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7)
‘로즈버리 선대 남작에게서 돈을 빌렸던 가문들이 당시 귀족파의 실세 가문들에게 청탁을 넣은 정황이 있다고…. 이 청탁이 불법이었다면 귀족파에서 입막음하려고 할 테니, 루시페우스가 나설 수도….’
‘학자의 탑에서 방문 허가가 나서 조만간 알렉스가 다녀올 예정이라고…. 수확이 좀 있으려나? 루시페우스가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핫, 또. 자꾸만 그에게로 뻗어 가는 생각의 가지들.
최근 그로 인해 겪은 감정의 너울이 너무 커서 그런 걸까?
나는 자꾸만 집중을 해치는 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멜리 쪽 일에 우선 집중하자. 암조를 창설한 것부터가 그 두 사람을 위한 일에서 시작한 거니까….’
그리 다짐하면서 서류의 글자들에 코를 박았지만, 여전히 루시페우스와 빨간 눈들에 대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후미진 골목에 쓰러져 있던 깡마른 어린아이의 모습과 빨간 눈의 마을의 신산한 내력….
으으, 자꾸만.
‘아, 오늘은 포기다, 포기.’
밤이어서 자꾸만 허튼 생각이 나는 걸까, 혼자 있으니 망상의 가지가 뻗어 나가는 걸까.
내일 일어나서 다시 보기 위해 보고서를 협탁에 올려두고서… 나는 충동적으로,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든 손거울에서는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저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라진 그 손거울을, 왠지 꺼림칙한 마음에 넣어두고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
아니, 잊었다는 것은 순전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 손거울의 존재를 늘 의식하고 있었다.
알제니아의 장원에서 돌아온 날 밤에도 그때처럼 빛이 새어 나왔지만 애써 모른 체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는 그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번번이 그는 무언가를 시험이라도 하듯 내 손만 만져볼 뿐이었으니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으나, 나는 그 이상 깊이 알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호기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왔던 말이 남아 있으려나?’
여전히 그 틈에서는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레베카가 일상적인 수준의 마나만 있다고 했는데, 그게 이렇게 오래 유지되나.’
마법 보닛을 간파한 것도 그렇고…. 그가 이 시대 최고의 재능을 지닌 마법사라는 걸 알기야 알았지만, 매번 새로이 놀라웠다.
손거울을 열어 보니, 역시나 거울이 있어야 할 부분에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날 온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께 빚을 달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군요.」
‘그 빚 다 갚은 거 아니었나? 비밀 함구하기로 한 거랑 무슨 확인인지 뭔지 하겠다고 손잡은 거.’
손잡은… 거….
그의 찌릿한 듯 뜨거웠던 손끝이, 내 손가락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느릿하게 문지르던 그의 모습… 같은 것이 뒤따라 떠올랐다.
뺨이 조금 달아오르려고 했을까.
‘아, 아니, 뭐, 원작에서 아멜리랑 춤추면서 손이 뜨겁네 어쩌네 한 대화가 아주 헛소리만은 아니란 걸 안 셈이지.’
누구에게랄지 모를 변명을 하며 나는 그의 글씨를 다시금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내 호위들을 안 해치고 내버려 뒀다고, 그게 또 빚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빚이 뭐가 또 남았다고….”
그 순간, 내 말소리를 듣기라도 한 양 글씨가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꺅.”
지난번 기사들이 놀라 들어왔던 것이 떠올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손거울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잠시 후 손거울에 재차 빛이 나더니,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은사를 진 분의 목숨 빚인데, 그 정도는 너무 작지 않을까요.」
으앙, 안 죽였으니 살려준 셈이라는 거야, 뭐야?
“확인했다며….”
「그건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손 잠깐 내준 걸로 구해준 걸 갚는 셈 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이 손이 그냥 손이 아니라 황실 금지옥엽의 손인데….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덕분에 연모하는 이가 연적과 붙어 있는 걸 넋 놓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요.」
…그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나? 그래서 나를 원망하나?
하지만 아멜리가 내 눈앞에서 루시페우스와 가까이 지내는 걸 볼 순 없었는걸….
“내, 내가 레오랑 친구니까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원작이 어쩌고 할 수 없어, 나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만 잘 발라내어 기어들어 가듯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안 들렸을까?
얼마간 손거울에 변화가 없어, 그걸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헛웃음을 흘리며 손거울을 닫으려던 그때.
「애칭을 허락하신 친구 사이.」
엥?
애매하게 끊겨서 온 듯한 메시지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적다 만 메시지를 실수로 보낸 것처럼 끝을 맺지 못한 문장.
「보기 좋습니다.」
…으응?
난데없는 칭찬에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그에게는 친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친구가 있는 게 부러운 걸까…?
나도 친구란 레오폴트밖에 없긴 한데.
“근데…. 내 말이 들리는 거야?”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족의 후예일 텐데 손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쯤이야, 입꼬리를 미세하게 들어 올리는 그의 잘 빚은 듯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작은 중얼거림까지 다 듣다니. 그의 마법 재능이 강대하단 것이 다시금 실감 났다.
그래서일까. 다시금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심장도 빨리 뛰고….
‘빨간 눈이라고 다 자기 같으려고? 그 마을 사람들은 신성력 쓰려고 마력을 억제했다는데.’
마족의 후예라는 헛소문이 상처라서 저리 말하는 거라면,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해 알려줘야 하나…. 생각이 또 거기에까지 이르러, 나는 다시금 화들짝 놀랐다.
‘알려주긴 뭘 또. 그는 적이야. 오지랖 금지.’
그가 후작에게 부화뇌동하여 격랑을 일으키려는 동기도,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한 정보도,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에 빠지신 걸까.
한참 동안 아무런 소리도 느껴지지 않아, 루시페우스는 다소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혹 그대로 잠드셨나.
그것이 상상만으로도 퍽 보기 좋은 풍경이라, 루시페우스는 짧게 웃었다.
소파에 길게 누운 그는 팔걸이에 올려둔 구두코 너머로, 이 성에서 가장 고귀한 곳 화려한 침상에서 잠들었을 그녀를 그렸다.
내밀한 사생활을 상상한다는 생각에, 가슴께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졌다.
그 공상이 음침하니 창피해서 그런 거겠지.
‘고이 주무시길.’
그는 슬며시, 그 손거울에 연결해 두었던 감각을 거두었다.
한편으로는 제가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여겼다…라는 생각에 이르러, 낯섦을 느꼈다.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을 즐겁게 여긴 적이 있었던가.
제 기억을 헤집어 보아도 타인과의 교류가 즐거웠던 적은, 그 어느 생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일종의 당혹감으로 다가왔을까.
그는 슬며시 제 입가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그 손길은 마치 누군가로부터 제 낯을 가리려는 손짓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레오…라.’
그건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일컫는 거겠지.
그는 살면서 애칭이랄 것을 가질 기회가 없었고, 그런 걸 부러워한 적도 없었지만….
“내가 레오랑 친구니까 당연한 일이지.”
그 말을 들었을 때 한동안 아무 말도 자아내지 못했던 그 마음은, 도대체 뭐였을까.
수년 전 아카데미에서 그녀가 그 거슬리는 이와 단둘이 쏘다니는 것을 볼 때 느꼈던 감정도 분명, 비슷했던 것 같은데….
오래간 죽이려고 노력했던 감정이란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다, 그녀 때문이었다.
루시페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참으로 곤란한 분이셨다, 제 작은 빛께서는.
“만나서 반가워, 로즈버리 영애.”
아멜리가 내 집무실로 들어서는 걸 보며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드디어, 아멜리와 안면을 트는 날이 온 것이다…!
‘달다 달아, 성공한 덕후의 인생.’
그리고 그 뒤로 헤벌쭉한 얼굴을 해서는 아멜리를 에스코트하며 들어오는 레오폴트….
행복해하는 남주의 얼굴을 보니 흐뭇하면서도, 남자 혈육이 연애하는 꼴을 보는 것 같아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역시, 레오폴트를 두 가지 방향으로 좋아하는 나.’
그런 짓궂은 마음은 숨겨둔 채, 나는 내 책상 앞으로 다가오는 아멜리를 바라보았다.
아멜리의 푸른 눈동자는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고, 간신히 미소를 만들어낸 입꼬리는 단단히 굳어 있었다.
‘데뷔탕트 무도회 때보다 더 긴장한 것 같네.’
황궁에 온다고 꼼꼼히 치장했겠지만, 귀족 아가씨를 모시는 데 익숙한 하녀를 구하지 못했는지 차림새가 퍽 수수했다.
화장도 그렇고 머리 모양도, 황궁의 하녀들조차 황성 최신 유행을 따르는 걸 생각하면 퍽 초라한 꾸밈이었다.
‘케인 녀석, 용돈 준 걸 어디에 쓴 거야? 치장에 빠삭한 하녀로 구했어야지.’
그럼에도 여주인공의 상징인 분홍색 머리칼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곱슬기 덕분에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지만.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4황녀 전하. 로즈버리 남작가의 둘째 아멜리라고 합니다.”
“응응, 딱딱하게 그럴 것 없어, 일어나.”
나는 가볍게 손짓을 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아멜리를 일어나게 했다.
쭈뼛쭈뼛한 얼굴로 상체를 들고 드레스 자락을 가다듬는 아멜리.
그 드레스는 데뷔탕트 날 입었던 것을 유행에 맞춰 수선한 것으로 보였다.
황궁에 들어서는 이 기념비적인 날에는 아무래도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고 싶다는 마음이었겠지.
‘역시 사랑 넘치는 여주의 마음가짐이야.’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두 사람을 응접탁자 쪽으로 안내했다.
“소공작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내가 저를 ‘소공작’이라고 지칭하자, 조마조마해하던 레오폴트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짜식, 고마워해라.
“오월제 연회 때 처음으로 만났다고?”
“네, 황송합니다.”
“응? 황송할 게 뭐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사교계와 담쌓았으니, 편하게 해.”
실제로 아멜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아멜리가 사교계에서 마주친 적 없었을 이들만이 집무실 안팎에 자리해 있었다.
헨리에테 또한, 아멜리가 종종 마주쳤을 거라는 이유만으로 오늘 조기 퇴근시킨 상태였다.
“처음 만나는 손님이니까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차려 보았어.”
나는 응접탁자 위에 차려진 다과를 가리키며 수줍게 말했다.
필링이 빵빵하게 들어간 마카롱, 촉촉한 시트에 모카 크림을 바른 케이크, 크림치즈가 듬뿍 들어간 타르트, 캐러멜 시럽을 듬뿍 뿌린 꾸덕한 브라우니, 일일이 생크림과 딸기 시럽, 초콜릿 시럽 등을 뿌린 와플 조각들.
이날을 위해 나는 ‘공제눈’을 십수 번 정주행하며 익힌 아멜리의 입맛 데이터베이스를 다 털었다.
‘완전 한국식 서양 디저트 취향.’
거기에 내가 2구역 집을 구해주는 바람에 못 먹어봤을 3구역 폴리나네의 밀빵도 함께였다.
“내가 아우렌바흐 소공작과는 워낙에 형제처럼 자라서 말이지, 예의 차릴 사이가 아니라 이렇게 마음껏 차려놓고 먹어.”
“와아….”
예법도 잊고 탄성을 내뱉은 아멜리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세실리아와 전생의 내 혀가 조금 다른 탓인지, 건강식에 적응해서인지 내게는 이제 퍽 달게 느껴지는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다, 뚱카롱.’
내가 윗사람의 미덕으로 옴뇸, 먼저 마카롱을 베어 물었을 때였다.
“전하, 근데 저희가 언제 이렇게 먹었다고…?”
그리고 레오폴트는, 내가 아멜리의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적당히 꾸며낸 말의 진위를 가리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