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9)
“짝? 단짝 친구? 그런 게 왜 필요해.”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 듯 온 얼굴을 축 늘어뜨릴 레오폴트의 천사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레오 말고 가까운 또래를 찾으라면…. 스칼렛 정도일까?’
내 생각을 읽은 듯 리나가 새로운 화제를 던졌다.
“그나저나 게이블스 영애님은 곤란하시게 됐겠어요.”
“그쪽 동태에 대해 경도 좀 들었어?”
“뭐, 엘런이 전하께 보고 올리기 전에 귀띔해주는 정도죠. 아우렌바흐 소공작께 연인이 생기신다면 가문 내 입지가 어려워지시겠더라고요.”
원작에서는 이 시기에 한창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엇갈릴 때라 스칼렛의 걱정이 덜했는데, 지금 보면 둘 사이가 공식화되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저번에 아멜리가 수줍어하던 걸 보면 혹시…. 아, 아냐. 정말 그랬으면 레오가 와서 난리를 부렸을 거야.’
아무튼, 그리되면 스칼렛은 게이블스에서 버틸 명분이 사라질 텐데….
내 얼굴에 친우에 대한 걱정이 깃든 것을 본 리나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애초에 게이블스랑 아우렌바흐가 가능이나 했는지 말이지만요.”
“게이블스 후작이 욕심이 좀 많아야 말이지.”
“맞습니다, 맞아요.”
리나가 즐거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몸담았던 기사단에서 평민이라 차별받은 리나는 암조의 일을 천직으로 여겼다. 빨간 눈의 마을 탐사를 보낼 때도 그 초식동물 같은 귀족 나리들이 뒤집어지면 좋겠다면서 신났었으니까.
“게이블스 소후작이 아직도 자리를 못 털고 일어난 거지? 벌써 한 달이 다 됐는데.”
“영애님껜 잘된 일이죠. 후작은 영애님 상한가일 때 팔아넘기고픈데 후계자가 불구가 될지 말지 하는 상황이니.”
“혼처로 논해지는 곳은 있대?”
“글렌치아 공작가에 수정 광산이 많아서인지, 거기 방계 어디를 일 순위로 두고 있나 보더라고요.”
“바앙계에? 스칼렛을?”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라,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게이블스 후작의 그 비열한 낯짝을 열 번쯤 걷어차기도 했다.
“그러게요, 아무리 수정 광산이 급해도 그렇죠. 귀족파 실세 가문의 직계이자 사교계의 일인자에게 방계가 말이나 되나요?”
아무리 글렌치아라도 말이야…. 리나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면서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글렌치아 공작의 유일한 남자 형제가 기혼인 것을 생각하면, 글렌치아에서 미혼 남성이란 선대 공작의 오촌 조카밖에 없기야 하지만.
‘도대체 제 딸 취급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만간 스칼렛을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리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봤자 이 마차에 저랑 나 단둘뿐인데.
“알비누스의 차남이 그 영애를 연모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전하께서 주장하시는 바에 따르면.”
“내 주장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니까?”
“네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요.”
“아니, 그 경이 자선 파티에서 돌아올 때 그랬어, 내가 연적한테 기회를 줬다고.”
“…정말요?”
“응, 원망하는 것 같았다니까.”
나는 손거울에 나타났던 문구를 떠올리며 강경하게 말했다.
“흐음….”
미심쩍다는 듯 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요즘 얘들 왜 이러지?
루시페우스를 귀족파의 주요 인물로 철저히 경계하는 한편으로 자꾸 나와 못 엮어서 안달이었다.
“아이, 참. 알비누스의 차남이 전하를 좀 깊이 연모하면, 귀족파 일 알아서 무산시켜서 일거리 줄겠다고들 좋아했는데….”
허어, 나는 리나가 주워섬긴 말소리에 다시금 입을 떡 벌렸다.
나를 그렇게 놀려 먹더니, 속으론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어?
“일 덜하고 싶어? 그럼 감봉되든가.”
“윽, 전하께선 너무 금전 본위시지 말이에요…. 자주 말씀하시는 그 자본주의요.”
“아니이, 경들이 할 일은 망상이 아니라 분석이야. 응?”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부채만 펄펄 부쳤다.
내 안색을 살피던 리나는 히죽 웃고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그, 며칠 전에 로즈버리 아가씨가 마르크 백작을 찾으려고 2구역 쪽 카지노까지 가셨었거든요.”
“아이고, 그 험한 델.”
“예, 아니나 다를까 거기서 위험할 뻔하셨고요.”
이런 때를 대비해서 리나를 붙여두길 잘했지.
나는 마음속으로 세실리아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조금 전 흥분했던 것도 잊고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카데미에 함께 다녔던 마르크 선대 백작이 로즈버리령까지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아멜리의 할아버지인 로즈버리 선대 남작은 그 먼 길을 온 동문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큰돈을 덥석 빌려주었더랬다.
차용증은 썼지만, 그 기한이 지나고도 연락하지 않았고.
‘본인 아들이 영지 경영에 재능이 없는 줄을 알았다면, 선대 남작은 그러면 안 됐어.’
이미 가세가 기울었던 마르크 백작가는 갚으란 말 없는 그 돈을 갚을 마음이 없었다.
갚을 수도 없었고.
그 돈이 귀족파 유력자들에게 줄을 대는 데 사용되고 이미 다 없어졌던 것이었다.
‘그렇게 줄을 대고도 중앙 정치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으니, 현 백작이 카지노나 전전하고 있는 거지. 정말, 아멜리가 역대 로즈버리 가주들을 대신해 욕보고 있어.’
나는 고개를 까닥여 리나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 카지노가 귀족파 젊은이들 자주 어울리는 레이븐 백작 사교 클럽 근처에 있거든요.”
“아아, 그렇다면.”
그렇지, 그런 곳이 있었지.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이 귀족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한 비밀 아지트라면 레이븐 백작의 사교 클럽은 귀족파 영식들의 화려한 사교장이었다.
그곳 역시, 아멜리가 납치되고 나서 꼭지가 돌아버린 레오폴트가 루시페우스를 족치겠답시고 뒤집어엎는 곳 중 하나였다.
족치기는커녕 제가 한 방 먹어서 아멜리를 구출하는 게 늦어지고 말았지만.
‘이젠 신성력의 운용력이 수준급이니 일방적으로 당할 일은 없겠지. 내가 아멜리가 납치당하게 놔두지도 않을 거고.’
내가 속으로 뿌듯함을 느낄 때, 리나가 말을 이었다.
“마침 거기에 알비누스의 차남이 그 자리에 나타났지 말입니다.”
“그렇겠지.”
레이븐 백작의 사교 클럽이 근방에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아멜리의 곁을 맴돈다는 설정값 때문일 거였다.
“마르크 백작이 그 카지노의 호구… 아니, 주요 고객이어서 카지노 경비들하고 로즈버리 아가씨가 몸싸움이 났거든요? 로즈버리 아가씨가 밀쳐지시는 바람에 넘어지셨는데.”
“맙소사. 그래서 경이 나섰어?”
“저야 일단 지켜보고 있었죠. 전하께서 그, 알비누스의 차남이 로즈버리 아가씨를 연모한다고 하시니까.”
“으응. 그렇지.”
나는 뭔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보통 좋아하는 이가 그렇게 당하면…. 쓰러지는 거 받아주고, 대신 화내주고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리나의 말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전생 현생 통틀어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인지라.
“으음….”
대신 재빨리 ‘공제눈’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레오폴트는 확실히 아멜리의 위기 때마다 정말 순정만화 속 왕자님처럼 등장해주곤 했다.
하지만 아멜리의 시점으로 볼 때 루시페우스는 그렇게 몸 던지는 타입은 아니었단 말이지.
‘멀리서 지켜보다가, 주변 상황을 이용해 제가 아니면 못 돕게 해서는 희망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통제광 같은 거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못한 채 리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게, 로즈버리 아가씨가 빤히 자기 쪽으로 쓰러지시는데 직접 품으로 받으면 될 것을, 굳이 마법을 쓰더라고요.”
“그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나 보지. 그에게 마법은 숨 쉬듯 쓰는 거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데 마법을 쓴다고요? 몸에 닿기조차 싫어하는 사람처럼….”
리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정말 연모하는 게 맞을까요?”
나는 가당찮은 말을 한다는 듯이 리나를 쳐다보았다.
또 나랑 엮으려는 건가?
“아니, 이건 농담이 아니라요. 제가 전하의 감이나 정보력을 믿지 못한다는 말도 아닌데…. 워낙에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잖습니까.”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제가 기사 노릇을 하느라 연애한 적은 없어도, 연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가…?
리나의 말에 긴가민가하던 나는, 그녀가 루시페우스의 설정값을 모르니 이렇게 오해하는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원래 루시페우스는 뭔가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굴기는 했었으니까. 아멜리 손도 춤출 때 아니면 잡은 적 없고.’
감금까지 할 정도로 집착한다면 억지 스킨십이 한 번쯤은 나올 법도 한데 루시페우스의 에피소드에서 그런 것은 단 한 번도 없었더랬다.
‘그래서 루시페우스를 두고 ‘매너 손 집착남’이라는 별명도 있었고.’
‘공제눈’이 전연령가여서 그런지, 막장인 와중에도 강압적인 스킨십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아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더랬다.
‘말 듣고 생각해보니, 아멜리에게 눈 돌아서 별의별 일 다 벌이는 설정치고는 이질적이긴 하네.’
그래서 ‘매너 손’이 더 돋보이기도 했겠고.
‘공제눈’ 작가, 전연령 로맨스의 수호자였던 걸까…?
‘루시페우스가 본격적으로 집착하는 게 아직이라 그럴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설정이 또 있을 수도 있고….’
루시페우스가 본격적으로 아멜리에게 집착하는 것에는,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따로 있었다.
내 개입으로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사랑이 쾌속 순항 중이기에, 그 에피소드가 제대로 발동할지 자신이 없었지만.
「“영애께서 무고하십니까. 황실파의 수장이 되실 소공작과 한배를 타신 사이 아닙니까.”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시면서 그리 말하지 마세요.”」
저와 친밀하게 굴어놓고 정작 제 정적인 레오폴트와 수줍게 구는 아멜리를 보고서, 배알이 뒤틀린 루시페우스가 모진 소리를 했다가 뺨 맞는 장면이었다.
루시페우스의 집착이 바로 그 에피소드를 계기로 발동 걸리는 것이었다.
‘그게 조만간 열릴 태양절 연회 때의 일인데, 아멜리와 레오폴트가 거의 대놓고 연애하고 있으니 어찌 될지…. 그래도 아멜리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비슷하게 흘러가려나…?’
어쨌든 루시페우스가 제 입으로 아멜리를 연모한다고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날, 알제니아 장원의 자선 파티가 끝나고 내 마차를 얻어 타고 오던 중에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보니, 또 그가 내 손을 잡아보던 일이 떠올라 손끝이 홧홧해졌다.
‘그런데 그 매너 손이, 나한텐 왜 그랬지?’
마치 부조라도 뜨려는 듯, 난생처음 만져보는 것의 촉감을 확인하듯 한참 동안 내 손을 만지작대던 그의 손길….
요즘 들어 종종 그러하듯, 그와 연관된 생각에 빠져들던 찰나였다.
“전하, 내리시죠.”
리나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으, 으응, 그래.”
허튼 생각 말고 일해야지, 일.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변장 보닛을 눌러썼다.
일전의 보닛은 루시페우스에게 들켜서 찝찝해진 김에, 올해 유행에 맞춰 새로이 제작한 것이었다.
‘마탑에서 최신 기술을 쏟아부은, 현존하는 최고의 변장 모자라고 했지.’
혹시 마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이 이 마법을 간파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마탑의 마도구 제작자들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엄청난 공력을 쏟아부었다고 했다.
‘은신 마법까지 걸었다고 했는데. 루시페우스가 이것마저 간파하면….’
그를 생각하니 또, 심장이 벌렁거렸다. 생각만으로 공포를 느끼게 하다니, 역시 세계관 최강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