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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57화 (57/220)

57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1)

6월의 첫 주말.

황성에서 마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자리한 알제니아의 장원에서 귀족파 영애들의 자선 파티가 열렸다.

귀족파가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고는 있다지만, 어쨌든 그들도 사회적 의무를 실천하는 바람직한 귀족들이었다.

6월 자선 파티는 바로 그 일환이었다.

‘원작에 나온 그들의 패악이란 아멜리를 괴롭히는 정도에서 그치기도 했으니까.’

6월 자선 파티는 황성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미혼 남녀만 참석할 수 있는 캐주얼한 파티였다.

그래서 황성에 머무르는 미혼 귀족은 정파를 막론하고, 사교계 활동의 최종 목적인 구혼을 위해 이 파티에 몰려들었다.

아멜리 또한 여기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 이유가 원작과 달라졌을 뿐.

원작에서 아멜리는 단순히 사교계 인맥을 늘리고 레오폴트와 마주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땐 사기꾼도 놓치고, 빚 독촉하러 다니기도 전이라 귀족들의 그 고고한 입방아에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멜리의 기행 아닌 기행은 이미 사교계 내에서 회자되는 중이었다.

그래서 아멜리는 지인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인 레오폴트의 독려로. 제 소문에 맞서기 위해 파티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레오폴트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낭만적인 파티에 아멜리를 직접 에스코트하려 했다.

“그 용감하고 현명한 영애에 대해 무성한 뜬소문을 잠재우려면, 제가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을 권력이나 가문으로 하는 거냐던 일곱 살의 레오폴트는 어디로 간 걸까?

하지만 귀족파 주관 파티에 레오폴트가 아멜리와 나타나면 정말 스칼렛의 체면을 구겨버리는 셈이었다.

‘레오폴트가 스칼렛의 체면을 챙겨줄 이유는 없지만, 나는 있으니까.’

미혼 남녀들의 짝짓기 파티에 단신으로는 참석하기 어렵겠다, 나도 나름대로 권력을 활용하여 레오폴트를 설득했다.

“레오폴트 경. 경이 나를 보필하는 걸 게을리했단 소식을 아우렌바흐 선대 공작 부인이 들으면, 정말로 기뻐할 거야. 그치?”

윽, 레오폴트의 녹색 눈동자가 일순 멈칫했다.

어머니와 친분이 두터운 아우렌바흐 선대 공작 부인, 그러니까 레오폴트 할머니가 날 얼마나 예뻐한다고.

‘레오가 이번 여름휴가 때 아멜리를 조부모님께 소개하고 싶어 하는 걸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지.’

그의 야망을 원작을 통해 알고 있는 내 겁박은 잘 맞아떨어졌다.

“전하께선 왜 하필이면 올해 갑자기 자선 파티를 간다고 그러세요….”

“레오폴트 경, 조금 말이 무엄한데?”

“케인 경 말고도 호위 기사 대여섯은 데려가실 거면서.”

“경이 내 호위 소대의 사정에 대해 걱정하는 충정은 잘 알겠어.”

“아니 전하, 단둘이 있을 땐 그리 안 부르셔도….”

“버릇 잘못 들이면 안 된다며.”

내게 했던 그 요구가 민망한 것을 알아, 레오폴트는 내가 정색하고 놀리는 것에 착실히 수치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로즈버리 영애는 걱정 마. 얼마 전에 케인이 고마웠다고, 그날 대신 에스코트해 주겠다고 했어.”

“제가 같이 가고 싶은 건데요….”

“돌아올 때 같이 나오면 되잖아? 레오폴트 경은 참 참을성이 부족해, 그치?”

레오폴트는 여러 가지 의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선 파티 당일.

나와 레오폴트가 마차를 달려 알제니아 후작가 별장의 정원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무며 관목에 빼곡히 매달린 전구들이 정원을 은은하게 밝혔다.

“제국의 작은 별께서 저희 알제니아의 장원을 비춰주시니 정말 황송합니다.”

오늘 파티의 책임자인 알제니아 후작가의 영애, 릴리안 알제니아가 우리를 맞이했다.

레오폴트가 아멜리가 아닌 나와 도착한 것에, 스칼렛 추종자들 모두가 호의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전하, 오셨어요?”

“야외에서 보니 전하께서는 한층 더 요정 같으십니다.”

“응, 반겨줘서들 고마워요. 오늘 파티가 성공하길 기원해. 여기, 내 기사들 몫까지.”

나는 시종이 가져온 벨벳 상자 안에 준비해온 금화 주머니를 넣으며,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파티장의 풍경을 살폈다.

저 멀리에서 한 무리의 중심이 되어 있는 스칼렛과 살포시 눈인사를 나누고, 또 다른 애들은 어디 있나….

‘와, 역시. 아멜리 오자마자 따라붙었나 봐.’

그리고 정원 어스름한 구석에는, 커다란 나무 아래 루시페우스와 마주 보고 있는 아멜리가 있었다.

꽃뱀 사기꾼을 잡던 날에는 그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성내에서 오며 가며 적당한 친목이 이뤄지고 있을 거였다.

‘내가 하나하나 다 제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니까….’

원작에서 아멜리는 선대들의 빚을 독촉하는 일에, 별수 없이 루시페우스의 도움을 받고 만다.

성내 골목들을 돌아다니고 일면식도 없는 몰락 귀족들을 찾아가는 일은 황성에 갓 올라온 귀족 영애에게 퍽 고달픈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친해지기는 제가 먼저 친해졌는데, 레오폴트랑 마주칠 때마다 풋풋하게 설레는 게 눈에 보이고 염문도 둘이 나니까 루시페우스가 집착하기 시작하지.’

나는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에게 빈정대다가 뺨을 맞는 장면을 떠올렸다.

‘지금은 레오폴트랑 훨씬 먼저 더 많이 친해져 있으니 루시페우스의 착각도 덜지 않을까?’

그의 역할 중 필요한 것은 적당한 질투 유발과 방해 정도지, 아멜리를 납치할 정도의 집착은 아니었다.

그가 헛꿈을 꾸지 않도록, 둘의 관계를 적당히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아멜리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면 안 되니까.’

그리고 오늘은, 그의 존재가 딱 그만큼 필요한 날이었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마음을 증폭해주는 질투 유발 장치.

“어머, 케인은 또 어딜 갔담. 로즈버리 영애 잘 에스코트하기로 해놓고….”

나는 부러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레오폴트의 주의를 끌었다.

어디긴 어디야, 말로테 자작 영애한테 끌려갔지.

“아이고, 이 기사를 참. 로즈버리 영애 혼자 놔두고 애인한테 붙들려 있네?”

원작에서도 케인은 이 파티에서 아멜리를 에스코트하는 바람에 말로테 영애에게 꽤나 시달렸더랬다.

혼자가 된 아멜리에게 루시페우스가 접근하고, 그걸 본 레오폴트가 거기에 질투하면서 삼각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에피소드.

‘하지만 이미 레오폴트랑 아멜리가 서로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으니, 삼각관계까지는 아니겠지만.’

나는 나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레오폴트의 낯을 확인했다.

역시나, 레오폴트의 시선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질투하는 것 좀 봐.’

후후, 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가닿은 곳을 살피니 루시페우스 역시 어느새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한껏 굳어진 채, 레오폴트의 시선을 받아내면서.

“저 영식은 알비누스의 둘째던가? 뭐, 그렇게 친해 보이지 않긴 하는데.”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 말소리가 들리는지 아닌지, 레오폴트의 고운 턱선이 불거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질투 유발 역할 잘하고 있네.’

나는 흐뭇한 낯으로 두 사람의 흉흉한 눈빛 교환을 지켜보았다.

그때, 악단이 악보를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내가 당도했으니, 무도회의 첫 춤곡이 시작되려는 거였다.

‘이대로 춤곡이 시작하면,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에게 춤을 청할 텐데…!’

그렇게 놔두면.

「“경께서는 손이 참 뜨거우시네요.”

“…제가 생애 처음으로 춤을 추는지라 긴장하여 그런 듯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주고받으면서 첫 춤을 출 테고.

‘그렇게 놔둘 순 없지!’

몇 세대에 걸쳐 젊은 귀족들의 구혼 파티로 굳어진 6월 자선 파티는, 그 첫 춤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아멜리가 루시페우스와 첫 춤을 추는 걸 본 레오폴트는 퍽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가 그런 전통이 있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로 피했을 텐데 말이야.’

뭐, 지금은 두 사람 사이가 꽤나 끈끈해졌고, 만에 하나를 위해 내가 또 여기 와 있지 않은가.

“레오.”

내가 심각한 분위기로 말을 걸자, 딱딱하게 굳었던 레오폴트의 얼굴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아 멀미가…. 멀미가 너무 심한가 봐.”

“멀미요? 지금까지 괜찮으셨잖아요?”

“이렇게 오래 마차를 탄 게 너무 간만이라, 맨바닥에 서니까 어지러운 것 같아.”

“네에?”

“나, 나는 그냥 저쪽에 일단 앉아 있을게. 편하게 즐겨.”

황실의 마차가 굉장히 견고하고 승차감이 좋은 걸 알았지만, 세실리아가 허약한 편이니 그 핑계를 받아들이는 낌새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으, 으응….”

내가 혼신의 비틀거리는 연기를 시전하자, 따라와 있던 데릭이 나를 보필하기 위해 급히 달려들었다. 그의 부축을 받아 사람 다 춤추러 떠난 상석으로 향할 때.

이쯤 연기했으면 레오폴트도 마음 놓고….

‘나 참.’

나를 조금 걱정하는 기색이던 레오폴트는, 곧바로 뛰어갔는지 이미 아멜리에게 춤을 청하는 중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구나…. 정말, 이성인 친구 덧없다.’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데릭을 물리고, 내 발로 똑바로 걸어 자리에 앉았다.

정원 한가운데 무도회 공간을 보니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손을 맞잡고 첫 춤을 추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들 주변의 다른 이들도 짝지어 선 채, 자선 파티의 첫 춤이 주는 분위기에 홀려 수줍은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림 좋고, 분위기도 좋고. 그나저나, 루시페우스가 다행히도 빨리 물러나 준 모양이네? 바로 옆에 있었을 텐데.’

역시,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덕에, 루시페우스도 주제 파악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안심한 나는 데릭을 비롯한 호위 기사들에게, 적당히 파티를 즐기는 척하면서 귀족파들을 감시하라고 눈짓으로 지시했다.

그때였다.

“오시는 길이 고단하셨나 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잔이 불쑥 나타났다. 라임이 한 조각 들어간 탄산수로, 그것은… 검은색 장갑을 낀 손에 쥐인 채였다.

‘언제 여기로 온 거야?’

깜짝 놀란 나는 또 속절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루시페우스 경….”

얘는 등장도 스릴러야….

나는 두려움을 애써 누른 낯으로 등 뒤에서 나타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낯에는 여느 때처럼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듯했다. 그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나는 유리잔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마치 손거울을 받아 들던 그때처럼, 나도 모르게.

이윽고 그는 그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작스레 그가 내 곁에 나타나자, 내 머릿속은 다시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왜 또 나한테 와? 진짜 용건이 있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월제 연회 때 내게 대화를 시도하려던 것, 글렌치아 공작저의 테라스로 나를 따라 나온 것, 손거울을 준 것.

‘원작에서도 세실리아랑 이렇게 계속 얽혔을까?’

꽃뱀 사기꾼을 잡으러 간 아멜리를 따라간 걸 보며 원작대로다 싶으면서도, 이럴 때면 또 의아해지는 것이었다.

거기다, 자꾸만 루시페우스와 나를 엮어대는 암조 기사들과 스칼렛의 헛다리까지….

‘혼란하다, 혼란해.’

나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묵의 중압감에, 그에 대한 두려움에…. 조금 숨 막힐 것 같아진 순간.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는 내 신분의 특권을 활용하기로 했다.

궁금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특권.

나는 무도회장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왜 첫 춤을 추지 않지? 로즈버리 영애와 함께 있던데.”

“…그게 궁금하십니까?”

“6월 자선 파티에서 첫 춤의 의미를 내가 모르지 않아.”

내가 레오폴트를 왜 굳이 버리고 도망 왔는데.

거기에 그가 이리도 손쉽게 아멜리의 곁을 포기하리란 계산은 없었다.

‘…다행이기야 하지만.’

한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루시페우스는 한참을 대꾸하지 않았다.

뒤늦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을 때.

“혹시 로즈버리 영애를, 제가…. 말입니까?”

“아우렌바흐 소공작과 아주 불꽃 튀던데 말이야.”

무엇을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루시페우스가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렇군요.”

달각, 내 손안의 잔에서 얼음이 미끄러졌다.

“제가 로즈버리 영애를 연모하는군요.”

루시페우스가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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