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10)
그랬다. 레오폴트는 드디어, 아멜리 앞에서 눈치 없이 내 애칭을 부르고 질투 불러일으키기 에피소드를 완수한 것이었다.
“이제 저희도 혼인 적령기고 하니 애칭은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 부모님도 이제 그리 안 부르시고요.”
“뭐어…, 저희끼리 있을 때야 괜찮지만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연습. 연습 삼아서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라도 소공작이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경이라고 해주셔도 좋고요….”
기세 좋게 요구해놓고, 웃음을 참고 있는 나의 무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조금씩 기어들어 가던 레오폴트의 말소리.
레오폴트의 요구를 신랄하게 쏘아붙인 스칼렛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하셨어요?”
“제가 아무리 아우렌바흐의 소공작이라도 은사를 진 자에게 뭘 요구하겠어? 더구나 그런 사사로운 것을.”
나는 가당찮다는 듯이 코웃음을 쳐 보였다.
그래도 아멜리 앞에서는 조심해줄 거지만.
“그래서, 소후작은 상태가 어떤데?”
“아카데미 때랑 같아요.”
역시. 나는 엘런의 보고가 정확함에 흡족하여 고개를 주억였다.
“양손 마디마디가 다 굳었고, 숨도 제대로 못 쉬어서 매일같이 사제들이 신성력을 퍼붓고 있어요.”
회복세를 보면 어쩌면 그때보다 더 심한 것도 같다며 스칼렛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다 당했는지 입은 안 열고?”
“…아버지께서는 아시긴 아시는 듯해요.”
“영애한텐 말이 없었나 보구나.”
“게이블스에서 저야, 곧 출가외인 될 사람인걸요.”
스칼렛이 쓰게 웃었다.
그 ‘곧’이라는 것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 스칼렛은 계속해서 아우렌바흐 공자를 연모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영애에게 혼담이 다시 들어오겠네.”
“…지금껏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염문 한 번 내지 않아서 편했는데 말이에요.”
나는 낙담의 빛 정도나 간신히 비추고 있는 스칼렛의 낯을 살폈다.
아무리 나와 가까워졌어도,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그리 다양하지 못했다.
‘어휴, 게이블스 후작 놈. 저는 필요할 땐 온 얼굴로 빌면서.’
나는 아카데미에서의 일이 있었을 때, 그가 게이블스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 비굴하게 굴던 낯짝을 떠올렸다.
“그래서 말인데, 양해를 구할 게 있어.”
“은사를 진 분께서 제게 양해도 구하시고, 게이블스 이름값이 좋긴 좋네요.”
스칼렛은 여느 때처럼 나와의 관계가 거래의 일환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남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면 아쉬울 스칼렛의 매력으로 느껴졌다.
“로즈버리 영애와 교분을 다질까 해.”
“뒷배가 되어 주시려고요?”
“내 친우가 또 흠뻑 빠져 있으셔서 황성에 오래 머무를 텐데, 너무 소문이 안 좋잖아.”
스칼렛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처음 봤을 땐 비웃나 싶었지만, 이건 그녀 나름대로 흥미로움을 표현하는 것임을 이제는 알았다.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너무나 연모하는 나머지 전하와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저는, 그럼 이제 끈 떨어진 연이 되나요?”
“영애도 새로운 설정을 가져보면 어때?”
“새로운… 설정요?”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너무 연모하는 나머지… 그의 미혼 시절 일탈은 너그러이 봐주기로 했다거나.”
“전하…!”
“오히려 숙맥은 사절이니 경험 많이 쌓고 오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거나.”
“…맙소사.”
내 말을 듣는 스칼렛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전하께선 무슨,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참.”
얘 좀 보게? 내가 스칼렛과 개인적으로 교류하게 되고서, 그녀가 이토록 격한 표정 변화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이 되어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왜애, 정숙한 여인은 그런 거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거야? 아수라마수라 사교계 그렇게 꽉 막혔어?”
“아니, 전하께서는 맨날 궁 안에만 계시고, 만나는 이도 없으시면서 말씀을 어쩜 그렇게 하세요?”
“책에서 다 그러던데?”
나는 조금 뜨끔하여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척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스칼렛보다 나이도 적고, 사교계 활동도 안 해서 순진한 막내 황녀님이었으니까.
게다가 혼사나 연애 문제에 관심도 없어서, 스칼렛이 나를 괴짜로 보기도 했다.
‘내 경험은 사실 전생에 다 있지.’
나는 속으로 웃으며, 과일 냉차로 입을 축이고서 말을 이었다.
“지난번 글렌치아 연회 때 영애 추종자들이 난리도 아니었댔잖아.”
“네, 그랬죠….”
“로즈버리 영애의 잘못이라곤 그냥 레오폴트가 반할 만한 존재인 것뿐이고.”
“저도 그건 알죠. 하지만 사교계 알력 관계가 그리 단순한 거던가요?”
“영애가 사교계 정점인데 뭐 어렵다고? 그냥 가만히 있지 말고, 그 권력 좀 써서 애들 수군거리는 것 좀 잡아봐.”
“…그래서 제가 얻는 게 뭐가 있다고요.”
스칼렛이 작게 불퉁거렸다. 내색하지는 않아도, 아멜리의 일로 자존심이 상하긴 한 듯했다.
하기야 그녀가 사교계에 데뷔한 이래로 지난 6년간 공들여 쌓은 입지를 대번에 흔드니, 아멜리의 존재가 눈엣가시일 수야 있었다.
레오폴트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며 다른 영애들 단속했는데, 체면 다 상했겠지.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은근한 목소리를 내었다.
“로즈버리 영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그냥 관대하게 대해줘. 아우렌바흐의 혼사가 레오폴트의 연심 하나만으로 결정되리라고 생각할 바보는 황성 사교계에 없잖아?”
“하지만, 소공작이 꽤 진심이시잖아요?”
“그의 진심이 영애에게 중요해?”
“…….”
스칼렛은 입을 꼭 다물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중요한 건 명분이었다.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연모한다는 명분, 아우렌바흐와 정적 관계에 있기에 쉬이 다가가지 못한다는 명분, 언젠가 그와 이어질 날을 고대하며 모든 혼사를 거절한다는 명분.
내 부탁 때문에 영애들을 단속하려 노력했지만, 아멜리의 등장이 스칼렛에게 꽤 곤란한 일임은 달라지지 않을 거였다.
나는 넌지시 덧붙였다.
“…알비누스의 둘째 아들도 그 영애를 좋아해.”
“그, 유학 다녀왔다는 이 말이죠? 까마귀 같은.”
스칼렛의 떨떠름한 묘사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영애는 평가가 박하네. 글렌치아 연회 때 보니까 다들 범접하기 어려운 매력이라며 멀리서 지켜보는 분위기던데.”
“저야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연모하니까요.”
풋,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얘가 이렇게 재치 있는 애란 걸 나만 알겠지.’
마지막 경계심은 놓지 않아도, 꽤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스칼렛이었다.
“그게, 알비누스의 둘째가 소후작을 해한 인물이거든.”
“네에?”
스칼렛의 얼굴이 드물게 경악의 빛을 띠었다.
“그럼 소후작이 전하께 덤비다가, 알비누스의 둘째에게 당했다고요?”
스칼렛은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나라도 놀랄 것 같긴 해.’
윌로우 놈이 계속 내 이름을 웅얼거렸다니 내 쪽의 사람이 벌인 일일 줄 알았을 거였다.
하지만 마법 공격으로 판명 났는데, 마법사란 마탑에나 있는 존재이니 의아해하던 차였을 거고.
‘알비누스랑 얽힌 일이 많으니 루시페우스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도 없어서, 우선 내 기라도 누르려고 하는 거겠지.’
나는 화려한 스칼렛의 드레스를 일별하며 그리 생각했다.
“혹시 그럼 아카데미 때도….”
“맞아. 그가 마법을 쓰는데, 마탑에서 수학한 게 아니라 많이 알려져 있진 않아.”
“맙소사.”
“처음 들었구나. 게이블스 후작은 알 텐데.”
내 말을 듣는 스칼렛의 낯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후계자라고 띄워주는 아들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데도, 저주와도 같은 마법으로 공격받아 회복할 기미도 없는 와중에도, 후작은 제 딸에게 무엇 하나 상의하지 않았다.
‘당연히 상처받을 일인데.’
나는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는 대신 말없이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쪼르르, 내가 내 잔에 과일 냉차를 채우는 소리만이 온실을 채웠다.
곧 스칼렛은 조금 전의 침울한 기색을 지워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알비누스 후작과 요즘 기 싸움을 벌이시나 봐요.”
“그래?”
“무슨 약초에 함께 투자하시는 게 있는 모양인데, 서로 투자금을 뱉어내네, 마네…. 비서들만 바쁘죠.”
나는 그것이 황실 지지율을 떨어뜨리기 위한 음모에 관한 일임을 알았다.
지금은 그래도, 곧 다시 합심하겠지. 원작이 그러하니까.
“그러니까 하려던 말은, 그 때문에라도 영애들 단속하라는 거야. 일일이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닌 걸 나도 알지만, 로즈버리 영애 잘못 건드리면 소후작 꼴 날 수도 있으니까.”
“알비누스의 둘째가 로즈버리 영애를 연모하기 때문에요?”
“응.”
“그런데 소후작이 전하를 해코지하는 걸 보고서 대신 공격한 건 뭐예요?”
“뭐긴 뭐야, 그날의 진실이지.”
제 오라비를 소후작이라 지칭하는 스칼렛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친근감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데미 때도… 소후작이 전하께 무례하게 굴었다가 그리된 거고요.”
“으응, 그랬지.”
“…그런데도 그는 로즈버리 영애를 좋아하는 거다?”
“응. 얼마 전 그 영애가 사기꾼 잡은 일 알지? 그때 그 영애 도와주겠답시고 뒤를 몰래 밟아서 와 있었다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이 그런걸?
“그건 그거대로 음험하지만요….”
스칼렛의 호박색 눈동자가 미심쩍다는 듯이 한동안 내 안색을 살폈다.
“왜 이래? 내 말 의심하는 거야?”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고요.”
여전히 스칼렛은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목소리엔 조금 웃음기도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요즘 애들 다 왜 이래?
나는 찝찝한 마음을 눌러두고서,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일일이 단속하기 쉽지 않겠지만, 나도 최대한 도울게.”
“도우시다뇨?”
“올해는 다과회를 자주 열까 해. 그 정도면 내가 아우렌바흐의 안주인으로 영애를 지지한다고 보이지 않겠어?”
“그 영애의 뒷배가 되어주시는 와중에요?”
“나는 공정한 황녀니까. 영애는 뒷배 필요 없잖아?”
스칼렛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빤한데, 알려줄 기미가 없어 보이니 거기서 참으려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다과회를 열면 영애의 최측근들은 꼭 참석하게 해줘. 리피샤 쿠첼, 뭐 그런 애들 있잖아.”
“선거 유세라도 해주시게요?”
“있어, 그런 게.”
나는 찻잔 너머로 쿡쿡 웃었다.
케인을 통해 아멜리의 황성 탐사 스케줄을 알아낸 뒤, 그녀가 사교계의 구설에 오를 만한 일정이 있는 날에는 사교계의 영애들을 황궁에 가두는 게 나의 목표였다.
아멜리가 가문을 살리려는 노력을 두고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입 대지 않도록.
“아 참, 그리고 이번 주말 자선 파티에도 얼굴 비출게.”
“어머, 올해 외부 활동 진짜 자주 하시네요.”
“으응, 그 정도면 영애 체면 살려줄 수 있는 거겠지?”
“저야 감사한 일이죠.”
그 파티에 누가 오는지 알고 있는 나 스스로를 위한 일이면서, 스칼렛을 위한 일인 척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그날도 루시페우스가 올 테니까. 아멜리랑 최대한 못 가까워지게 감시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