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2)
‘가슴팍…?’
고개를 젖혀 뒤쪽을 살피려 했지만 허사였다.
힘없이 내 고개가 떨구어지자, 나를 받친 사람이 커다란 두 손으로 내 양어깨를 감쌌고….
‘손이 꽤 뜨겁네….’
이러면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잠시 쭈뼛하는 느낌이 들었을까, 이내 온몸을 헤집던 어지러운 기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가셨다.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갑작스레 명료해지자, 놀란 내가 고개를 들려던 찰나였다.
“마법과 꽤나 어색하신 모양입니다.”
내 정수리 위에서 나지막하게 울린 목소리.
나는 축 늘어져 기대어졌던 몸을 가누어 내 머리 위를 확인했다.
“루시페우스 경.”
“이번엔 또 구면인 거고요.”
“제가 누구인지….”
“아, 못 알아본 것으로 해야 할까요.”
루시페우스는 엷은 미소를 띠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졌다, 지고야 말았다, 마탑의 마도구 제작자!
오늘 개시한 보닛인데, 지난번보다 더욱 복잡한 마력식을 썼다고 했는데…!
루시페우스에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모양이었다.
‘얘한테 마법으로 눈속임하는 건 포기해야겠다.’
나는 흐린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언제나 무감한 듯 아무런 기색도 없던 그의 다갈색 눈동자에는, 명백한 반가움 같은 것이….
“오늘은 에스메르 단주…이신 건가요.”
“어떻게…?”
내가 토끼 눈을 뜨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짧게 웃었다.
아, 아까 리나가 느낀 인기척이 혹시 그의 것이었을까?
‘하긴, 이 길드가 귀족파의 악행에 절찬리에 이용되는 곳이니까.’
그가 이곳에 있는 것 또한 그럴싸한 일이었다.
내가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눈을 끔벅이며 그의 낯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루시페우스의 얼굴에 조금 온화한 듯한 기색이 감도는 것도 같았다.
‘얘는 내 본모습이 보이나? 마법 보닛 썼을 때랑 안 썼을 때랑 표정이 똑같네….’
암조 애들처럼 세실리아 얼굴에 익숙해진 자가 아닌 이상, 보닛을 썼을 때랑 안 썼을 때 반응이 다른데. 변장 마법 쓰면 평범한 인상이 되니까….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별의별 생각을 태평하게도 했다.
그러니까, 안긴 채….
‘안긴 채?’
나는 순간적으로 파드득 떨었다.
“꺅.”
어쩐지 아늑하더라니!
내가 허둥대는 바람에 비틀대자, 리나가 빼앗듯이 내 어깨를 잡아 제 편으로 끌어왔다.
“단주, 괜찮으신 겁니까?”
리나는 내내 루시페우스를 노려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루시페우스의 품에서 리나의 품으로 이동돼버린 내 시야에, 마치 무고함을 주장하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인 루시페우스가 들어왔다.
그의 입매는 여전히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미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수줍게 느껴졌달까…?
그때, 나를 반쯤 끌어안은 리나가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변장하고 있어서 제 정체가 들키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요즘 암조의 최고 주의 대상에 대한 경계심만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단주님, 괜찮으신 거죠?”
“으응, 그냥 중심을 잃었던 것뿐이야.”
“네, 마법사들도 시야가 반전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연하게 울리던 루시페우스의 말끝에 헛웃음 같은 것이 섞여들었다.
“아마, 없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혹시 내 체질을 알아차리고서 변호해주고 있는 건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 때쯤, 루시페우스가 한 손에 쥐고 있던 장갑을 능숙하게 꼈다.
‘그러고 보니 루시페우스가 내 어깨를 잡았을 때 갑자기 어지러움이 가라앉았지.’
레베카의 신성력을 발동시키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그가 마력을 써서 나를 도와준 건가, 그러면?
‘마력으로도 그런 게 가능한가? 그런데 그렇다면…. 왜?’
이동 마법진의 후유증 때문일까? 머릿속에 피어나는 수많은 의문 중 그 무엇도 나는 명료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내내 리나는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한데 루시페우스는 그런 것쯤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양, 나만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내 낯에 피어나는 생각들을 낱낱이 읽으려는 것처럼….
이윽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상단을 꾸리신 줄은 몰랐습니다.”
“경께서 아셔야 할 일도 아니잖습니까.”
부유한 상단주지만 어쨌든 평민인 설정이어서 나는 존대를 써주었다. 그는 알비누스 후작 영식인 데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며 준남작의 기사 작위를 받은, 어떻게 봐도 귀족이시니까.
“역시, 매번 제 예측 밖이셔서…. 뭐, 알게 되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입가가 미미하게나마, 명백한 호선을 그렸다.
왜 자꾸 웃어…?
그의 낯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데,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리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차, 아직 리나에게 기대고 있었구나.’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는 척하면서 리나로부터 슬그머니 떨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저희가 아직은 황성에 거래를 튼 곳이 없어서 말이죠.”
“그러셨군요. 그러면 황성 상단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러 오신 걸까요.”
“뭐, 그런 셈이지만…. 경께서 저희 상단과 무슨 거래를 하실 일은 없으실 테니 과한 관심 아니신가요?”
“제 부친의 상단과 저는 무관한 일이지만, 거래라….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네?”
루시페우스는 알비누스의 상단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필요하다면, 에스메르 양…의 상단과 거래를 할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의 낯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각처럼 굳어 있었지만, 왠지 즐거운 듯 삐뚜름히 올라간 입꼬리가 생동감을 자아냈다.
무슨… 의도지?
‘아, 나와 정말로 거래를 할 만한 일이 있나?’
하긴, 그게 아니면 내게 살갑게 굴 일이 없겠지.
갑작스레 가라앉는 마음이 아쉬움이란 것을 몰라, 나는 내 얼굴에 시무룩함이 깃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루시페우스의 눈에 따뜻한 기색이 깃드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알비누스의 상단이라면, 당분간 황성 저잣거리를 교란할 일밖에 하지 않는데. 도대체 뭐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의 제안을 장난으로 치부하고 에둘러 거절하는 쪽을 택했다.
“저희가 경과 어떤 거래를 할 수 있을지, 제게는 떠오르는 바가 없습니다만.”
“차차 고민해보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빙긋이 웃고 있는 듯도 했다. 늘 그렇듯 그의 입매는 일자로 다물려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왜 자꾸 얽히고, 왜 자꾸 이런 해석을 하게 되는 걸까?
나는 이 상황이 자못 불만스러웠다.
“…상호 간에 이득이 될 건이 생각나시면 저희 상단으로 연락해 주시기를요.”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리나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상단의 정보가 담긴 작은 패를 루시페우스에게 건넸다.
메르제령에 구해놓은 건물과 황성에 에스메르 상단의 이름으로 구입한, 마차를 갈아타곤 하는 건물의 주소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걸 받아 든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기색을 살피고 싶지도 않아, 황급히 돌아서려던 찰나.
“곧.”
루시페우스가 내 손을 잡았다.
리나가 놀라서 제 손에 낀 너클을 꾹 쥐는 기색이 느껴졌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내 손을 받쳐 든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또 신중하게 내 손등을 문질렀다.
그 뜨겁고도 찌릿한 듯한 접촉은, 알제니아의 장원에서 돌아오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니 부디 일전의 그것을 늘 지녀 주시기를….”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와 달리 어딘가 다급하게 울려서, 나는 그의 낯을 황급히 확인해야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낯에는 그 특유의 석고상 같은 무표정이 아니라, 내게만 보이는 여유로운 미소도 아니라…. 한 꺼풀 벗겨진 듯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날것 그대로의 진심이 비친 듯한 그의 낯에는, 일말의 감격과 조금 다정한 듯한….
‘설마, 무슨 생각을.’
자꾸만 그런 해석을 하는 나 스스로가 당황스러워, 나는 얼어붙은 낯으로 손을 빼어냈다.
“그러시든지요.”
귀 끝이 달아오르려는 것 같아 나는 홱 돌아서 재빨리 밖으로 나가버려야만 했다.
그의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듯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정말로 아까 그… 아무 사이도 아니세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리나가 내내 품었던 듯한 궁금증을 곧바로 쏟아내었다.
“…그 말 할 줄 알았다, 진짜.”
“이 말을 할 줄 아신 거 보면 전하께서 생각하시기에도 조금 이상하죠?”
“…리나.”
얘네들 진짜, 단체로 왜 이래.
나는 신경질적으로 보닛을 벗어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다가다 몇 번 봤으니까 그럴 수 있지. 올해는 내가 사저 연회도 다니니까 말이야.”
“전하께서 지금껏 황실 연회 백 번 참석하셔도 누구와 친교나 다지셨던가요?”
“나는 그 경하고 친교 안 다졌는데?”
“…진심이세요?”
리나의 낯이 조금, 뜨악하게 빛났다. 엘런도 그러더니 얘까지, 진짜….
“…표정이 왜 이렇게 불경해?”
“전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모르시는 거예요, 모르는 척하시는 거예요?”
“내가 모르긴 뭘 몰라?”
“…하아.”
작게 한숨지으며 눈동자를 굴리는 게, 설마 지금 답답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세실리아가 되고서 누군가를 답답하게 해본 적 없는 나는 내 기사의 낯선 반응에 덩달아 뜨악해졌다.
“뭔데, 지금 그거?”
“아니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전하가 아니라 로즈버리 아가씨였으면 마법을 썼을걸요?”
내가 이동 마법진 때문에 어려워하는 걸 그가 눈치채서 아니었을까? 그걸 리나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 아니, 진심으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달리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자꾸만 추궁당하니 나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루시페우스는 어차피 아멜리를 좋아하고, 나한테는 그냥 도움을 베푼 것뿐인데.
“게다가 연락드린다잖아요.”
“뭐, 거래할 건수가 있나 보지. 이번 달에 알비누스 상단이 다른 상단들 섭외해서 뭐 할 거라고 했잖아.”
“그건 그거고, 그 뒷공작을 전하 상단 이용해서 꾸미는 거겠어요?”
“…뭐, 자금 세탁이든 뭐든 하고자 하면 물불 가리겠어?”
“그러니까, 그런 잡일을 굳이 전하 상단이랑 하겠느냐고요. 요는 거래가 아니라, 어휴.”
“아니라,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