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6)
물론, 그것은 보고서긴 했는데, 엘런이 언급했던 대로….
“경, 어차피 서면으로 뭘 알리고자 이걸 보낸 건 아니지?”
“그래야 제가 조금이라도 더 전하의 존안을 오래 뵐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끔 경의 그런 너스레가 핑계로 들릴 때가 있어.”
“오해십니다, 전하.”
나는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만 적혀 있는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리나의 진심인 듯한 농을 한 귀로 흘렸다.
「빨간 눈의 마을, 바다에서 하루 거리, 역사 500년, 뇌물 줘서 촌장 접촉.」
‘전생에서 전보를 쳤대도 이거보단 길지 않을까?’
먼 거리에서 몇 달 내내 발품을 판 리나의 노고를 무시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빨간 눈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을 줄이야…. 건국 이후로 본대륙 지도가 수십 번은 개정됐는데, 지금껏 아무도 몰랐잖아? 학자의 탑에서도 뒤집어질 거야. 정말 고생 많았어.”
내 호들갑에 리나가 멋쩍게 웃었다.
“저도 막상 들어설 때까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규모도 컸고요.”
“응응, 자세히 이야기해봐.”
리나가 잠시간 목을 축이고는, 본격적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생각 외로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촌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역사가 거의 500년은 됐다고 하는데….”
“500년? 제국 역사랑 맞먹네.”
“그러게요. 100호쯤 되는 가구가 살고 있어서 규모도 웬만한 소규모 영지에 맞먹었습니다. 지금까지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로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거지?”
“애초에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방 300일스에는 주거지역이 없지 말입니다.”
300일스면 걸어서 꼬박 사흘 거리였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반경 300일스에는 마기가 워낙에 강력해서 사람은 물론이요, 생명체도 자생하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리나가 발견한 빨간 눈의 마을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 반경 300일스 경계쯤에 있었다.
“게다가 특이한 게, 마을에 거주하는 이들 중엔 빨간 눈이 아닌 이들도 종종 보였습니다.”
“외지인인가?”
“빨간 눈들의 사이에서도 빨간 눈이 아닌 아이들이 종종 태어난다고들 하더라고요. 그게 유전은 아닌지.”
“유전은 아니라…. 빨간 눈들이 마족이라는 설을 정면으로 반하는 증거가 되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그런 자들이 근방의 영지에 나가 취직하거나 삯일을 해서 마을을 부양하는 모양입니다.”
“자급자족이 힘들어?”
“마기가 워낙에 강력하니까요. 대지를 정화할 수가 없어서 경작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용케도 500년을 버텼네.”
“근방에 자생하는 과일이나 버섯 같은 것들을 채취하거나 사냥해서 먹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마기에 오염됐어도 식용으로 쓸 만한 것들이 있대요.”
“마기에 오염됐대서 무조건 독성을 띠는 것만은 아니구나.”
나는 아카데미 사육장에서 교보재로 활용되는 마멧돼지와, 조만간 시중에 풀려 황성을 혼란에 빠뜨릴 마기에 오염된 약초 같은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식량으로 회유한 거야?”
“예, 추수철까지 버틸 수 있도록 곡식을 몇 수레 가져갔는데, 가는 길에도 자꾸 마기에 오염돼서 고생했습니다.”
“정말 고생했어. 가는 길 내내 정화하고, 거기서 쉬다 오느라 시일이 더 걸렸겠구나.”
“그럼요, 마음 같아서는 얼른 전하를 독대하여 보고를 올린 뒤 전하의 미소로 마음의 포상을 받고 싶었는데요.”
“하하, 그런 쓸데없는 말은 그만 좀 덧붙여도 되는데.”
“진심입니다, 전하.”
밖에서는 못할 농지거리를 제 상관에게만 마음껏 하는 부관을, 나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빨간 눈들 중에서는 외지에 나가는 자는 없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게 힘드니까요.”
나는 어느 날 안경이 벗겨진 채로 골목에 쓰러져 있던 어린 루시페우스를 떠올렸다. 그가 해코지를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경계하던 기색이 완연했던 걸 보면 아무래도….
“마탑 같은 데도?”
“마탑도 외지는 외지라, 진출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쩌면 마탑에서 루시페우스가 빨간 눈인 걸 알고서 거절한 걸까…?
마탑에서 거절당하고 제 방에서 달빛 아래 흐느끼던 어린 루시페우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사정이 딱하네.”
“그리 여겨 주시는 전하여서, 제가 충심을 다합니다.”
리나가 내게 충성을 다하는 이유 중에는, 선머슴 같다고 어딜 가나 따돌림받던 그녀를 특별할 것 없이 대했다는 것도 있다고 했다.
‘…물론 예쁜 걸 좋아하는 리나에게는 세실리아의 얼굴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나는 세실리아의 외모를 안겨준 환생과, 차별이 나쁜 거라는 인식을 안겨준 전생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어쨌든 리나는 유능한 부관이니까.
“그런데, 마탑은 왜…. 전하께서는 혹시.”
“응, 혹시 빨간 눈이 마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마족설이 완전히 허황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마법사가 마족의 후예는 아니지만, 인간이 쓰는 마력이 마계의 힘과 닮았다는 학설이 있었던 것이다.
“으응, 뭐…. 그런 셈이지.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달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며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암조를 신뢰한대도, 아무리 루시페우스가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 해도… 중앙에서 활약하는 후작가의 자제가 빨간 눈이라고 일러두는 것은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입단속하라고 일종의 협박을 받기도 했고….’
심장이 두근두근…. 그날 그 뜨거웠던 손끝을 떠올리자, 학습된 공포심이 어른어른 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진저리를 치며 리나에게 보고를 속행하게 했다.
“안 그래도, 빨간 눈 중에 마력을 발현한 이가 많다고는 하더라고요. 하지만 마탑에 갈 수 없으니 체계적으로 익힐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대신 신성력을 단련했다 합니다. 대지며 식량이며 계속 정화해야 하니까요.”
“신성력과 마력이 충돌하면 폭주할 수도 있다니까, 신성력을 쓰기 위해 마력을 억제해야겠지.”
“네. 신성력이 없으면 거기서 살기 어려우니, 남은 이들은 다 신성력을 꽤 많이 타고난 이들밖에 없다고 하고요.”
“그렇구나.”
나는 리나의 보고에 짤막하게 대꾸하며 생긋 웃었다.
내 부관의 공로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그리 웃으시면 눈이 부시다는 리나의 너스레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다시 한번 루시페우스를 떠올렸다.
‘혹시 에리나 경의 생모가 빨간 눈의 마을 출신인 걸까? 그 유전이 몇 대 걸러서 나타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에리나 경이 성기사인 걸 보면 그 모친도 꽤 신성력이 많은 사람이었을 텐데….’
에리나 경의 혈통에 대해서는 케인이 몇 년째 수소문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알비누스 후작가 내부가 폐쇄적인 데다가 그녀가 후작가에 머무른 기간도 굉장히 짧은 게 문제였다.
‘그 내력도 루시페우스가 후작에게 충성하는 이유랑 연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꼭 필요한 정보라는 느낌이 드는데, 몇 년째 진척이 없으니 퍽 답답했다.
‘루시페우스는 알고 있을까, 저 같은 이들이 또 있다는 걸?’
그렇다면 아멜리의 그 밝은 에너지를 꺾으려는 그 맹목적인 집착이 좀 덜어질 수도 있을 텐데.
아멜리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맞다.
“일단 빨간 눈의 마을에 다시 갈 일은 없는 거지?”
“전하께서 어떤 특명을 내리시지 않는 한 말이죠.”
“그래, 우선 학자의 탑에 제보하고, 혹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와 빨간 눈이 연관이 있을지 문헌 연구가 우선일 듯해.”
윽, 리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네에, 뭐….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마계의 것이고, 빨간 눈이 마족의 후예란 설이 있으니 찾아보면 연결고리야 있겠지만요.”
저를 시킬까 봐 꺼림칙해하는 목소리…. 그녀는 유능한 부관이었지만, 서류 업무나 활자와는 참 거리가 멀었다.
“걱정 마, 3소대 시킬 거니까.”
“아, 역시. 알렉스가 최고죠.”
리나의 낯이 퍽 안도한 기색이 되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인위적으로 열리는 걸 경계하는 게 올해 암조의 목표니, 관련된 정보는 하나라도 더 있는 게 좋았다.
‘학자의 탑에서도 꽤 귀중한 자료들을 열람하게 해달라 부탁해야 할 텐데. 렌틸 자작한테 부탁하기엔 아직 시작 단계고…. 막심 블라우베르를 정말 등용해볼까.’
정말 내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다 할 것처럼 말하던 그의 구직 편지….
혹시나 싶어, 블라우베르 가문의 후계 구도나 귀족파 내에서의 입지 같은 것에 알아보고 있는 차였다. 귀족파가 나와 게이블스의 일로 삐딱선을 탄 지 벌써 몇 년인데, 계속해서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게 이상했으니까.
“경은 대신, 당분간 다른 임무를 맡아줘.”
“전하께서 저를 위해 어떤 즐거운 일을 안배하셨을지…?”
“한 영애의 비밀 호위야. 레오폴트와 곧 연인이 될 사람이고, 알비누스의 둘째 아들과 모종의 연이 있어.”
“엑, 전하께서 연적에 관대하지 못하신 줄은 처음 알았네요.”
“연적?”
리나의 괴이한 단어 선택에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비누스의 둘째가 전하께 호감을 갖고 접근한다는 이야기가 암조에 파다하던데요? 저번에 마차 데이트도 하셨다 하고?”
그 말에, 나는 루시페우스에게 잡혔던 손끝이 화륵 타오르는 것 같았다.
“뭐, 뭐야, 경. 황성 오자마자 바로 입궁했다며? 언제 암조 기사들은 만난 거야?”
“뭐, 오는 길에 만났는데…. 왜 얼굴이 빨개지십니까?”
“경들이 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황당해서 그러지!”
나는 당황해서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뱉었다.
얘네 요즘 진짜 왜 이래?
“메리, 우리 예전에 빨간 눈 아이 봤던 것 기억나?”
리나의 보고를 받고서 며칠 뒤, 일과를 마치고 메리제인과 단둘이 침소에 남았을 때였다.
내 물음에 내 머리칼을 빗질하던 메리제인의 손길이 조금 느릿해졌다.
“그걸 어찌 잊어요? 그때 전하께서 그 애에게 홀리신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놀랐었는데요.”
“내가 홀려? 왜?”
“아무래도 소문이 그렇잖아요. 이치에 안 맞는 이야기란 걸 알아도, 전하께서 그때 하도….”
빨간 눈이 마족의 후예라는 미신에 대해 말하는 거였다.
데자뷔를 겪은 내가 무엇엔가 홀린 듯이 루시페우스가 있는 곳을 찾았으니 오해했을 만도 했다.
메리제인은 내가 굳이 어린 그를 토닥였던 거나 그 팔을 잡으려 했던 것을, 굉장히 섬뜩한 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애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 아이가 번듯하게 자라다 못해 사교계에서 영애들의 선망을 받기 시작했으며, 귀족파의 해결사로 거듭난 것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그리 말했다.
빗질하는 손길이 다시 느려졌던 메리제인은, 이윽고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내뱉었다.
“어디 가서 맞아 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이겠죠…. 금기시된 존재니 밥값도 제대로 못 할 테고요.”
진짜 마계의 것인 돌아올 수 없는 바다만 해도 얼마나 터부시해요, 메리제인이 웅얼거리듯 덧붙였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는 그 존재 자체로 황실의 약점이었다.
강력한 신성력으로 마계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입구를 온전히 닫지는 못한 황실의 한계.
마족의 후예라며 빨간 눈을 배척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계에 대한 사람들의 생리적인 거부감 때문일 거였다.
‘그 빨간 눈을 타고난 사람이 실제로 세계를 위협하려 하고 있지만, 그게 그가 마족과 관련 있어서는 아닌데.’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성기사고….
메리제인이 나간 뒤, 심란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아 암조들의 보고서를 뒤적이는 와중에도 자꾸만 신경은 루시페우스 쪽으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