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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64화 (64/220)

64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8)

아, 답답하고 해맑은 나의 친구이자 남주.

‘그거 곱씹을 시간에 아멜리 취향이나 빨리 입력하라고!’

나는 눈에 힘을 주고서 무언으로 레오폴트를 다그쳤다. 딱히 알아들은 것 같진 않았지만….

내가 준비한 먹거리들이 아멜리의 취향을 확실히 저격하여, 금세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케인 경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예, 그 가족이 대대로 저희 가문의 일을 돕고 있었거든요.”

“충심이 깊은 게 가족 내력이구나. 케인 경도 내게 충성스러운 부하지.”

“전하께서 너그러우신 주군이셔서 존경한다고, 케인 경이 늘 자랑한답니다.”

수도에 내 집 마련해주는 주군이 너그럽지 않을 리가 없지.

나는 내 내탕금과 그레이스의 투자금이 만들어낸 자본주의식 인자함을 배가하도록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무조건 네 편이란다, 아멜리.

“케인 경이 잘못된 연애에 단단히 물린 모양이야. 데뷔탕트 때 영애가 덩달아 곤란을 겪었다고 들었어.”

“아, 아닙니다….”

보기만 해도 미뢰를 아리게 할 정도로 달달한 것들의 향연에 반짝반짝 빛나던 아멜리의 눈이, 조금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전하께서 배려해주신 덕에 지난번 자선 파티에는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응, 자선 파티. 재밌었지?”

“네, 경치도 퍽 아름다웠고요.”

그날을 떠올리는 아멜리의 눈빛에 다시금 아주 미세한 침울함이 깃들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레오폴트와 붙어 있었어도 귀족파 영애들의 연회였는데.

‘스칼렛이 입단속을 시켰대도 눈빛까지 관리할 순 없었을 테니까.’

다음번 연회부터는 그럴 일 없게끔, 나랑 친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이 자리를 마련한걸.

‘레오폴트가 레오라 부르지 말라고도 했고, 지난번에 귀족파 영애들과 어울려 줬으니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아멜리에게 와플과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권하며 폴리나네의 밀빵을 뜯어 먹을 때였다.

레오폴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무탈히 돌아가셨죠?”

그러고 보니…? 그날 내가 꾀병을 부려서 아멜리와 첫 춤을 추게 해준 이후로 근처에 다가온 적도 없던 레오폴트가 하는 말이었다.

“응. 빠른 확인 고마워, 경?”

“두 분이 말씀 나누시는 게 보기 좋아서….”

안 끼어든 거라고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레오폴트가 중얼거렸다.

준연인 앞에서 참 보기 좋은 처신이야, 응?

나는 됐다는 듯 레오폴트에게 눈을 흘긴 뒤 아멜리에게 말했다.

“케인 경을 내가 뺏어가서 미안해, 영애. 귀택은 무사히 했다고 케인 경에게 들었어.”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케인 경은 그저 제 보호자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덕분에….”

아멜리가 얼굴을 붉히며 제 맞은편의 레오폴트를 곁눈질했다.

손이라도 잡은 걸까?

이 세계관의 느리고 느린 연애 진도를 생각하며 나는 흐뭇하게 주인공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손쯤은 별것도 아닌데. 제 손 뜨거운 거 확인하고 싶은지 체온 비교하자고 굴던 애도 있었….’

아니, 그러려던 나는… 갑작스레 끼어든 생각에 당황하고 말았다.

“켁, 켁.”

“전하, 괜찮으세요?”

“으응, 사레가. 괜찮아.”

나는 손으로 부채질하여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생각 금지, 금지!’

몇 번을 더 기침하고서야 애써 진정한 뒤, 나는 다시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영애는 앞으로 황성에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야? 데뷔탕트나 하자고 올라온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 그게….”

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아멜리는 일순 당황한 낯빛을 띠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을 테니까.

사리에 밝은 그녀는 케인을 통해 말이 흘러 들어갔으리라 깨닫고는 살며시 고개를 떨궜다.

흠, 자존심 센 여주에겐 좀 상처려나.

“제 가문의 사정이 얽힌 일들이 있어, 사람들을 좀 찾고 있습니다.”

“케인이 좀 돕고 있어?”

“…케인 경은 궁의 일만으로도 바쁘니까요.”

아멜리의 낯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붉게 물들었다.

‘내 앞에서 감히 거짓을 고하지는 못하겠지만, 레오폴트 앞에서 제 치부를 드러내는 셈이라 아무래도 수치스럽겠지.’

그녀가 황성에서 목표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돌려받을 생각 없었다고 해도 될 만큼 옛날의 빚을 독촉하러 온 것도 창피하고, 레오폴트의 사재(私財)에 비하면 금액도 소소할 거라 또 창피하고. 로즈버리 영지의 사정이 그만큼 궁핍하다 자백하는 셈일 테니까.’

하지만 다정한 레오폴트의 얼굴은 순전한 걱정으로 가득 찼다.

“밀리,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어려움을 안고 산답니다. 제가 어떤 어려움을 짊어져야 한다면, 부디 그대의 것을 나눠 지는 것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걱정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응접탁자 위로 상체를 멀찍이 숙여, 최대한 아멜리에게 다가가려는 듯한 그의 모습….

내가 차게 식은 눈으로 다과상 위에 자리한 레오폴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밀빵을 거칠게 뜯을 때였다.

“레오, 당신 말은 퍽 달콤하지만요…. 전하 계신 앞에서 무슨 무례예요.”

그리 수줍은 듯 말한 아멜리는 레오폴트의 어깨를 조금 떠밀고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저야 오해할 일 없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본인은 어려움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아우렌바흐의 후계자로서 배려심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요?”

“아, 역시 나의 밀리는 늘 사려 깊어서 내게 깨달음을 주는군요.”

오오, 그래, 이거지.

해맑은 남주와 세상 물정에 밝은 여주가 서로를 보완하며 쌓아가는 사랑!

나는 레오폴트가 여전히 나를 공기 취급하면서 함부로 감격에 빠져 있는 모습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폴트 시점의 이야기만 들어서 몰랐는데, 조금 빨리 이어져도 둘의 관계는 원작에서 보았던 그대로구나.’

그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퍽 마음이 즐거워졌다. 이젠 아멜리에게조차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의 실랑이가 끝나갈 무렵, 나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영애, 혹시 말이야.”

레오폴트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아낌없이 베풀던 아멜리가 흠칫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레오폴트더러 무례라 해놓고는, 저도 나 있는 거 잠시 까먹은 거지.

그래, 그럴 수 있어.

너네 세기의 사랑 중이니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말이야.”

“네, 전하.”

내 말을 듣는 아멜리의 낯에는 경계심을 온전히 놓지 못한 기색이 있었다.

지난번 자선 파티 때 내가 귀족파 영애들과 함께했던 것도 있고, 나를 레오폴트의 친구로 의식하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나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럴 거였다.

‘귀족파에 잔뜩 데고 난 뒤에는 제 편을 알아보는 감이 아주 발달했었는데. 아직은 내 진심을 못 알아보나 봐.’

내 활약으로 아멜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시련들이 대폭 생략되었으니 말이다.

‘루시페우스하고는 스스럼없이 이야기 나눌 정도도 됐으면서. 그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나는 내 여주인공에게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끼며, 그날 자선 파티에서 아멜리와 마주 보고 있던 루시페우스를 떠올렸다.

꾹 다물린 그의 입은 사실 호선을 그리려 했었을까.

‘공제눈’에서 묘사된 바처럼, 그는 아멜리를 대할 때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랑 단둘이 있을 때면 그의 입에는 종종….’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깜짝 놀라서 작게 고개를 털었다.

‘아잇, 또. 주인공들을 앞에 놓고 있으니 서브 남주 생각이 자연스레 드네. 내가 뭐라고.’

암조 애들이 자꾸 놀려서일 수도 있고, 루시페우스와 세실리아의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해서일 수도 있고….

‘원작에서도 이렇게 엮였는데 생략된 건가? 공제눈 작가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자꾸만 구해주고, 연회 때마다 얽히고, 나를 감시하겠다고 마도구를 강제하고….

내가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구경하겠답시고 자꾸 무대를 기웃거려서 그런 건가?

‘내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해. 관객이자 각색가, 뭐 그런 존재 말이야.’

원작 속 세실리아의 비중은 내 신성력과도 같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되새기며 나는 원래 하려던 말이나 이었다.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찾아가 봐. 사교계 평판이야 찰나일 뿐, 오랜 인연이 더 무거운 법이니까.”

나는 청년 시절 풋사랑이었던 붉은 머리의 여인을 아직 잊지 못했을 한 외로운 남성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멜리 엄마의 옛 지인으로, 독신의 남성을 홀로 찾아가는 게 에티켓에 어긋날까 봐서 아멜리가 주저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이상한 소문이 나기는 하니까, 그것도 방지해 줘야겠고.’

한 중립파 후작가의 가주인 그는 무려, 아멜리의 친부.

‘막장’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출생의 비밀이 아멜리에게도 있었던 것이었다.

‘아멜리가 친부를 찾으면 아우렌바흐 사람들의 반대도 수그러들 테고.’

물론 지금 보면 로즈버리의 가문이 한미해서가 아니라, 레오폴트의 처신이 잘못돼서 반대할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나는 잠시간 레오폴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가, 문 옆에 대기 중인 아네트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야.”

아네트가 은쟁반에 손수건 하나를 받쳐 들고 왔다. 가운데 내 인장이 수놓인 손수건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아멜리의 낯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건, 전하의 증표 아닌가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그냥 놀러 와도 좋고. 소공작 없이 말이야. 내가 또래 여성 친구가 없어서.”

부담스러워하지 않게끔, 한쪽 눈도 찡긋해주고.

그걸 보는 레오폴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멜리는 여전히 제게 어찌 이런 호사가 생기나, 얼떨떨해하는 낯이었다.

‘여주인공과 안면 트기, 성공!’

그녀의 경계심이 누그러지려면 한참 먼 것 같으니, 그때까진 음지에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았지만.

아멜리의 비밀 호위를 맡은 리나는 퍽 즐거운 기색이었다.

애초에 리나 본인이 암행을 즐겼고, 암조 중 그녀의 암행 실력이 가장 빼어나기도 했다.

더구나 예쁜 사람 좋아하는 리나는 아가씨와 가까이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아했다.

‘1소대가 아니니까 케인과 적당히 거리가 있고, 같은 여자니까 들키더라도 아멜리를 안심시킬 수 있고.’

황성으로 돌아오고서 한 열흘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리나는 벌써 아멜리를 퍽 친근하게 여기게 된 것 같았다.

“소공작께서 전하를 그리도 따르시더니, 결국 제 사랑 찾아서 떠나시고 말 줄이야. 로즈버리 아가씨를 보니까 왜 두 분이 친우로 남으셨는지 알 것도 같고요.”

두 분의 장르가 다르셔서 말이죠, 황성 시내로 나가는 마차 안. 제 업무에 대해 보고하던 리나가 느물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케인이 비번이어서 아멜리가 집에 머무를 예정이기에, 오랜만에 비밀 호위 임무 대신 나를 수행하게 된 거였다.

“레오와 내 사이를 곡해한 건 경들이지. 그리고 떠나긴 뭘 떠나? 걔 인간관계는 원래 넓은 편이었는데.”

“넓되 얕으셨고, 와중에 전하와만 깊었죠. 그러면 이제 전하께서는 새로운 짝을 찾으셔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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