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3)
리나는 눈매를 가늘게 하여 내 얼굴을 얼마간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놀리려던 기색을 순식간에 지웠다.
역시, 제가 억지 부린 걸 아는 거지.
나는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그나저나 그, 알비누스의 차남은 전하께서 보닛을 쓰셔도 알아보시나 봅니다?”
“그러게. 저번에 들켜서 보닛을 새로 맞춘 건데도 알아보네.”
“마탑에서 거부할 정도의 마력이면 웬만한 마도구쯤 다 간파한다는 걸까요?”
“이거 새로 개발하면서 마탑 마법사들 상대로 실험까지 다 거쳤다고 했거든.”
“…마탑은 참, 아까운 인재 놓쳤네요.”
“덕분에 우리도 골치 아프게 됐고 말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시페우스는 우리 암조에게 가장 주의할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냥 전하께서 미인계를 쓰셔서 회유하시면 골치 안 아플 것 같은데요. 아니, 이미 반쯤 걸려든 것도….”
“아니라니까!”
걔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어?
리나와 나는 서로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리피샤가 꼭 이번 다과회에 참석하게 해줘. 매번 와주는 고마운 영애지만, 말미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혹시 몰라서 말이야.
그대가 연모하는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친우로부터.」
스칼렛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나는 내가 가진 편지 봉투 중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을 골라 넣고 은색 밀랍으로 봉했다.
게이블스 후작이 스칼렛에게 가장 비싼 것들로만 치장하고 나를 만나도록 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
“다른 초대장도 다 준비됐지? 게이블스에는 이걸로 보내줘.”
“네, 전하.”
이번 다과회 초대장을 돌리면서, 스칼렛의 것에만 특별히 따로 편지를 적은 것이었다.
‘아멜리 험담할 애들이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저에 가는 걸 목격하지 않도록, 그 시간에 황궁에 묶어둬야 해.’
며칠 전 이르겐트에 방문한 날, 나는 그대로 케인의 집에 들렀다.
내가 9년 전에 구해준, 2구역 발레아 거리에 자리한 케인의 집.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상점가도 적당히 발달한 거리에 자리한 데다 건물 자체도 꽤나 고급스러웠고, 황실 복지로 건물 관리도 잘돼 있어서 퍽 쾌적했다.
층고도 높고 채광도 좋은 케인의 집에 내가 들어섰을 때.
“4, 4황녀 전하….”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멜리는 정말로 혼이 나갈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일전에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에서 본 적 있는 케인의 아버지 니콜슨은 정말로 혼이 나갔는지 방에서 나오지 못했고.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는데. 세실 전하, 그런 거 말이야.”
나는 일부러 아멜리가 일전에 레오폴트가 부르는 걸 듣고서 질투했을 바로 그 애칭을 언급했다.
내가 그 일을 알리라 상상도 못 하는 아멜리는 농담인 줄도 몰라, 그저 놀란 낯만 지을 뿐이었다.
“전하, 진짜로 오셨어요?”
“이야, 이렇게 케인 집에 다 와보네? 내 집보다 더 좋은 것 같아. 소대장 특혜인가 봐.”
“오늘 리나 네가 수행 담당이었구나? 나야 아버지랑 같이 살잖냐.”
“케인, 전하께서 오실 줄 알고… 있었어…?”
케인이 퍽 의연하게 우리를 맞이하는 모습에, 아멜리는 배신감으로 가득 찬 낯을 지어 보였다.
“아니, 뭐, 정말로 오실 줄 몰랐죠.”
“바로 갈 거니까, 다과 내올 거 없어.”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자연스럽게 거실의 상석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아멜리. 저는 케인의 동료인 리나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로즈버리의 아멜리예요….”
아멜리의 밀착 호위를 하면서도 통성명은 처음 하는 리나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속으로는 목소리가 아름답네, 레오폴트와의 사랑을 응원하네, 별소리 다 하고 싶을 텐데 참는 거 봐.’
나는 리나의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에 눈을 흘기며 비죽 웃었다.
당황한 낯을 간신히 추스른 아멜리가 나를 따라 앉자, 두 기사도 적당한 곳에 앉았다.
“그런데, 전하께서 정말 어쩐 일로….”
“응, 지난번에 제대로 된 선물도 못 주고 보낸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에요, 정말 황송한 것을 주셨는걸요….”
황녀를 선약 없이 알현할 수 있는 그 증표가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지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내 억지를 무마하기 위해 세실리아의 얼굴을 활용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건 내가 내 친우의… 소중한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는 일종의 호의 표시, 뭐 그런 정도고.”
“…황송합니다, 전하.”
“으응, 황송할 거 하나 없대도.”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리나에게 손짓했다.
리나가 손바닥 크기의 나무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전 이르겐트에서 거래한 인연 팔찌가 담긴 거였다.
“이걸….”
제게 주시는 건가요, 그런 말을 채 입에 내지 못한 채 아멜리가 눈을 끔벅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종의 미신일 수도 있겠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행운을 깃들게 해주고 호감을 사게 해준다는 동대륙 장신구래. 영애가 요즘 도움 구할 일이 많다면서?”
나는 아멜리가 이 팔찌를 끼고서 제 친부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적당히 효능을 꾸며내었다.
나무 상자를 열어본 아멜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동대…륙이요? 재밌네요, 두 세기 전 유행했던 헬레니안 양식 장신구라 해도 믿겠어요.”
…으음, 눈썰미가 좋네.
로즈버리가 꽤나 빈곤한 만큼 아멜리에게 장신구에 대한 안목이 없을 줄 알고 대충 꾸며낸 말이었는데, 여주는 여주인 모양이었다.
‘정말로 인연 팔찌가 두 세기 전에 유행했던 거니까 그 시대 양식으로 디자인됐지….’
세상 물정에 강하다는 설정은 교양과 상식이 충만한 데서 비롯된 걸까?
나는 그녀의 안목에 당황한 낯을 세실리아의 미소로 얼버무리고서 답했다.
“으응, 그러니까 말이야. 제국식 드레스에 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겠어, 그치?”
“네에, 정말 아름답긴 아름답네요…. 전하, 이리 과분한 선물을 주시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이고, 예의도 바르고.
나는 내 여주에 대한 편애를 숨길 생각도 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답답하게 구는 레오폴트나, 요즘 한껏 불경한 암조 애들 보다가 보니 더더욱 보기가 좋네….’
어디 한번 착용해 보라는 리나와 케인의 부추김에 아멜리는 조심스레 팔찌를 꺼내서 껴보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한가운데 박힌 루비가 이채를 띠는 것이, 아멜리의 신성력에 감응한 모양이었다.
‘신성력이 유전인 것에 착안해, 유사한 성질의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근처에 있다면 반응하는 방식이랬지.’
황성에 올라와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제 목표를 실현해야 하는 아멜리니까, 부디 힐베르크 후작 만날 때도 저 팔찌를 끼고 나가기를….
나는 입으로는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면서, 속으로는 아멜리가 친부와 서로를 확인할 수 있기를 빌었다.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십여 년 동안 운명의 상대를 기다렸는데, 영애와 함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고마워서 그래. 부담 갖지 말면 좋겠어.”
물론 레오폴트가 기다린 건 내가 세뇌한 그놈의 종소리였지만 말이다.
나는 한껏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멜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우리 레오랑만 잘 지내고, 엄한 애랑 얽히지 말고!
그 이면의 메시지를 꿈에도 알 리 없는 아멜리는 조금 불을 붉히며 고개를 주억일 뿐이었다.
그러고 며칠 뒤,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을 만나기 위해 서신을 넣었다는 케인의 보고가 들어왔다.
그 날짜에 맞춰, 내가 프리지어궁에서 다과회를 열었고.
‘아멜리가 오후 늦게 간다고 했으니까, 이른 오후에 열어서 만찬 시간 직전에 파하면 되겠지.’
오늘의 타깃은 쿠첼 백작 영애, 리피샤 쿠첼이었다.
그녀가 힐베르크 후작저를 방문하는 아멜리를 목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내 목표였다.
‘리피샤, 정말 입이 싸서 문제야….’
가만히 놔뒀다가는 힐베르크 후작저 맞은편에 사는 리피샤의 눈에 아멜리가 포착될 확률이 높았다.
스칼렛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리피샤는 그걸 보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예정이었으니까.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리도 하시더니, 확실한 혼처를 하나 무시려는가 보더라고요? 아우렌바흐 소공작께서는 여러 패 중 하나에 불과했나 봐요.”」
아멜리의 아빠뻘, 아니 실제로 친부인 힐베르크 후작이 아직 미혼이어서 그런 헛소문이 통하는 거였다.
‘우리 아멜리는 엄마의 옛 지인을 만나러 가는 건데 말이야.’
두 사람의 실제 관계는 리피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멜리의 사교계 입지를 좁히고,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정신을 차리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차기 아우렌바흐 공작 부인으로 어울리는 건 정말로 스칼렛뿐이었으니까.
‘눈물겨운 충정이야, 정말.’
하지만 내 눈에 이 사건은 아멜리의 황성 생활을 곤란하게 만드는 ‘가짜 악행’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에 하등 도움도 안 될, 내가 반드시 처리해야 할 악행.
그리고 다과회 당일, 내 의도대로 리피샤는 아무것도 목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4황녀 전하께서 정말 안목이 탁월하셔요. 황성 사교계의 명성에 어울리는 사람들로만 꾸려진 다과회는 올해 처음 참석하네요.”
이렇게, 아멜리 없다고 돌려서 까는 소리만 하고 마는 것이었으니까.
‘그걸 봤다면 뭐라더라, 또래끼리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 게 귀족의 의무이자 권리라면서, 아멜리가 돈에 눈멀어 나이 많은 남자에게 몸 던지는 애라는 식으로 말을 흘렸을 건데 말이지.’
나는 그런 리피샤 쿠첼을 좀체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만은 정말 고마웠다.
‘오늘은 조금 친절하게 대해줘 볼까?’
급조하여 꾸린 다과회는 6월의 신록과 청량한 초여름 날씨 덕에 대성황이었다.
“전하, 혹시 올해는 사저에서 열리는 연회들도 많이 찾아주실 건가요?”
“그러고 보면 지난달에만 벌써 두 군데나 방문해 주셨군요?”
“다음에 참석하실 곳을 정하지 못하셨다면 저희 가문에서 여는 정찬회도 고려해 주시겠어요?”
“그보다는 저희 저택의 장미 정원에서 열릴 가든파티 어떠세요?”
“제 어머니께서 이번 달에 살롱을 크게 여실 건데….”
올해 내가 외부 출입이 많아진 것에, 오늘따라 영애들의 초대 공세가 아주 적극적이었다.
나는 거절도 수락도 아닌 미소로 답했다.
‘응, 아멜리랑 루시페우스 없으면 안 가….’
구경도 구경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가까워지는 걸 최대한 막으려고 글렌치아 연회나 자선 파티에 간 거였으니까.
원작에서 언급만 두 번 되는 4황녀 세실리아는 사교계의 섬 같은 존재였다.
등장하는 사교계 인물은 모두 스칼렛을 추종하는데, 레오폴트의 친구인 세실리아는 그들과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나저나 전하께서 그 영애를 개인적으로 부르셨다는 이야기가 도는데….”
“설마…. 아니시죠?”
내가 스칼렛과 교분을 다지기 시작한 탓에, 귀족파의 영애들은 나를 저들 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일부러 이들을 관리하기 편하게끔 신뢰를 준 것도 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리피샤 쿠첼이 오기 쉽도록 귀족파 영애들로만 자리를 꾸렸더니, 신나서 다들 난리였다.
“뭐어, 그 영애가 워낙에 인기가 좋아야지. 레오 말고도….”
그리 말하며 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영애들의 낯을 살폈다.
“예를 들어, 그… 알비누스 영식이라거나.”
내가 넌지시 한 말에, 영애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큽, 구석에서 웃음 참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