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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69화 (69/220)

69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4)

뭐야? 누가 웃음 참는 소리를 냈어?

황당한 마음을 안고서 둘러보니, 스칼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낯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의미심장한… 미소?

스칼렛이 남에게 절대 보이지 않는 부류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늘 도도한 무표정 아니면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만 보였으니까.

뭐야, 무슨 의민데?

내가 눈썹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 알비누스의 검은 신사님 말씀이시죠?”

리피샤 쿠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알비누스의 검은… 신사…?”

“네에, 늘 검은 정장만 입고 계시니까요. 그분께 다가가고 싶어 하는 레이디는 많은데 좀체 곁을 안 내주셔서, 저희끼리는 그리 이른답니다.”

리피샤 쿠첼의 설명이 퍽 논리정연한 게, 전생의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사전에 새로운 정보를 기록하는 사람 같았다….

“맞아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 하며.”

“고대의 대리석 조각상 같으시죠.”

“목소리는 또 얼마나 근사하시다고요.”

“어머, 목소리를 들어 보셨어요? 전 여전히 성함조차 몰라서….”

“키도 훌쩍 크셔서, 존재감은 또 어찌나 크신지.”

“훤칠하시기가 아우렌바흐 소공작님 뺨치시는 것 같은데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시지요….”

꺄아, 그리 주거니 받거니 하던 영애들이 낯에 홍조를 띄웠다.

‘얘네가 흑막 우습게 아네.’

하긴, 그녀들이 모두 귀족파다 보니 알비누스의 양자에게 호의적인 걸 거였다.

내가 속으로 헛웃음 지으며 찻잔에 입을 묻을 때였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살펴보니, 스칼렛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뭐, 왜.

내가 눈빛으로 따졌으나, 스칼렛은 부채를 살랑거리며 눈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나저나, 지난번 자선 파티 때 말이죠.”

스칼렛이 입을 열자, 루시페우스를 찬미하던 영애들의 재잘거림이 대번에 그쳤다.

모두가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 검은 신사께서 어째선지 전하께로부터 시선을 못 떼는 것 같던데.”

엥?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은 순간.

“맞아요! 심지어 첫 춤을 청하러 가시지 않았어요?”

“파티 내내 전하만 쳐다보시더라고요!”

“블라우베르 영식이 전하께 인사 올릴 때, 아주 뒤통수 뚫을 정도로 눈빛이 이글이글하시던데요?”

영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스칼렛이 던진 떡밥을 야무지게 물었다.

뭐, 뭐지, 여기 뭔가…. 내가 모르는 세계인가…?

얘들, 나랑 같은 파티 갔던 것 맞아…?

“저는 깜짝 놀랐지 뭐예요. 악력도 어찌나 세신지, 잔을 깨신 게.”

맞아요, 맞아요. 스칼렛을 둘러싼 영애들은 마치 장난감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잔을 깨기야 했지만, 그래서 나도 그의 난폭함에 놀라기야 했지만, 그건….

그녀들의 말을 흡족하게 듣던 스칼렛이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다.

“일종의 질투 때문 아니셨을지.”

그래, 질투가 맞기야 맞는데, 그게 내가 아니라….

내 표정을 살피던 스칼렛은 이윽고 훗, 눈초리를 곱게 접어 웃어 보였다.

나는 뜨악한 표정을 수습하고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일전에 모종의 일로, 그가 나를 도운 일이 있어서 안면을 텄을 뿐인데 말이죠.”

나는 ‘모종의 일’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스칼렛을 노려보았다.

네 오라비 자리보전하게 만든 그거 말이야, 그거.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좋아한다고 지난번에 일러줬는데, 얘도 암조 애들에게서 나쁜 물이 들었나?

“은사를 지신 분께서 빚이라도 지신 건가요? 그 빚 갚으시려면 더 깊은 인연이 되시는 건 아닐까 모르겠어요.”

그리 말한 스칼렛은 다시금 고혹적으로 부채를 흔들었다.

스칼렛이 나를 놀리고자 하는 말인 것도 모르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빚으로 시작하는 사이라니!”

“로맨스의 도입부 같아요!”

“빚은 너로 갚아, 뭐 이런 거…. 꺄아!”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문자 그대로 사색이 되어 갔다.

‘와, 나, 이거 참. 여기서 루시페우스가 운명적으로다가 아멜리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들 앞이어서 아무것도 내색하지 못하고, 눈동자로 스칼렛만 윽박질렀다.

너, 이따 보자?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쳐다보던 스칼렛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깃들었다.

스칼렛은 영애들이 한껏 떠들도록 두었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마르크 백작가의 일 들으셨나요?”

스칼렛이 물꼬를 틀자, 그녀의 추종자들은 다시금 새로운 화제에 열을 올렸다. 언제 나를 두고서 망상을 펼쳤냐는 양.

역시 사교계 일인자셔라….

“들었지요. 아카데미 동창분께 거액을 빌려놓고 갚을 생각도 않다니, 어쩜 그리 신의도 없는 자가 제국의 귀족 중에 있었을까요?”

“제 아버지께서도 혹시나 싶어서 가신들을 단속하셨어요. 그런 몰염치한 가문에 휘말려서는 안 되니까요.”

“그 피해 가문이 어디인진 모르지만 안되었어요. 지방 가문이라 더 영세할 텐데, 인정도 없나요?”

나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다시금 찻잔에 입을 묻었다.

‘마르크 백작가가 고소당한 일이 드디어 귀족 사회에 퍼졌구나.’

귀족파의 영애들이 나를 같은 편으로 착각해주는 것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내 앞에서 가문의 정보들을 쏟아내주는 덕분에, 지금처럼 내가 궁금해하던 반응도 들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아멜리 얘기는 없네. 다행이야.’

아멜리가 가문의 빚을 독촉하기 위해 마르크 백작을 쫓아다닌 사실은, 다행히도 귀족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았다.

마르크 백작이 받은 고소장이 아멜리의 이름으로 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랬다면 지금 레이디의 품격을 몰라서 그리 악착스럽게 군다며 험담이 난무했겠지.’

그러니까, 이 일은 전적으로 내 작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코코 에스메르의 이름으로 벌인 작품.

로즈버리 남작령에 투자하는 형식으로 아멜리에게서 채권을 사들인 후에, 에스메르 상단의 이름으로 마르크 백작을 고발했다.

‘에스메르 상단 세우길 잘했지. 생각보다 쓸모가 많네.’

나는 자못 흡족해져 남몰래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아멜리에게 떼인 돈도 받아다 주고, 평판도 안 해치고.

마르크 백작은 끝까지 제 빚이 아니니 갚을 이유가 없다고 발뺌할 예정이었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기지 않았으니 이 채무를 상속한 적 없다며.

‘사교계 평판 때문에 아멜리가 감히 고소까지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서 배짱부린 거지.’

하지만 그 고소, 평민 상단주 코코 에스메르가 대신 해 드렸습니다.

마르크 백작의 일에 아멜리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걸 확인했으니 큰 수확이었다.

‘앞으로도 아멜리의 속을 썩이는 채무자들이 있으면 같은 식으로 도와주면 되겠어. 이번 재판만 승소하면 알아서들 갚을 테지만.’

귀족파의 약점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케인을 통해 마르크 백작가에 대한 채권을 사들였으니, 다음은 더 쉬울 거였다.

‘루시페우스가 내가 에스메르 상단주인 걸 안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안 되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켈록.”

“전하, 괜찮으세요?”

내 양옆에 있던 영애들이 황급히 손수건을 건넸다.

‘큰 문제가 안 되기는…? 그 루시페우스인데?’

그러니까 내가 지금, 말 좀 섞었다고 루시페우스를 믿는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원작 흑막인데! 그가 올해 칠 사고가 하고많은데…!

‘암조 애들이 소설 쓴다고 뭐라고 할 게 아닌데?’

정신을… 정신을 단단히 다잡아야겠다.

나는 그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런 나를 그는… 살려둬 주는 것뿐이다.

내게 빚을 지워서, 내가 저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가면서.

‘아직은 아닌 척하지만, 수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게다가 내가 지금 레오를 도와주고 있으니 눈 밖에도 났을 테고.’

그래, 그럴 거였다.

다행히 내가 황실의 적통이라, 당장 나를 어쩌지는 못하는 것뿐….

나는 목구멍에 가랑대는 잔기침을 진정하면서, 마음도 함께 다잡았다.

‘내가 이렇게 태평하니까 암조 애들도, 스칼렛도 상황 파악 못 하고 놀리는 거지.’

그는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위해 적대해야 할 인물이며, 올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억지로 열어 대륙에 해를 끼칠 위험한 인물이다.

나는 세뇌하듯이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런 것치고, 나한테 너무 친절….’

핫, 허튼 생각 금지!

아멜리에게 붙여두었던 리나가 귀환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늦은 오후의 일.

나는 그제야 리피샤 쿠첼을 풀어주기 위해 다과회를 마쳤다.

살포시 모색(暮色)이 정원을 물들이기 시작한 그때.

일전에 빌린 책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나는 스칼렛과 만찬을 함께하기로 했다.

애초에 빌린 책 같은 건 없었지만 따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 미리 약속해둔 바였다.

“영애, 진짜! 아까 왜 그래?”

“제가 뭘요, 전하?”

만찬장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투덜대는 양에, 스칼렛이 태연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께서 사주하신 덕에 별 능구렁이 같은 말까지 해야 했으니 소소한 앙갚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은사를 지신 분의 아량으로요. 그리 말하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 스칼렛은… 정말이지 얄미워 보였다.

‘저번에 내가 귀족파 영애들 입단속 시키라면서 읊어준 대사가 마음에 안 들었단 소리지.’

아니, 마음에 안 들면 쓰질 말든가. 나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세요?”

“누구랑. 그 경이랑?”

그럼 누구겠느냐는 양, 스칼렛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했잖아. 그는 로즈버리 영애를 연모한다니까?”

“그런데 자선 파티에서 분명….”

“내가 확인까지 했어. 본인 말로도 그래서 레오를 질투한다고 했고.”

“…정말요?”

스칼렛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매 너머로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내 스승의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이런 걸로 내가 영애한테 거짓말을 왜 해? 나랑은 정말, 소후작 일로 얽힌 것밖에 없다니깐.”

물론 우연히 아멜리를 돕다가 마주친 것도 있기야 하지만…. 며칠 전에도 마주쳤지만.

‘그건 정말 마주친 거잖아? 얽혔다고 말할 정돈 아니라고.’

게다가 연락할 마도구도 보내오고 내가 이동 마법진 때문에 정신 못 차리는 거 해결도 해줬지만, 그거야 그냥 어쩌다가….

때마침 시종들이 식전 빵과 전채를 내와, 나는 재빨리 그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스칼렛 얘, 고새 표정 관리하는 거 봐.’

식전빵과 토마토 카프레제가 우리 각자의 앞에 놓이자마자 나는 손짓으로 시종들을 물렸다. 우리 가식쟁이 아가씨께서 마음 편히 떠드실 수 있도록.

그 와중에 시종들은 나가는 걸음을 늦추며 스칼렛을 흘끔대느라 난리였다.

“어휴, 영애 인기가 말도 못 하네, 아주.”

내 너스레에 스칼렛이 피식 웃었다.

“제가 황궁에서 저녁을 들고 간단 소식 들으시면 아버지께서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나한테 여색 취미가 있다고 소문이나 안 냈으면 좋겠네. 영애의 부친께서 워낙에 야심 만만하셔서.”

스칼렛이 쓰게 웃었다.

“시집보내는 것 말고는 영애의 쓰임새를 생각지 못하는 그 상상력도 박하지.”

“위로해주실 것 없어요.”

제 아비에 대해 신랄하게 말하는 것에 기분 상할 법도 했지만, 스칼렛은 내 언행에 거리낌을 느끼는 법이 없었다.

벌써 여섯 해째 이런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니, 내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때도 된 거였다.

내 앞에서 저런 씁쓸한 표정도 보일 정도로.

“아무튼 영애랑 식사도 하고 좋네. 친우 같고.”

스칼렛의 고운 미간이 흉흉하게 찌푸려졌다.

“친우…요?”

“뭐어, 필요하다면 이제 나를 친우라고 말해도 괜찮다는 소리야.”

며칠 전에 리나가 단짝 새로 찾아야지 않겠느냐던 말에 대한 답이랄까?

‘레오 말고는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게 스칼렛뿐이니까.’

글렌치아 방계에 팔아넘겨지지 않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한데 스칼렛의 낯이 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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