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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54화 (54/220)

54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8)

꽤나 스산하고 황폐한 분위기에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이런 데까지 아멜리를 끌어들여서 또 다른 범죄나 저지를 생각을 하고 있을 그 사기꾼의 미끈한 낯을 떠올리니….

‘웩.’

나는 속이 조금 메슥거리는 것 같았다.

“전하, 그러니까 마차 안에서 그렇게 많이 드시면.”

“멀미 나서 그런 거 아냐.”

내 표정을 어떻게 읽었는지, 오늘 작전의 당사자께서는 헛다리를 아주 기똥차게 짚으셨다.

물론, 크레이프에 커스터드 크림빵에 소시지 빵에 닭꼬치까지…. 다양한 냄새가 마차 안에 진동하긴 하지만.

나를 메슥거리게 하는 건 이 사랑스러운 음식들이 아니라, 오늘 아멜리에게 닥칠 위험인걸.

‘레오가 잘 해결하면 돼.’

비록 그 작전의 당사자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지만 말이다.

내가 결의를 다지며 다시금 창밖에 시선을 던졌을 때였다.

‘앗, 아멜리다.’

기대하던 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이목구비로 야무진 표정을 만들고 있는, 분홍색 머리의 아가씨.

보닛을 쓰고 로브의 후드를 한 번 더 눌러썼지만, 그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칼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머, 레오. 저기 분홍 머리…. 혹시 네가 연모하는 바로 그 영애인가?”

심드렁한 낯이던 레오폴트가, ‘분홍 머리’란 말을 듣자마자 튕기듯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 어디요?”

“저기,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잖아.”

레오폴트는 반사적으로 쪽창을 열어 마부에게 잠시 멈춰 서자고 일렀다.

벌써 스쳐 지나간 탓에, 아멜리의 뒷모습은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뒷모습이면 어떻겠는가. 연모하는 이는 아무리 먼 거리에서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인데.

레오폴트는 유리창에 코를 박을 기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결연한 발걸음으로 걸어간 아멜리는, 이내 그 골목의 끄트머리에 있는 상점 문을 두드렸다.

“어머어, 저기로 들어가나 본데? 잡화점인가…?”

사기꾼 놈이 문을 열고는, 그 메스꺼운 낯으로 밖을 한번 훑어보았다.

‘따라붙은 이가 있는지 확인하나 보네.’

레오폴트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저 잡화점…. 좀 수상해 보이지 않아? 이런 한낮인데 덧창도 다 닫아놓고. 이상한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속살거리자 레오폴트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았다.

우리의 순수한 레오폴트가 이런 데서 아멜리를 오해할 위인이 아니니 나는 마음 놓고 상황을 중계했다.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의심하기까지 했으면 ‘공제눈’이 300화가 아니라 500화는 됐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오폴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을 살펴볼 때쯤, 참다못한 레오폴트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하, 저, 죄송하지만, 잠시 나가보아도.”

“응, 걱정 마. 따라오는 기사들 여섯은 된다니까?”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레오폴트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마차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 루시페우스가 오기 전인 것 같고.’

좋아, 계획대로야.

흡족해진 나는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레오.”

“네?”

“아무것도 묻지 마. 그 영애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오셨군요. 아가씨.”

“좋은 오후입니다, 경.”

아멜리는 부러 쾌활한 듯 말했다.

그녀가 들어서자 그렉은 잡화점의 문을 닫아걸었다.

잡화점이라지만 주인장도, 손님도, 아무도 없었다.

아멜리는 순간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로 앉으시죠. 누추하지만….”

잡화점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위에 다기들이 차려져 있었다.

이미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찻주전자….

찻잎이 우러나는 시간이 짧아 손님이 오고 나서야 차를 우려야 하는데,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렉 경은 이런 예법에 조금 무지하던가…?’

아멜리는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상황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지만,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기에….

쪼르륵, 그렉이 아멜리의 잔에 차를 따랐다.

“경, 생각해 보셨나요?”

“제가 손님을 맞이한다니 잡화점의 주인장이 특별히 내어준 찻잎인데, 한번 맛보시겠어요?”

“네에, 향기가 좋네요….”

아멜리는 향을 맡는 척 대충 대꾸하며 주변에 불을 붙일 만한 것은 없을지 둘러보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발화 스크롤을 가져온 것이었다.

“레니 언니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셨나요? 서신이라도 써주신다면….”

“네, 우선 천천히 차라도 드시면서 생각을….”

음험한 빛을 띠는 그렉의 낯에서, 아멜리는 정말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대로 튕기듯 일어난 아멜리는 소맷자락에 손을 넣고 발화 스크롤을 쥐며 말했다.

“경, 저는 오늘 경의 확답을 들으러 왔어요! 당장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면.”

“그러면, 뭐?”

불쾌하게 번득이는 그렉의 눈동자.

정말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었다.

“내가 정말로 엘레나 그 촌것에게 마음이 흔들린다고 착각하신 건 아니겠지?”

느릿하게 일어난 그렉이 아멜리 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두꺼운 손이 갑작스레 아멜리의 가느다란 목을 틀어쥐었다.

“…윽!”

“그 촌구석에서나 귀족 나리들이신 주제에, 꼴에 귀족 영애들이시라고 순진해 빠지셔서야.”

“그, 경…. 이, 이, 손….”

“황성에서 났더라면 어디서 눈도 못 마주치고 구걸이나 다녔을 분들이.”

“케, 켁!”

그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받아내며 아멜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이자의 목적은 저를 무력하게 만들어서는, 그러고서는….

‘누, 누구, 나를 살려….’

그때였다.

쾅쾅쾅!

문을 부술 듯이 두들기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우지끈, 결국 나무로 된 빗장이 빠개지면서 문이 열리고야 말았다.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그 남자는….」

경!

그렇게 외쳤겠지.

원작의 ‘신사님!’이 아니라.

나는 잡화점 문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는 레오폴트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원래 루시페우스의 몫인 일이었는데 말이야.’

그랑 아멜리가 친해질 기회도 막고, 아멜리가 레오폴트에게 한 번 더 반하게도 하고.

아, 흐뭇해. 내 구상이 완벽히 실현된 것에 나는 흡족해졌다.

‘루시페우스가 좀 늦네. 고맙게도.’

그때였다.

인적 드문 그 거리에, 갑작스레 한 남자의 신형이 나타난 것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며칠 전과 달리 내가 이미 몇 번 본 적 있는, 새까만 슈트 차림으로 나타난 그 남자.

나는 재빨리 쌍안경을 빼 들었다.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그 거리가 한적한 변두리 슬럼가에서 지하 조직의 근사한 아지트가 된 것만 같은 착시가 일었다.

‘원작에서는 지나가다가 들렀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역시 다 핑계였구나.’

순간 이동으로 나타난 그는 태연자약하게 다리를 몇 번 내뻗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그 건물에서는, 열린 문을 통해 치고받는 소리가 울렸다.

“감히!”

“으아아악!”

그리고 언제나 생글대는 레오폴트의 낯선 노성.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뭔가 거친 말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아마도 레오폴트가 성기사단원의 권리를 이용하여 그를 영장이나 심문 없이 현장에서 즉결 체포하려는 듯했다.

그때, 루시페우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나는 아쉬워하는 표정이 그의 그 무표정한 낯에 떠오르기를 바라며 쌍안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후후, 아멜리를 구하는 건 네가 아니라고.’

누구라도 아멜리를 구하면 좋지만, 그게 레오폴트면 더 좋은 일 아니겠어?

나는 즐거운 마음에 입꼬리가 흐물흐물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요 얼마간 내게 마주한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안겨주는 자가 아닌가!

이 뿌듯함에는 그에 대한 얄팍한 복수심마저 섞여 있을 거였다.

쌍안경 너머 루시페우스의 미간이 불쾌한 듯, 미세하게 좁혀졌다. 지팡이를 그러쥔 손에도 힘이 꾸욱 들어갔다.

아마 장갑만 아니었다면, 불끈대는 핏줄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비밀이기에, 호신용인 척 들고 다니는 지팡이였다.

저 지팡이를 휘둘러 꽃뱀 사기꾼을 격퇴할 예정이었고.

‘실패해서 화난 거지, 아무래도?’

선수를 뺏은 자가 레오폴트인 걸 알아서일까, 선수를 뺏겼다는 것 자체로 화가 난 걸까?

나는 흥미로운 심정으로 쌍안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자칩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어.’

바로 그 순간. 그의 낯이 별안간 이쪽을 향했다.

쌍안경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마주한 듯했다.

‘설마, 날 본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냉큼 차창 아래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두근두근두근, 의자 아래 웅크리고 있자니, 공포심에 들썩이는 심장이 온몸을 울렸다.

‘조금 있으면 기사들이 치안대도 데려올 거니까. 실패했으니 얼른 가렴, 루시페우스야.’

그런데, 마지막으로 본 쌍안경 너머의 풍경에서 얼핏 그의 입매가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

환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잔상을, 나는 도리질 쳐 털어내었다.

그렉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랜들 백작가의 사생아였다.

원작에서 그 가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역시나 귀족파였다.

‘루시페우스가 아멜리 구하고서 놓아줄 때부터 짐작했지만…. 문제 일으키는 것들은 하나같이 귀족파야.’

황실파의 수장 가문 후계자가 주인공인 세계관인 만큼, 황실파와 반목하는 귀족파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 당연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내 가족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니 귀족파가 밉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금고를 수색했더니 로즈버리 남작가 말고도,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제국 전역을 떠돌며 사기 쳐 뜯어낸 돈과 그걸 갖고 투자한 증서가 많았습니다.”

“쯧쯧, 아주 전 대륙적인 꽃뱀이었구먼.”

“꽃…. 뭐요?”

“아, 아냐. 계속해.”

내 중얼거림에 의아한 낯을 지었던 케인의 부대장, 데릭이 묵묵히 보고를 이었다.

그날의 일은 놀란 아멜리를 진정시키러 간 레오폴트 대신 데릭이 마무리했다.

4황녀의 잠행을 호위하다가 범죄 행위를 발견하여 경비대에 인계. 뭐, 그런 콘셉트로.

“투자 증서를 살핀 결과 모두… 귀족파 가문들에게 흘러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랜들 백작가처럼 귀족파 가문 중에 주류 근처에서 맴도는 가문들 있잖습니까.”

“응, 뭐…. 알비누스에 추근대는 것들 말이지?”

“네. 최근 들어 알비누스 후작이 자주 회동한 그 가문들요.”

“흐응….”

역시, 수상하단 말이지.

여주인공을 따라다니는 동시에 가문의 일도 하기, 뭐 그런 원작의 효율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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