리가 엷은 호선을 그렸다.
“그래서 성심껏 따르고 있습니다.”
늘 냉정해 보이기만 하던 낯에 일종의 장난기가 깃드는 것을, 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씨익 웃어 보인 리나는 너클을 강화했던 신성력을 해제했다. 그 즉시 루시페우스도 방어막을 거뒀다.
리나가 세실리아의 수하인 걸 안 이상, 그녀와 대적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우리 생각이 맞았어. 이자를 전하의 포로로 만들어서 귀족파를 저지하는 게 지름길일 텐데.’
제 주군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우시고 영명하셨지만, 어떤 방면으로는 한없이 어설프셔서 그 인간적인 매력이 빛을 발하셨다.
아, 누가 내 험담하나. 아까 낮부터 계속.
본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미혼 여성으로서 귀를 후빌 수 없어, 나는 펜대로 귀를 톡톡 치며 살피던 것에 집중했다.
「다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가까운 곳일수록 빨간 눈과 연관된 구전 설화가 많이 내려온다는 문학 논문을 보았습니다. 제국력 1세기경 작성된 것이었지만 지금 봐도 신뢰도가 높아 보였고요.」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의 내 침실. 나는 창가의 티 테이블에 앉아 3소대장 알렉스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었다.
‘역시, 빨간 눈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연관이 있었던 거야.’
알렉스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빨간 눈의 관계에 대한 문헌을 조사하기 위해 학자의 탑에 출장 가 있었다.
막심 블라우베르와 함께.
「막심 경께서 학자의 탑에 큰 관심이 있다고 하시니, 학자의 탑 측에서 비밀 서고까지 열람할 수 있게 해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가 꽤 쓸 만하단 말이지.
나를 보필하기 위해서라면 학자의 탑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던 막심 블라우베르.
그의 쓸모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학자의 탑과 공조할 일이 생기니 시험 삼아 그를 동행하게 한 거였다.
블라우베르 백작가가 귀족파이긴 하지만 게이블스나 알비누스 등의 귀족파 주류와 교류가 끊어진 지 오래인 덕에 내린 결정이었다.
‘안 그러면 연회 갈 때마다 들러붙을 것 같아서 말이지. 올해는 사저 연회 많이 참가해야 하는데 말이야.’
막심 블라우베르는 이 조사를, 내가 서출 인재를 중용하듯이 빨간 눈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연구로 이해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그를 꽤 마음에 들어 하나 보네. 편지가 퍽 우호적인 걸 보니. 날이 밝으면 헨리에테와 상의해 봐야겠어.’
헨리에테가 암조의 유일한 비(非)무사로서 행정 업무를 혼자 도맡고 있었는데, 올해는 확실히 일이 늘어나 버거워하는 기색이었던 것이다.
내가 펜대로 입술을 톡톡 치며, 막심 블라우베르의 처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협탁 안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손거울이 있는 곳이었다.
벌써 세 번째라고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깜짝이야.’
나는 어디서 와인 잔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막심 블라우베르와 손거울의 주인공을 동시에 생각하니 말이다.
‘얼마 만이지, 이게?’
그가 손거울을 통해 연락해온 건 리나가 귀환하여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해 보고한 날이 마지막이었으니, 벌써 보름도 다 된 일이었다.
‘늘 갖고 다니라고 신신당부하길래 이르겐트에서 마주친 날 보낼 줄 알았는데.’
그래서 늘 지니고 다녔는데…까지 생각하며 손거울을 열었을 때, 나는 위화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보낼 줄… 알았는데…?
기대를 했다고?
‘나 참,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주변에서 하도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나도 물든 모양이었다.
나는 찰싹찰싹, 세차게 뺨을 두드리고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서 손거울을 보니,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모양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눈 좋은 수하를 두셨더군요.」
눈 좋은 수하…? 무슨 말이지?
내가 고개를 갸웃할 무렵.
「과격한 면모도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제가 어떻게 지켜드린 건데, 아프실까 걱정됩니다.」
과격…한 면모?
아프실까… 걱정…?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속절없이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내가 내 뺨 찰싹인 거…?’
악, 쥐구멍!
창피해진 나는 손거울을 조금 멀리 밀어놓았다.
“모, 모기가 있었거든….”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우물거렸을 때.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서, 그의 다음 메시지가 거울에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숨죽여 웃고 난 정도의 간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