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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58화 (58/220)

58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2)

“아, 그렇군요. 제가 로즈버리 영애를 연모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짧게 웃어 보인 루시페우스의 얼굴에서, 나는 얼마간 눈을 떼지 못했다.

‘…웃기도 하는구나.’

지금껏 봐온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랄 것이 비친 건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그 웃음이라는 것이 코웃음 정도긴 했지만.

‘원작의 루시페우스는 아멜리에게 ‘웃지 않는 신사님’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왜 미소 한번 짓지 않으면서 그리도 손안에 넣고 싶어 안달이었을까?

‘비뚤어진 흑막의 심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가닿은 쪽을 따라 보았다.

그 끝에는, 은은한 달빛과 인공조명 아래 황홀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는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있었다.

역시. 역시는 역시.

나는 나만이 이 사랑의 화살표를 알아본다는 사실에 기꺼워졌다.

그 흡족한 마음을 담아, 나는 발랄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다음 춤이라도 가서 청하지 그래?”

레오폴트가 곁을 비워준다면 말이지.

내 말을 들은 그가 다시금 내 편을 돌아보았다.

내 진의를 고민하는지, 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서 얼마간 내 얼굴만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가 레오폴트 친구인데 왜 저를 밀어주느냐는 건가…?

그때, 그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 같은 것이 떠오른 것 같았다. 일전에 쌍안경 너머로 보았던 잔상이 꼭 이런… 에이, 설마.

“소공작께서 경계심이 많으신 듯하여서 말이죠.”

“…경이 그렇게 포기가 빠른 줄은 몰랐네.”

나는 내가 레오폴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도착했을 때, 그가 레오폴트와 험악한 눈빛을 주고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분명 그렇게 으르렁댔으면서, 패기 없게 말이야.

물론 나로서야 그런 패기는 없는 편이 좋지만 말이다.

“제가 포기가 빠르다고요?”

그가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 나야 그 집착 속성을 아니까 그렇지 않단 걸 알기야 하지만….

늘 어떤 기색을 띠지 않는 그 도자기 같은 얼굴이 조금 온화한 것도 같다면, 내 착각일 거였다.

“아닐걸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 어딘가에는 낯선 기색이 어려 있었다.

“전하, 황궁 밖에서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난번 글렌치아 연회에서도 뵙기야 했지만, 이런 편한 분위기에서 전하를 뵈니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요.”

“응, 고마워요, 모두. 6월 자선 파티가 유명한 줄은 들어서 알았는데, 정말 아름답고 좋네.”

내 적당한 칭찬에, 다과회 고정 멤버인 귀족파 영애들의 낯이 밝아졌다.

무도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이 참가하는 세 번의 춤곡이 끝나자, 많은 이들이 내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중 가장 발이 빨랐던 것이 바로 이 아가씨들.

그녀들은 내가 오늘의 파티에 참석한 데 꽤나 흥분해 있었다.

지금껏 외부 연회에 참석하지 않던 내가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이 귀족파의 연회라는 게 꽤나 의미심장한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글렌치아야, 내 오빠인 테오도르의 가문이었으니까.

‘다음에 아멜리랑 루시페우스랑 맞붙는 장면이 어디 연회더라….’

잠시간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영애들이 자리를 비켜서며 길을 틔웠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뵈옵니다. 며칠 전에 뵙고 여기서 또 뵈니 좋네요, 전하.”

듣기 좋게끔 잘 다듬어진 청아한 목소리….

오늘도 한껏 화려하게 차려입은 스칼렛이었다.

며칠 전에 만났던 거 강조한다 이거지?

오늘 스칼렛 기 살려주러 온 만큼, 나는 그 속셈에 기꺼이 동조해 주기로 했다.

“응, 반가워, 영애. 영애가 초대해준 덕분에 알제니아의 장원에 다 와보네.”

“제 추천이 전하의 마음에 쏙 들었다니 영광입니다.”

감읍했다는 듯 가슴에 한 손을 올린 채 우아하게 인사해 보이는 스칼렛.

그녀의 낯에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가식적인 미소.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스칼렛의 표정에 한결 친근함을 느꼈다.

“어때요, 후원이 많이 들어오나요?”

“전하께서 왕림해주신 덕에 다들 씀씀이가 커진 모양이에요. 그렇죠, 레이디 릴리안?”

오늘의 호스트나 다름없는 알제니아 후작 영애 릴리안 대신 스칼렛이 답하는 것이 퍽 자연스러웠다. 역시 귀족파 영애들의 리더다운 카리스마.

릴리안이 스칼렛에 대한 경외심을 숨기지 않으며 답했다.

“맞아요. 예년보다 모금함이 묵직해서 오늘 밤 호위 기사들에게 특별 수당을 두둑하게 줘야겠다 싶어요.”

“잘된 일이네요. 별 탈 없이 치러지고 있다니….”

내가 그리 말하며 그녀들 너머에 시선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제 직장 동료인 성기사단의 기사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나를 둘러싼 귀족파 영애들을 살폈다.

내 시선을 따라 그 광경을 목격한 그녀들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역시….’

그녀들은 툭 치면 아멜리에 대한 불평을 와르르 내뱉을 기세였다.

마침 아멜리가 수줍게 인사를 올리고, 레오폴트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본다는 듯이….

“아니, 정말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요.”

한 영애가 입을 열었다. 아멜리를 같은 귀족이라 하기 창피하다고 늘상 말하는 롬멜 백작가의 그레타였다.

맞아요, 그러게요.

그 한마디가 파문이 되어, 나를 둘러싼 영애들이 한마디씩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었구나.’

나는 엷게 웃으며 스칼렛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와는 무관한 일인 양 무표정으로 낯을 굳혀두었던 스칼렛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알았다고요.

그녀가 작게 고개를 내젓는 걸 보며 나는 쿡쿡 웃었다.

이윽고 스칼렛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은근한 눈빛을 했다.

“그래서, 박힌 돌이…. 빠졌나요, 레이디 그레타?”

어느 소란에서건 귀에 쏙 박힐 만큼 낭랑한 스칼렛의 목소리.

그레타 롬멜이 입을 홉 다물자 주변은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지금껏 스칼렛이 말 한마디 안 거들었댔으니까, 첫 반응인 셈이지.’

나는 흥미로운 눈길로 스칼렛이 제 추종자들을 휘어잡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황성 사교계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가진 것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이고, 그중에는 여러분의 우정도 있으니까.”

그리 말하며 스칼렛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남대륙 어디엔가 열 마리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새의 깃털을 모아 만들었다는, 그러니까 게이블스의 재력을 뽐내는 소품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멜리를 험담하던 영애들은 말을 잊은 듯 스칼렛의 눈웃음만 쳐다보았다.

“제가 연모하시는 이께서는 저리도 편견이 없으시니, 그 따뜻한 마음이 한 가문의 가주가 되시기에 아쉬움이 없지 않겠어요? 어차피 혼약이….”

거기까지 말한 스칼렛은 슬며시 내 편을 쳐다보았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내색하지 않고서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어디 연심 하나만으로 되는 거던가요. 젊은 날 치기로 추억 한번… 경험 한번 쌓으시는 것도.”

그리 말하는 스칼렛의 미소가 고혹적으로 빛났다.

윌로우 같은 놈이 입에 담았으면 저질 농담이었을 것도, 스칼렛이 말하니 관대한 위트였다.

그녀가 찡긋, 윙크하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보던 영애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머. 맙소사. 레이디 스칼렛.

스칼렛의 말에는 구체적인 이름 하나 언급돼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추종자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알아들었을 거였다.

어차피 결혼도 안 한 사이, 괜히 입 놀려서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조용히 있자, 응?

‘이게 사교계 보스의 카리스마네.’

나는 퍽 흡족해져, 손에 쥔 탄산수를 홀짝였다. 루시페우스가… 쥐여주고 간 거였다.

“제가 포기가 빠르다고요? 아닐걸요.”

갑작스레 들러붙는, 아까의 기억. 그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이채는 무슨 의미였을까.

‘혹시 이상한 수작 부리는 건 아니겠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전하! 여기서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나를 둘러싼 영애들 너머로 한 신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저 대책 없이 감격한 듯한 목소리는 분명.

“저를 기억하시겠는지요. 블라우베르 소백작의 아들, 막심입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암녹색 머리칼 아래로 군청색 눈동자가 감격으로 빛나고 있었다.

얘 또 왔네.

지난번 글렌치아 연회에서는 내가 테라스에서의 일을 겪고 바로 귀가하는 바람에 마주할 일이 없었는데.

“올해엔 제가 아리타우노스 별의 축복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리도 존안을 자주 뵐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리타우노스는 학자의 탑에서 숭앙하는 고대의 현자다. 그러니까 나를 보필할 수 있다면 학자의 탑에 들어가는 것도 불사하겠다던, 지난번 편지에 쓴 바를 언급하고 있는 거였다.

“저학년 땐 귀족파 문제아들 패거리에게 끌려다니느라 학업에 소홀했는데, 5학년 때부터 정신을 차렸는지 갑자기 열심히 공부하지 뭐예요. 저학년 때 공부 제대로 못 한 것 만회한다고 졸업도 유예했었죠.”

그와 동급생이었던 헨리에테의 증언.

그날 얼결에 한마디 끼어들었던 것이 이렇게 한 인재의 마음을 움직이다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방긋 웃어 보였다.

“응, 경. 오랜만이야. 지난번에 보낸 구직 편지 잘 받았어.”

나는 ‘구직 편지’라는 대목에 강세를 주어 말했다.

왜냐하면….

“어머, 저 영식이 또.”

“정말 저돌적이군요.”

“아무리 전하께서 서출 인재를 중용하신다지만….”

“그렇죠, 저 정도면 아무래도 사심이.”

꼭 이런 말소리들이 달라붙는 게 문제였으니까.

그의 눈빛은 내가 보기에 한때 케인이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말이다.

‘나름으로 미남이라서 그런 걸까?’

레오폴트처럼 남주가 될 상까지는 아니어도, 막심 블라우베르는 다정하고 푸근하며 이지적인 인상의 미남이었다.

‘아카데미 졸업하고서 바로 관료로 등용될 수 있었는데, 성인이 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맞춰 진로를 정하려고 서대륙에 유학 다녀왔댔지.’

능력 양호, 충성심 양호, 성실성 양호.

내가 그렇게 막심 블라우베르에 대해 나만의 면접 심사를 볼 때였다.

파삭.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나지막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헉.”

“괜찮소, 경?”

거기에 뒤따르는 사람들 허둥대는 소리.

그편으로 시선을 던지니, 연회의 시종들이 바쁘게 커다란 나무 아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란의 주인공은….

“잔을 깨셨나 봐요.”

“어머, 저분이 그 알비누스의 둘째신데, 손…으로…?”

뭐라고?

재빨리 그편을 보니, 루시페우스의 장갑 낀 손 위에 잔이었던 유리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주르륵, 그의 손가락 사이로 핏빛 와인이 흘러내렸다.

애매하게 굳은 그의 낯은 어째선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와인 잔이 약하기야 하지만, 그걸 손으로 깼어…?

‘마법이라도 쓴 거야, 뭐야?’

그의 파괴적인 면모에 질색하며, 나는 잽싸게 레오폴트와 아멜리 쪽을 바라보았다.

이쪽의 소란이란 남의 일인 양, 새로 나온 로제 와인을 한 잔씩 나눠 들고서 건배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

‘금슬 좋네. 저거 보고 루시페우스가 화난 거구나…?’

나를 중심으로 그와 정반대편에 그들이 있었던 것이다.

원작에서보다 훨씬 일찍 오붓해진 두 사람의 모습에, 루시페우스도 예상 밖의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법도 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손안에 쥔 탄산수 잔에 입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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