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5)
‘우리가 교류한 지도 벌써 6년인데. 아직 그 정도로 신뢰하는 건 아닌가?’
렌틸 자작을 설득하는 일을 자처한 것부터 시작해, 성의를 많이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인간관계란 수직적이거나 이해타산적인 것만 맺어와서 그런 거겠지…. 그 사정에 작은 연민이 들었다.
타인을 믿지 못하고 계속 계산한다면, 저도 피곤할 테니까.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누가 밀어낸다는 느낌은,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 전생에나 느꼈던 감정인데….
가라앉는 마음에 내가 괜스레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잘게 썰어낼 때였다.
“말씀은 황송하지만…. 제가 전하와 대놓고 친우가 되면,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연모해서 전하와 가까이 지낸다는 콘셉트가 흔들려서요.”
“엥?”
…그게 아니었나.
“전하께서도 아직 제게 공략 안 당하신 척해 주시고요.”
“그, 그래….”
아까도 너무 허물없이 대하셨잖아요, 스칼렛이 단호하게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계산속에 나는 민망해지고 말았다.
스칼렛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버지께 저희의 진짜 관계가 탄로 날까 조심스럽기도 해요.”
“…진짜 관계라. 뭐, 그도 그렇네.”
맞는 말이었다. 게이블스 가문의 후계 싸움도, 조만간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테니까.
나는 오늘 스칼렛에게 전달하려는 좋은 소식을 떠올리며 속으로 후후 웃었다.
우리가 전채를 다 먹고 난 뒤, 시종들이 들어와 메뉴를 바꿔주었다.
‘아까 카프레제에 뿌린 발사믹 글레이즈 봤을 때도 느꼈지만….’
사교계의 일인자인 그녀가 저녁을 들고 간다는 이야기에, 프리지어궁 주방에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뭐랄까, 가니시도 각이 잡힌 것 같고, 플레이팅도 묘하게 예술적이고….’
심지어 주방장도 스칼렛을 가까이서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지 직접 메인 디시를 소개하러 오기까지 했다.
“이 농어구이는 투르포의 바다에서 직송된 농어를 별궁 주방의 특제 소스로 간을 해 구운 것입니다. 조금 더 풍미를 즐기시려면 이 타르타르소스를 곁들여서 드시면 되고요.”
“설명 고마워요.”
주방장이 어울리는 와인까지 추천하며 따라주자, 스칼렛은 사교계를 사로잡은 일명 황홀한 미소로 화답했다.
스칼렛의 표정 중에 가장 생동감 있어 보이는 저 미소가 인위적인 표정이라는 아이러니.
“으, 가식. 나한테도 좀 그렇게 웃어주지 그래?”
주방장과 함께 시종들이 다 물러난 뒤. 내가 농담 섞어 투덜거리자, 스칼렛은 여느 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전하께 웃어봤자 제 평판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영애는 참 박해, 여러모로.”
그런 이해타산적인 면이 스칼렛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기도 할 터였다.
“전하께서는 가식 안 떠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영애가 요즘 참 불경해, 그치?”
친우라 하네 마네로 입씨름은 했어도, 그리 말한 게 좋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묘하게 더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 아닌가. 이미 편한 거였나. 그러고 보면 다과회 때도 톡톡히 나 놀려먹었지….’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 그대로 몸 바쳤더니, 얘도 그렇고 암조 애들도 그렇고 다들 가당찮은 소리를 하는 거였다. 나 원 참.
“저희 가주님께서는 아직도 전하께서 세상 물정 모르는 백치로 착각하고 계시던걸요.”
“그게 다, 영애를 위한 큰 그림이었어. 아직도 나 의심 못 하잖아.”
“전하의 사적 복수를 위해서 아니시고요?”
그리 말하는 스칼렛의 입꼬리가 비대칭적으로 올라갔다.
“복수라….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하지만 진짜 내 카드는 꺼내지도 않았는걸.”
그리 말하며 나는 스칼렛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너 말이야, 너.
스칼렛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 너스레 떨던 건 어디로 갔는지, 조금 수줍기도 하고 긴장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소후작은… 상태가 아직도 안 좋다고 들었는데.”
“역시 저희 가문에 사람을 심어두신 거죠?”
“집안이 뒤숭숭하다 보니 새어 나오는 말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제가 집에 가서 사용인들 싹 물갈이하면 어쩌시려고요? 저를 그렇게까지 신뢰하시는 건 별로 추천해 드리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스칼렛의 낯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저를 믿는 걸 추천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쩌면 나를 전폭적으로 믿고 싶은 마음을 단속하는 일종의 혼잣말일 거였다.
‘꾸미지 않은 표정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과 엮으면서 놀리는 것하고는 다른 차원의 믿음이 필요한 거니까….’
거래 관계인 척하는 느슨한 우정.
그것이 나와 스칼렛이 6년째 맺고 있는 관계였다.
게이블스의 후계 싸움이 본격화할 때를 기다리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6년이란 시간은 정이 들고도 남을 세월이니까.
하지만 지고하신 황실의 금지옥엽인 나와 달리, 스칼렛은 여러모로 입지가 불안하니까. 나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참으려는 것일 터였다.
렌틸 자작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는, 모든 게 불확실한 셈이니까.
‘사교계의 일인자인데도 입지가 불안하다는 게 참 황당하지만…. 그만큼 후작의 가스라이팅이 대단한 거겠지.’
뭐, 이 장난 같은 거래 관계도 슬슬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할 때였다.
나는 농어를 해체하며 지나가듯 말했다.
“우선은 서로 돕자는 거잖아.”
“사실 그것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요. 전하께는 득이 되는 게 뭐가 있죠?”
“…내 스승의 꿈 대리 만족?”
나는 스칼렛이 안심할 수 있게끔 적당히 꾸며낸 대답을 꺼냈다.
‘내가 애초에 원하던 거야, 스칼렛이 패악 안 부려서 아멜리의 황성 생활이 평온해지는 거였지….’
하지만 그런 걸 말할 순 없으니까.
게다가 그건 이미 이뤄지기도 했고, 스칼렛의 꿈을 이루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내 목표가 되었고.
내가 에둘러 한 말이 일리 있게 들렸는지, 스칼렛의 미간에 졌던 주름이 살포시 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훗날 황태자 전하의 정권에서 귀족파의 정점에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
답은 없었지만 스칼렛의 귀 끝이 슬며시 붉어진 것이, 제가 게이블스의 가주 자리에 더 어울린다는 말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처음 회유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해준 말인데, 번번이 좋아한단 말이지.’
문득 나는 지금 내 눈앞의 영애가 원작에서 아멜리에게 저지른 악행들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사교계 집단 따돌림이었지.’
제 추종자들이 망신 주거나 헛소문 퍼트리는 걸 방조하고, 사냥 대회에서 마수에게 공격당하도록 사주하기까지.
하지만 내가 게이블스의 후계 자리를 당당하게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면서 많은 것이 바뀌고 있었다.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정말로 고지가 눈앞이야….’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농어구이를 한 조각 삼켰다.
메인 디시를 마치니 따뜻한 브라우니에 아이스크림을 올린 디저트가 준비되었다. 스칼렛의 것에 올라간 캐러멜 드리즐이 더 유려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이렇게까지 제국 최고 유명 인사면 뭐 하나. 제 아비는 딸을 정략혼 협상 패 취급하는데.’
스칼렛이 디저트 와인을 한 모금 맛봤을 무렵, 나는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렌틸 자작이 태양절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어.”
“정말요?”
스칼렛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빛났다.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한테 웃어줘 봤자 평판 오를 일 없다며?”
“이건 진심으로 웃는 거잖아요.”
정말로 그래 보이기야 했다. 나는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제 결심이 섰나 봐. 소후작 일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 전에 영애랑 따로 자리 마련해달래.”
“그렇군요. 드디어….”
스칼렛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비쳤다.
설렐 만도 했다. 그동안 렌틸 자작은 나와 스칼렛이 모종의 거래를 시작한 걸 알면서도, 지금껏 스칼렛을 찾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발을 빼는 건 아닐까 걱정할 만큼.
사실은, 그간 계획해온 모든 일을 원작의 무대에서 터뜨리기 위해 내가 시기를 조절한 거였지만.
“알비누스 쪽과는 어찌 될 것 같아? 사이가 좀 회복됐어?”
“함께하던 사업을 물리지는 않으려나 봐요. 요즘 다시 알비누스 후작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어쩌면 알비누스 후작이 납작 엎드렸을 수도 있겠고.”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요.”
스칼렛의 낯이 조금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영리한 애를….
‘제 누이에게 끊임없이 비교당했던 열등감이 이렇게 투영되나 봐.’
나는 스칼렛의 호박색 눈동자가 내 스승의 것을 무섭도록 빼다 박았음을 떠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인데, 잘나면 좋지 않나.’
나는 표 나지 않게 한숨을 작게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긴, 많은 차별에는 보통 이유가 없는 법이었다. 나는 평소에는 잊고 살던 전생의 기억을, 스칼렛을 볼 때마다 조금씩 되새기곤 했다.
“소후작의 용태는 어때?”
“그걸 해결하라고 알비누스와 기 싸움을 벌인 모양인데 별 소득이 없었나 보더라고요.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일상생활은 가능해요.”
“잘 경계하고 있어. 괜히 휘말리지 말고. 갑작스레 영애를 신임하는 척하고 무슨 일을 시켜도 핑계 대서 선 긋고.”
“그럴 리 있나요? 혹여 그렇더라도 걱정 마세요, 제가 분별력 없는 애도 아니고.”
원작에서 바로 그 분별력 없는 행동을 저지른 스칼렛을 떠올리며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귀족파는 조만간 귀족파 주관으로 열릴 사냥 대회에서 문제를 일으켜 황실에 혼란을 안길 예정이었다.
원작의 스칼렛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식이 생각이 짧아서’라는 핑계를 위해 그 행사의 주관인 역할을 맡았고.
사냥 대회에서 환각 마법에 걸린 마수들이 흉포하게 구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나고, 마수에 대한 공포심이 사회에 퍼지면서 수정 가격이 폭등했다.
‘귀족파들이 지금 수정을 열심히 사 모으는 게 그래서지.’
그리고 환각 마법을 거는 건, 할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알비누스랑 꾸미는 일이 그 둘째가 마법을 쓰는 것과 연관 있을 거야.”
“그래서 추궁 못 하는 거군요….”
내 답에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이던 스칼렛이, 불현듯 덧붙였다.
“근데 정말, 알비누스 둘째 아들하고 아무 사이 아니세요?”
“또 물어?”
“알제니아 파티 때 정말 다정해 보이시던데.”
“…영애, ‘다정’이란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거 아니지?”
나는 다과회 때와 달리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걔가 얼마나 무서운 앤데.
그를 생각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고, 부정맥이 온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래, 이렇게 무서운 애라고….
리나는 황성 변두리의 한 저택을 감시하기 위해, 그 마당에 있는 커다란 고목 안에 숨어 있었다.
굉장히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아름다우시고 영명하신 주군의 명으로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정인을 은밀히 경호하게 된 지도 벌써 보름.
그 레이디께서는 오늘도 할아버지가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어떤 몰염치한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신 참이었다.
‘로즈버리 아가씨 신세도 딱하지. 벌써 몇 번째야? 로즈버리 선대 남작님, 손녀님께 사과하십쇼.’
오늘의 행선지는 프랑 자작가.
수십 년 전 관직 한자리를 노리고 귀족파 주류들에게 뇌물을 바쳤지만, 별다른 재미도 못 보고 대가 끊길 처지인 집안이었다.
마르크 백작가와 매한가지로.
그때 바친 뇌물에 로즈버리로부터 빌린 돈이 섞여 있어서 오늘 아멜리가 방문하게 된 거였고.
‘같은 귀족들로부터 뇌물 받아먹고 팽하는 게 무슨 귀족파라는 건지. 그냥 반황실파라고 해라, 이것들아.’
리나가 여느 때처럼 귀족에 대한 적개심을 담고서 저택의 동정을 살필 때였다.
‘어라, 이게 또 누구셔?’
저택의 응접실 안에서 포착된 익숙한 인영에, 리나는 굉장히 흥미진진한 마음이 되었다.
‘이번에도 또 구해주는 척만 한다는 데 전하께서 하사하신 보검을 걸어야지.’
그러니까, 로즈버리 아가씨와 이상하게도 번번이 얽히는 알비누스의 둘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