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3)
자선 파티는 자정을 넘어서도 계속될 예정이었다.
파티가 열린 곳이 알제니아 후작가의 별장이다 보니, 원한다면 묵고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손님이 제 마부들을 내일 오라며 돌려보냈다. 그만큼 파티의 분위기는 조금 끈적해지기도 했다.
‘황녀 전하는 그 전에 빠져 드려야지.’
그리고 나는 일찍이 귀가하는 편을 택했고.
세실리아의 몸으로는 이미 먼 길을 온 데다 돌아갈 길도 똑같이 머니, 빨리 돌아가서 신성력 결계 안에서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스칼렛 체면도 세워줬고, 레오폴트랑 아멜리도 분위기 좋고. 루시페우스도 별 수작 부릴 기미 없고. 이만하면 빠져도 되겠지.’
나는 저마다 파티를 즐기고 있는 내 기사들을 찾을 겸, 밤이 깊은 정원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밤의 가든파티는 퍽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그 구색이 모두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스칼렛이 단속이야 시켰다지만 귀족파 영애들은 여전히 아멜리를 질시했고, 레오폴트에게는 몇몇 귀족파 영식들이 시비를 걸었다.
“그리 고고하게 구시더니, 짝을 찾으셨나 봐? 한데 그 짝의 처지가…. 선민의식인지 연민인지.”
얼마 전 내게 손거울을 건네줬던 겔프 자작 영식, 율리안 겔프였다.
그땐 나름 신사적으로 자라났다 싶었는데, 잘도 빈정대는걸…?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 같은 학년이어서인지 다소 친근해 보였던 그들은, 정파적인 문제로 사이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자네도 종소리가 울리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다 알겠지만 말이야.”
아하하하, 그러면서 쾌남 미소를 지어 보이는 레오폴트는… 오늘도 좋은 말씀 전하러 오신 분 같았다.
‘아, 그게 아닌가…?’
내심 걱정했던 나 자신이 민망할 정도여서,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레오에게 시비도 걸고, 슬슬 귀족파가 움직이기 시작하나 보네.’
그리고 한편으로 저 멀리서 루시페우스가 율리안 겔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귀족파 자제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는, 마치 율리안 겔프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는지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전하, 슬슬 돌아가시게요?”
그때 케인이 나타났다.
돌아가는 길에 레오폴트와 교대하여 내 호위를 맡을 예정이어서, 파티의 방만한 분위기와 달리 털끝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슬쩍 시선을 비끼니, 그의 연인인 말로테 자작 영애가 아쉬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인이 공과 사를 확실히 해서 다행이지, 나한테는.’
어쩔 수 없지. 아멜리를 괴롭히는 악역에게 배려해줄 여유 따윈 없다.
나는 그녀에게 주의한 적 없었던 양 자연스레 시선을 물렸다.
“응, 어차피 헨리에테가 늦게까지 있을 테니까 나는 빠지려고. 지금 돌아가야 자정 되기 전에 황성에 닿지.”
그리 말하며 나는 헨리에테에게 눈짓했다.
참석부터 나와 따로 한 그녀는 저 너머에서 황실파의 몇몇 영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의 군더더기 없는 차림새나 사무적인 표정과 달리, 전략실 예산으로 화려하게 꾸민 그녀는 누가 봐도 사교계 인기 재담가였다.
“아우렌바흐 소공작님께 인사 안 하시고요?”
“쟤가 지금 내 말이 들리겠어?”
“뭐, 그래 보이긴 하네요.”
케인이 수긍하는 말에 나는 낮게 웃었다.
레오폴트는 다소 구석진 곳에서 아멜리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멜리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것이 파티에서 소외돼서가 아니라, 단순히 쉬기 위해서 거기 가 있는 것 같았다.
‘루시페우스는 더 이상 아멜리 근처에 안 가네?’
아까 질투에 불타 잔을 깬 일만 빼면, 줄곧 태연히 귀족파의 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였다.
‘하긴, 원래도 더 일어날 사건이 없기는 하니까.’
원작에서는 아멜리가 루시페우스와 첫 춤을 추는 걸 본 레오폴트가 질투하는 바람에 어색한 삼각관계를 이루는 것이 6월 자선 파티 장면의 끝이긴 했다.
레오폴트가 계속 붙어 있어서 타이밍을 못 잡았을 수도 있고. 여하튼 잘된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음험한 미소를 짓고는 케인에게 새침하게 말했다.
“지금 가기 곤란한 거 아니지? 애인이랑 같이 밤 보내고 가기로 하고 그런 거, 아니지?”
“허, 참, 전하께서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황당하다는 듯 대꾸하는 케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마치 얼마 전 온실에서 스칼렛이 남사스럽다는 듯이 말하던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연애에 관심 없는 듯이 구는 막내 황녀 이미지가 도대체 어떤 건지, 참.
“별일 없으면 됐어. 슬슬 가자.”
그리 말하며 나는 손을 내밀어, 케인의 에스코트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벌써 가시게요?”
내가 자리를 떠나려는 기색에 릴리안 알제니아를 비롯한 다과회의 영애들이 다시금 몰려들었다.
“응, 다들 잊지 못할 추억 쌓으려면 신경 쓸 거리가 하나라도 주는 게 좋잖아요?”
“아이, 전하도 참.”
“하루 묵고 가시면 영광이겠지만, 누추한 곳에 붙잡아 두기도 죄송하고요.”
“부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녀들은 아쉽다는 듯한 말소리를 꾸미며 왁자하게 나를 전송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쪽에는 신경 쓰지 못한 채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귀족파 신사들이 몰려 있는 쪽에서 시선 하나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슬슬 아멜리가 도움받으려고 힐베르크 후작도 찾아가겠고….’
밤중의 오솔길을 달리는 마차 안.
자선 파티의 풍경을 곱씹던 나는, 자연스레 귀족파의 음모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귀족파가 슬슬 규합하는 것 같으니, 곧 본격적으로 협잡질을 시작하겠지.’
귀족파의 모략에 황실파와의 세력 다툼 한 스푼 첨가되어 꽤나 저열한 수작들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베라초 유통에, 사냥 대회 일까지….’
그렇게 앞으로의 일들을 가늠하던 때였다.
히히히힝!
“워어, 워! 이 녀석들!”
갑작스레 말들이 날뛰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크게 휘청였다.
“무슨 일이야?”
차창을 열어 말을 타고 따라오던 케인에게 묻자, 그가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그…분입니다.”
“그분?”
“알비누스의 둘째 말입니다.”
“뭐라고?”
루시페우스가? 분명히 아까 내가 떠날 때까지 거기에 있지 않았나…?
나와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은 케인은,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앞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괜찮으십니까?”
케인이 앞쪽을 향해 내는 말소리에, 나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케인에게 눈빛을 쏘았다.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데 내가 직접 창밖으로 몸을 빼 살필 수 없는 까닭이었다.
“저, 마차가 사고를 당한 모양입니다.”
케인이 제 앞쪽을 흘끗거리며 재빨리 속삭였다.
마법을 쓰는 게 공식적으로는 비밀이어서 마차를 타고 온 모양인데….
저벅, 저벅, 적막해진 마차의 외부에서 나직한 발소리가 났다.
“저기요?”
루시페우스에게 고정된 듯 멀리 두었던 케인의 시선이 점차 이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그가 대꾸도 없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만이 스산하게 울리던 그때.
“저는 알비누스의 루시페우스라 하는데…. 보시다시피 마차가 사고를 당해서 말입니다. 전하께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을지요.”
밤공기만큼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겉으로는 케인에게 말하는 거였지만, 내가 들을 걸 다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케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케인이 곧바로 뒤를 따르던 1소대의 기사들과 눈빛을 주고받는 기척이 났다.
‘괜찮을까.’
어차피 마차야 눈속임, 마법을 써서 순간 이동을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나인 걸 알고 저러는 건데, 거절할 명분도 없고.’
무시했다가 괜한 업화를 입을까 무섭기도….
이 마차에는 신성력으로 결계도 쳐져 있고, 잠금장치도 마도구로 된 거였지만…. 그에게 이 정도는 큰 의미가 없을 거였다.
생리적인 위협감이 이런 걸까.
내 심장이 전에 없이 빠르게 뛰었다.
‘왜 자꾸 내게 접근하는 거지? 이 김에 이야기라도 좀 해보면 감이 잡히려나….’
곰곰 생각하던 나는 떨리는 마음을 꾹 누르고서, 그쪽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었다.
차창에 내 얼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듯, 이편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페우스의 얼굴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는 양.
‘마법 보닛도, 프리지어궁 다중 결계도 어떻게든 뚫었으니까….’
이쯤은 그에게 별것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한 듯 부러 발랄하게 말했다.
“좋은 밤이야, 경. 이런 데서 또 마주치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마차가 전하께서 타신 마차여서, 정말 좋은 우연입니다.”
우연이라니, 거짓말.
그는 내 입꼬리가 가늘게 굳는 것쯤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황성까지만 부디 전하의 마차에 동승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재차 묻는 그의 말소리에는 물음표가 빠져 있었다.
내가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음을 확신하듯이.
‘케인이랑 1소대가 있고, 그림자 기사들도 따르고 있으니까, 너무 겁먹지 말자.’
물론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병력쯤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큰마음을 먹고서 마차 문을 열었다. 그건 내 앞의 저 강한 이에 대한 체념적인 순응에 가까웠다.
아, 황녀 체면….
내가 불허하리란 가정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차 안으로 몸을 들였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바퀴가 빠져 있던 그의 마차가 대번에 사라져 버렸다.
‘마법 쓸 줄 아는 거, 나한텐 숨길 생각도 없다 이거지? 저도 마법으로 돌아가지, 불편하게 왜….’
그 태연한 행동에 나는 조금 기가 질린 낯을 하였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의 입꼬리가 어째선가 미세하게 들려 있는 듯했다.
이랴, 마부가 다시 말을 모는 소리가 울렸다.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루시페우스가 입을 열었다.
“아우렌바흐 소공작과 함께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실제로 그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닐 거였다.
‘왜 혼자 가는지 궁금해서겠지.’
나는 속으로 통쾌한 웃음을 삼키며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로즈버리 영애를 바래다주라고 했어.”
“그렇게 된 일이군요.”
“경계심은 경도 많은 것 같은데.”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그의 입꼬리가 다시금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턱을 괸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무슨 궁리라도 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늘 끼워져 있던 그의 장갑이 벗겨진 채였다.
꽁꽁 싸매여 있던 그 기다란 손가락이 달빛에 보기 좋게 빛난다…. 그리 생각했을 찰나.
‘아무리 그래도 황실 마차에 감히 동승한 건데, 조금도 황송해하는 기색이 없네.’
차창 쪽으로 기대앉아 턱을 괴고서, 내 드레스 자락을 피해 대각선으로 꼬아서 뻗어둔 두 다리.
그것이 너무나도 태연했다.
이 마차에 타인을 이토록 쉬이 들일 일은 아니었다.
‘내가 제 빨간 눈에 대해 아는 건 아카데미에서 구해준 걸로 입막음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럼 뭘 또 원해서 빚을 운운했으려나.’
어쨌든, 암조에서 가장 경계 중인 인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둘 수 있는 기회.
나는 관찰하듯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차창을 통해 비낀 달빛에 빛나자… 그의 눈동자가 빨갛게 빛나던 언젠가의 상이, 겹쳐졌다.
그 눈동자가 눈물에 담뿍 빠져 있던 날의 풍경.
그 수년 전의 기억에 홀린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궁금한 것을 순순히 입에 올렸다.
“경이라면 마차를 탈 이유가 없었을 텐데.”
그가 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비밀로 하려는 생각도 없는 듯하고.
“밤이 늦었는데, 지쳐서 말입니다.”
루시페우스의 입꼬리가 다시금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진짜로 웃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