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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55화 (55/220)

55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9)

로즈버리 선대 남작이 돈을 빌려줬던 가문들도 그렇고…. 귀족파가 빌런 가문이기야 하지만, 아멜리네 가문의 옛일에도 귀족파가 얽혀 있다니.

나는 그 의문점을 마음속에 담아둔 채 데릭에게 보고를 계속하게 했다.

“그런 가문에 한 번씩 일정 금액을 보냈더군요. 송금증 하나씩만 두고 보면 모르겠지만 수신인이 모두 귀족파인 걸 생각하면, 일종의 자금 조달책 역할을 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금액은 어느 정도?”

“일단 총 피해액은…. 우선 로즈버리에서는 금화 이백 개를 뜯었더군요.”

“엄청 큰돈은 아니네.”

황성 시내에서 2구역 집 한 채 살 정도의 금액이었다.

“로즈버리 사정에는 반년 치 예산인 셈이어서요.”

“…그렇다면 추수 끝날 때까지 버티기가 어렵게 된 거겠구나.”

“네에. 다른 건은 그래도 로즈버리보다는 피해액이 온건한 편이었습니다. 돈 많은 상인이나 지방 귀족 영애님의 쌈짓돈을 사기 친 정도여서 로즈버리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곳도 없었고요.”

“…운이 나빴네.”

나는 아마 앞으로도 볼 일 없을 아멜리의 언니를 연민했다.

역시, 이래서 남자한테 마음을 주면 안 된다.

연애 감정 따위 싹 다 무시하고서, 평생 황실에서 살아야지.

나는 새삼스레 이번 생의 다짐을 다시금 굳혔다.

“총 피해액 약 금화 천 개. 이게 매달 금화 열 개씩 스털링, 페니, 라우트, 잉베, 우르소 같은 가문에 흘러 들어갔습니다.”

“도합 천 개밖에 안 된다고? 자잘하게 뜯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귀족파의 무슨 사업을 하기엔 부족한 금액이지요…. 그래서 동업자가 있으리라 추측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과일 냉차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작에서는 루시페우스가 사기꾼의 머리를 깼으면서도 그를 놓쳐 드러나지 않았던 정황이었다.

‘녀석의 사기 행각이 귀족파 일과 밀접하니 일부러 놓아줬을 확률이 높겠어.’

그 정도로도 아멜리를 구할 수야 있었으니까.

나는 그날 쌍안경 너머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또 손거울에 무슨 말이라도 날아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들킨 건 아닌 모양이야. 그래, 걔가 날 알아봤대도 무슨 미소를 짓겠어.’

어휴, 그 손거울. 버릴 수도 없고.

나는 속으로 작게 떨며 데릭에게 물었다.

“피해자는 다 연락됐대?”

“피해를 신고했던 이들이 많지 않아서 아직인가 봐요. 그래서 사기꾼을 잡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신 로즈버리 아가씨께 우선적으로 피해액이 돌아갔다고요.”

“그 돈이 남아 있었어?”

“말씀드렸다시피 매달 금화 열 개씩만 송금해서요.”

“꽤나 수상하네.”

“반대로 그 덕에 은행에서 수상하게 보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래. 고생했어. 로즈버리만 금액도 범죄 양상도 다르니까 혹시 일부러 로즈버리를 노린 정황은 없는지 한번 알아보고.”

“네.”

“케인한테는 너무 티 내지 말고. 그래도 제 아가씨라서.”

“에이, 제가 그 정도 선은 지킵니다.”

지금껏 딱딱하게 보고하던 데릭의 낯이 느물거렸다.

워낙에 케인이랑 형, 동생처럼 지내서 안 지킬 것을 알지만….

나는 작게 웃으며 데릭을 물렸다.

가해자가 그리 위세 높지 않은 가문의 사생아인 덕에, 이 사건은 황성에서 그다지 화제가 되지 못했다.

‘나한테는 루시페우스랑 친분 쌓을 기회 뺏어서 레오폴트와의 러브라인을 강화해준 뿌듯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걸 잡겠다고 혈혈단신 뛰어든 게 요즘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인 아멜리라, 그녀의 이름만 오래간 사교계에서 회자되었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왜, 그 이번에 사교계 데뷔한 분홍 머리 영애가….”

“아, 그 아우렌바흐 공자와 염문이 도는….”

“용감하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어찌 귀족가 영애가….”

“역시 시골에서 본 데 없이 자라서….”

“심지어 아우렌바흐 공자를 이용했다죠?”

황궁 안에만 머무르는 나조차 사람들이 멋대로 입방아를 찧어대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걸 레오폴트가 도와줬기 때문에 더 저럴 거야.’

무슨 일을 해도 미운털이 박힌 아멜리는 욕을 먹겠지만.

지금 사교계에 아멜리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스칼렛이 좋아하는 레오폴트와 염문설이 나서. 그리고 말로테 자작 영애가 찍어둔 케인의 집에 기거해서.

‘신데렐라물이면 주변 인물 포섭이라도 진행돼야 하는데….’

워낙에 고구마 답답물이셔서, 여자 주인공에게 이렇다 할 사교계 여성 인맥 하나 주지 않은 것이다.

‘역시 내가 나서야 하나….’

문제는 아멜리의 기행 아닌 기행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거였다.

원래 원작에서는 이번 일이 루시페우스의 실수 덕에 실패로 끝났기에, 이 시기에는 구설수가 돌 일이 없었다.

대신 조금 뒤에 로즈버리가 빌려줬던 묵은 빚들을 독촉하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뻔뻔하고 체면도 없다며 욕을 먹을 예정이었다.

‘원래 먹을 욕도 남아 있는데, 이번에 사기꾼을 잡는 바람에 구설수가 추가된 셈이지.’

아멜리의 행복한 황성 생활을 위해,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레오폴트가 애칭 부르지 말라고 하면 그걸 핑계로 한번 불러들여야겠어.’

연인의 이성 친구는 누군지 몰라서 견제하게 되는 법이니까.

‘나랑 안면을 트면 아멜리도 질투하지 않겠지.’

여주인공에게 근거 없이 질투받는 것도 싫고….

‘그러려면, 스칼렛 체면을 위해서 미리 양해를 구해둬야 할 테고….’

오월제 연회에서 아멜리가 사교계에 데뷔한 지 근 한 달.

원작에서와 달리 스칼렛은 내 지시 덕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원작대로면 제 추종자들을 시켜 다과회 같은 데 불러서 망신 주고, 연회 때마다 조롱하게 방조했을 텐데.

‘지금도 조롱이야 하고 있지만….’

지난번 글렌치아의 연회에서도 스칼렛이 난처해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스칼렛의 지시가 아니라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스칼렛의 미래를 위해서는 말이다.

「“어머,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아우렌바흐 소공작에, 알비누스의 영식에….”

“지방에서 와서 상도덕 같은 건 모르나 보죠?”

“사람이 분수를 몰라도 정도가 있죠.”

“저 촌스러운 드레스 좀 보세요!”」

기실 그녀들의 그 모진 말들은 스칼렛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했지만….

원작에서는 그렇게 두어 달 괴롭혀도 아멜리가 황성을 떠날 생각을 안 하니, 그때부터는 스칼렛이 직접 나서는 거였는데.

그렇다면 반대로, 스칼렛을 활용하면 아멜리가 견뎌야 할 괴로움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무얼 하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수군거림을 견디는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거니까….’

적당히 상황 봐서 스칼렛에게 이야기를 꺼내 봐야 할 듯했다.

5월의 마지막 날, 스칼렛이 한 달 만에 내 온실을 찾았다.

보통 두어 달에 한 번쯤 방문하던 것을 이례적으로 한 달 만에 초대한 거였는데, 스칼렛은 의아해하지 않고 냉큼 초대를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윌로우 놈 때문에 상의하고 싶었겠지.’

게이블스 후작가를 담당하는 엘런의 보고에 따르면, 확실하지 않지만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상태가 안 좋아서 사용인들에게도 정확히 알리지 않은 듯하다는 판단이었다.

‘벌써 3주…. 아카데미 때도 몇 달 고생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인가 보네.’

그가 그때와 똑같은 일을 당한 걸 생각하면, 그때도 지금도 루시페우스가 도대체 왜 나를 도왔나 싶어지는 것이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괜히 애들이 이상한 소릴 해서 괜한 생각이 드는 걸 거야…. 올해의 그는 정말로 경계 대상인데.’

내가 스칼렛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가녀린 발소리가 났다.

자박자박, 걸을 일 별로 없는 이들을 위해 연한 양가죽 밑창을 댄 신발 소리였다.

“연모하는 이가 듣도 보도 못한 영애에 코 꿰여서 체면이 상해버린 게이블스 영애. 그간 잘 지냈어?”

“덕분에요, 전하.”

온실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언제나처럼 놀리는 말에, 스칼렛은 익숙하다는 듯 대꾸하며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넓은 청남색의 챙 모자를 어슷하게 걸고서, 그 아래로 비즈가 번쩍이는 살굿빛 슬림한 드레스를 입은 스칼렛은 오늘도 화려한 차림이었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칼은 일견 청순해 보여, 고대의 어떤 여신 콘셉트인 듯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걸린 겹겹의 금빛 팔찌가 차르르,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오늘도 열심히 힘준 게, 후작이 나한테 여전히 앙심이 좀 있나 봐?”

“전하를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게이블스의 가주께서는.”

진한 연지를 바른 그녀의 입술이 아름다운 미소를 자아냈다.

시녀들이 티 트레이와 계절에 걸맞은 과일 냉차를 차려놓고 물러간 뒤, 나는 스칼렛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후작의 용태는 어때?”

나와 윌로우 사이에 그날 있었던 일을 알리지 않아도, 내가 그의 용태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정보력이 좋다는 걸 스칼렛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스칼렛은 호박색 눈동자를 빛내며 내 질문에 다른 물음으로 답했다.

“혹시 전하께서 소후작이랑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나? 나는 왜?”

“소후작이 앓으면서, 전하를 욕하는… 소리를 한대요.”

나는 작게 코웃음 쳤다. 제가 잘못해서 루시페우스에게 당해놓고, 만만한 게 나지.

“진실을 원해, 사교계용을 원해?”

“당연히 전자죠.”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만나기로 하고부터 정리해 두었던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로즈버리 영애가 레오랑만 붙어 있어서 제가 접근 못 하는 걸 두고, 예전에 징계받은 것 때문에 제 평판이 떨어져서 그런 거라며 날 원망하더라.”

푸훗, 스칼렛은 순간적으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좀 심하긴 했어요, 소공작이.”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좋아한다는 설정에 심취한 스칼렛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만도 했다. 원작에서와 달리 단 한 번도 아멜리가 저를 밀어낸 적이 없으니, 레오폴트는 무척 저돌적으로 굴었던 것이다.

스칼렛으로서는 그것 때문에 제 추종자들이 자꾸 충언이랄 것들을 하니 불편했겠지.

“나도 레오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그 영애에게 반할 줄을 알고 계셨어요?”

“…뭐, 스물둘이면 첫사랑을 하기 딱 좋은 나이 아냐?”

스칼렛이 그런가, 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핫, 들킬 뻔했네.

대놓고 예언자처럼 굴고 있는 나라도,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빨리 맺어주기 위해 일을 벌인다는 건 이상하게 보일 게 빤했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리듯이 덧붙였다.

“며칠 전에 와서는 뭐라는 줄 알아?”

스칼렛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 영애가 질투하니 저를 소공작이라 부르래. 레오 말고.”

“어머, 단단히 미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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