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4)
‘저렇게 잘 웃는데, 뭐가 웃지 않는 신사님이야?’
그 서술도 틀린 거였나?
생각해보면 원작에서 그에 대한 설정뿐 아니라 묘사 또한 얼기설기한 감이 없잖아 있었더랬다.
루시페우스는 아멜리가 아닌 그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았고, 또 춤출 때를 제외하곤 아멜리에게 그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연회 때마다 그를 흘끗대면서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영애가 많았다.
‘다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지. 알비누스의 둘째, 알비누스의 그 신사, 그렇게들 부르니까.’
그런 그의 심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된 것이 없었다. 나타난 상황과 대사로 짐작해야 할 뿐.
‘하지만 그때 내 손을 잡으려던 걸 보면, 뭔가 안 맞는데.’
나는 그의 심사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순전한 호기심을 가장해 질문을 던졌다.
“경은 춤도 안 추고, 파티를 즐기지는 것 같지도 않은데. 꼬박꼬박 참석하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나 봐?”
“전하께서 제게 궁금한 게 많으시군요.”
역시 불편한 질문인가? 내 미간에 살포시 실금이 갈 때였다.
“저도 그러한데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언젠가 그가 준 손거울에 떠올랐던 글자들을 떠올렸다.
‘다음에는 더 오랜 시간이 허락되길 바란댔지. 내게 뭔가 궁금해서 그렇다는 건가…?’
맞은편의 합승자에게 내 당황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6월 자선 파티는 워낙에 유명하니까. 그런 쪽으로 말이야.”
“그러시는 전하께서도 아무와도 춤을 추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나야 몸이 안 좋아서 쉬었던 거고. 원래 아버지나 테오 오라버니 아니면 추지도 않고. 어차피 얼굴 비추러 온 거였으니까.”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일부러 자유로이 해주신 건 아니고요?”
얘 레오폴트 견제하는 것 좀 봐.
나는 오늘 파티 내내 그가 아멜리에게 관심 없는 척 시치미 떼던 걸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미안하게 됐어.”
“…그러시겠군요. 제 연적에게 기회를 주신 셈이니.”
‘연적’이라고 말하는 그의 어조가 기묘하게 울렸다.
기본적으로 그의 말투에는 두드러지는 억양이 없는 편이었다. 목소리가 워낙에 낮아 그 고저를 판별할 수 없어서인 듯했다.
그가 목소리에 어떤 열의도, 감정도 싣지 않는 것 같기도 했으나….
‘윌로우 놈에게는 퍽 무섭게 말했었지.’
거기까지 미친 생각의 꼬리에는 글렌치아 공작저의 테라스 정경이 나타났다.
“…일전에는 고마웠어, 경.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고 말도 못 했네.”
윌로우 놈을 자유자재로 갖고 놀던 때 그의 목을 울리던 감정은, 굳이 분류하자면 분노에 가까운 듯했다.
‘무엇에 대한 분노였을까. 무뢰한에 대한 정의감에서 우러난 분노?’
그러고 보면 예전에 아카데미에서도….
“순서를 뺏기고 말았네요.”
그건 조금 억울한 듯한 목소리였지.
루시페우스가 내게 다가오려고 했던 것이, 퍽 오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려는 순간….
“번번이 빚을 지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려야만 했다.
내가 앞으로 방해하게 될 이에게 어떤 감정을 싣는 건 안 될 일이니까.
기민한 눈초리로 내 낯을 훑던 루시페우스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은사를 지신 분께서 빚을 지실 수도 있는 건지요.”
제가 손거울 갖고 다니라면서 빚 운운해놓고?
하지만 나는 그리 대꾸하는 대신 온순하게 답만 입에 올렸다.
“은사를 졌어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깊은 고마움이라고 해둘까, 그럼?”
“갚으실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창가로 어스름히 들어오는 달빛에 빛났다.
다시금, 내가 본 적 있는 그 붉음으로 빛나는 듯했다.
그 눈빛에 어떤 진한 감정이 일렁이는 것인지, 일견 날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손거울, 놓고 왔는데….’
그가 당부한 걸 무시했다는 사실이 들킬까 무서워,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나는 그가 내게 제 비밀을 알려준 이유를 알고 싶으면서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게 원하는 바가 있는 걸 알면서도, 역시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내게 친근하게 구는 것이 더 수상할 정도로 그는 위험한 인물이었으니까.
나는 다시금 말을 돌리는 편을 택했다.
“알비누스는 게이블스와 긴밀한 줄 알았는데, 마찰이 생겨서 곤란해진 거 아냐?”
“제 아버지…께서는 가주로서 오랜 연을 지키시는 것뿐입니다.”
“그 연이 경에게도 유효할 텐데.”
“글쎄요, 저는 워낙에 말 안 듣는 사고뭉치 막내여서 말이죠.”
다시금 그의 입매가 어렴풋이, 비대칭적인 호선을 그렸다.
그가 내뱉은 말과 그의 처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사교계 지형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는 굳이 말하자면 알비누스의 궂은일을 도맡는 가신에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어떤 이들은 그저 후작의 보좌관이나 호위 정도로 보기도 한다고 했지.’
알비누스 후작이 사교계의 모임에 참석할 때면, 누구와도 통성명하지 않은 채 그저 곁을 지키고 있는 그림자.
사교계에 갑작스레 나타난 알비누스의 둘째 아들에 대한 평은 다양했지만,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알비누스 후작의 양아들이자 이복누이가 혼인하지 않은 채로 낳고 죽은 조카. 그에게 알비누스의 둘째 아들이라는 지위는 그저 호적에 적힌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가족관계에 대해 생각하자니 자연스레 루시페우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알비누스 후작의 친아들이 부마가 되겠다며 으스대던 것, 그가 수확제의 연회에서 루시페우스에게 폭언하던 것….
“너는 반쪽도 아니고 반의반 쪽 아니니?”
루시페우스가 처음으로 황실 연회에 참석한 날,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안경 쓴 어린 소년의 모습.
‘혹시 루시페우스가 그때부터 나를 기억하는 걸까?’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내게 다가오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단순히 입단속을 시킨다거나, 나를 윌로우로부터 구해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예전부터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어서…?
‘어쩌면 또 혹시, 어렸을 때 저잣거리에서 마주친 게 나란 걸 알아서….’
지금 내 변장 보닛을 간파하는 걸 보면, 그때 내 본모습을 알아봤을 수도….
‘아, 아냐. 자꾸 확대 해석하지 말자. 게다가 그건 마법을 제대로 익히기 전이잖아. 너무 나갔어.’
나는 젖어드는 상념을 떨쳐내며, 다시금 루시페우스의 낯에 집중했다.
달빛에 파르라니 빛나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저렇듯 냉정한 인상의 그에게서, 이따금 친근한 기색을 발견할 때면 자꾸만… 내 친구의 사랑을 위해 저지해야 할 이 세계의 악역이 아니라, 더 깊은 인연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또, 그러면 안 되는데도.
“경, 혹시.”
“제게 답을 주시는 것도 없이 또 하문이시군요.”
그의 낯에 어딘가 즐거운 기색이 감돈다고 느껴졌을까.
그에 대해 드는 마음이 공포심만은 아니란 생각에 나는 번번이 당황했다.
‘어려서부터 그를 지켜봐 와서 그런 거겠지…?’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어째서인지 목격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는 나와 반목할 인물.
이번 삶의 목표로 삼은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내 가족과 제국을 위해서도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래. 그래서 자꾸만 그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걸 거야.
‘괜한 감상 금지!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알아보고, 그 김에 그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알아내는 데 집중해야 해.’
내가 그에게 친근함을 느끼고 또 그가 내게 호의 비스름한 걸 베푼다 해도 거기까지일 뿐이다.
나는 그를 마차에 들이며 다짐한 바를 되새기며 넌지시 물었다.
“경도 유학했다고들 하던데. 혹 동대륙이었어?”
“경도…라면, 또 다른 누가.”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거기서 아까 유리잔을 깬 채 굳어 있던 그의 낯이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경의 형이 유학 중이라 들었어.”
“아, 예…. 제 형님께서 지금. 그러하시죠.”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냥, 다른 대륙은 어떤가 궁금해서 말이야. 동대륙이 현자의 대륙으로 유명하잖아? 은사를 진 덕에 가볼 수 없어서 상상만 해왔는데.”
위아래로 긴 동대륙의 남쪽에는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고, 북쪽으로는 수천 년간 조성된 침엽수림 너머로 영구 동토가 펼쳐져 있다고 했다.
아수라마수라만이 자리해 있는 본대륙과 달리, 기후 조건이 다양한 만큼 거기에 맞추어 수많은 왕국과 부족국가와 자유도시가 발달해 있다고도 했다.
그만큼 학문도 다양하게 꽃폈고, 문명도 문화도 제각각이었다.
현자의 대륙이라는 이명을 얻을 만큼.
그래서 마탑에서 수학하지 못한 루시페우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만큼.
루시페우스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본대륙과 달리 거기엔 빈 영토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문명이 닿지 않은 곳도요. 덕분에 별빛 아래서, 인적이 오래간 끊겼던 동굴에서 인간의 하잘것없음을 깨닫고 많은 것을 상상하며….”
그의 말에서 나는 동대륙의 초원에서 잠들어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언가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그 눈빛.
하지만 지금 루시페우스의 눈동자는 내게 붙박여 있었다.
“여러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죠. 그런 걸 동대륙의 현자들은 탐구며 공부라고들 하더군요.”
그의 말소리는 마치 외워둔 답을 읊듯 막힘없이 흘렀다.
내게 붙박인 그의 눈빛은 어떤 추억을 더듬는다기보다, 그걸 물은 내 의중을 가늠하려는 듯 선명해졌다.
그러니까, 그의 답은 진실과 무관했다. 내게 원하는 것과는 더더군다나.
‘동대륙에서 뭘 했는지 실마리라도 얻을까 싶었는데….’
왜 그가 알비누스 후작을 따르기 시작한 건지, 그래서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에 대해 어떤 걸, 왜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선 자신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완고한 기색이 풍겼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만 마차 안을 나지막하게 울릴 무렵.
“역시 전하께선 제게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봅니다.”
그리 말한 루시페우스는 차창에 기대었던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낮춰진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 얼굴에는 조소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다.
놀림당했다는 느낌이 들어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니, 스몰토크 몰라? 이런 건 사교용 멘트지.’
그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무릎 위에 깍지 껴 두었던 손을 풀어 내게로 내밀었다.
“제가 답해드린 것이 더 많으니, 제 질문 대신 다른 걸 여쭈어도 괜찮을지요.”
그 언젠가와 마찬가지로.
그때와 다른 것이라곤 내게 내민 그의 길쭉한 손에 장갑이 껴 있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손의 툭 불거진 마디마다 달빛이 흘렀다.
“제가 감히, 전하께 닿을 수 있을지.”
나는 내 양손을 무릎 위에 모아둔 채, 내게로 뻗어진 그의 손을 눈만 내리깔아 노려보았다.
‘또…. 도대체 무슨 의도야? 무슨 연쇄 손잡기범이세요?’
아멜리한테는 닿지도 않더니, 도대체 무슨 설정인 건지. ‘공제눈’ 작가는 반성하라.
은은하게 불만을 드러낸 내 얼굴을 살피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초조?’
그러고 보면 글렌치아의 테라스에서 내가 홀린 듯 손을 내주었던 것 또한 그 절박함에 동조한 거였는지도….
그가 왜?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그런 생각에 휩싸여, 내 침묵이 길어졌을 때였다.
“그러면 이런 건 어떻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마차 너머를 투시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했다.
“동행한 호위가 다섯, 그런데 기척이 넷 더…. 전하께선 늘 과할 정도로 많은 호위를 데리고 다니시더군요.”
그새 내 호위 병력을 다 파악한 거야?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