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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53화 (53/220)

53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7)

오싹했다. 심장도 빨리 뛰는 것 같고….

루시페우스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목받은 모양인데, 도움까지 받아 버렸다는 사실이.

‘설마, 어렸을 때 마주친 게 나라는 것도 아는 거 아냐?’

아냐, 그건…. 너무 억측이었다.

그때 그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고, 그가 내 본모습을 처음 본 건 몇 년 뒤 수확제 연회 때가 처음이었으니까.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추측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나는 아무것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두려웠으니까.

내가 그의 약점, 그가 빨간 눈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그만큼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입을 틀어막은 손 틈으로 작게 한숨을 토해낼 때였다.

「부디 다음에는 더 오랜 시간이 허락되기를.」

다음에는, 또…?

이윽고 글씨도 빛도 다 사라졌지만, 나는 한참 동안 그 손거울을 열어둔 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부디 다음에는 더 오랜 시간이 허락되기를.」

빛무리가 그려낸 글씨는 그의 작은 손짓 하나에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 허공을, 루시페우스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흐읍, 숨을 들이켜시는 소리에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어떻게 빛나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루시페우스는 명치께를 슬쩍 눌러보았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분이었다.

“그래도 너무 들뜨지 말면 좋겠다. 너는 반쪽도 아니고 반의반 쪽 아니니?”

그런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기실 계획한 대로 살아가는 이였지만, 그녀에 관해서는 매번 충동적으로, 감상적으로 굴게 되었다.

그녀와의 연이 처음부터 어딘가 비상식적이었으니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하나쯤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제 마음의 모양도 모른 채, 루시페우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그의 입가가 그런 식으로 움직인 것은, 그의 모든 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레베카로부터 미리 치유를 받아놓은 덕에, 잠행의 후폭풍은 약간의 몸살 선에서 그쳤다.

이 역시 황궁의들이 달인 보약을 먹고 곧 회복되었고.

‘세실리아의 유리 몸, 진짜 이대로 괜찮은가.’

뭐, 어쨌든 그 정도로 그쳤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하루 동안 자리보전하고 누워서, 꽃뱀 사기꾼과의 일에 대해 레오폴트를 어떻게 투입할지 고민했다.

‘내가 레오폴트의 꽃밭을 어떻게 믿어?’

내 상상 속에서 레오폴트는 이미 내게 언질을 듣자마자 아멜리에게 달려가 지켜 주겠다느니 뭐라느니 온갖 난리를 다 피웠다.

진심으로, 레오폴트의 꽃밭을 고치기 위해 루시페우스의 계략을 얼마간 놔둘까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내 친구 레오폴트야 그 해맑은 게 매력이기도 하고, 루시페우스의 계략은 군부 전략실장으로서도 막아야 하는 거지만.’

다음 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레오폴트를 호출했다.

마침 황성에서 근무 중이던 레오폴트는 곧바로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이게 바로 인생의 3분의 2를 함께한 갑을 관계 명확한 우정이라는 걸까?

“부르셨어요, 전하?”

“응, 레오. 앉아봐.”

그의 애칭을 부르며 은근히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다.

찻잎을 준 지가 일주일도 안 됐으니, 아직 아멜리와 티타임을 갖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게 여름 다 지나고서였던 것 같기도 하고….’

내 개입 덕에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으니, 아마 시간문제겠지만.

“내일 혹시 시간 돼?”

“내일요? 무슨 일이신데요?”

“응, 오후쯤에 성내에 좀 나가고 싶은데….”

“저더러 수행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우리 레오, 이제 뜨악해하는 표정도 지을 줄 아네?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일이냐며 싱글거렸을 그는 참으로 선을 잘 긋게 되었다. 아주 반듯하게.

‘제가 체육부장이야, 뭐야?’

내가 유일한 여자 지인이어서 마음이 헷갈렸던 것도 이제는 다 해소된 모양이었다.

‘진짜 연심을 느끼고 나니, 깊은 우정하고는 차원이 달랐겠지.’

나는 친구의 마음으로 작게 코웃음을 치고, 독자의 마음으로는 뿌듯한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사랑을 하거라, 사랑을.

“그게, 케인 경이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휴가를 써야 한다지 뭐야?”

케인을 언급하는 말에 레오폴트의 귀가 쫑긋거렸다.

역시, 케인과 아멜리의 관계에 대해 아는 모양이었다.

아멜리의 집이 어디인지까지 알아놓은 레오폴트가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테니까.

그 사실을 대놓고 물을 순 없지만, 미끼를 던질 순 있는 법.

“얼마 전에 나갔다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꼭 나가보고 싶은데 말이야.”

여기까지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다음부터는 꾸며낸 말이지만.

“케인이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제 부하들이 있기야 하지만, 믿음직한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고마울 텐데, 하고….”

“케인 경이 정말 전하께 충심이 깊군요.”

그가 못 듣는 데서나마 사탕발림을 한 레오폴트에게선 아까의 괘씸한 표정은 티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인간관계가 아멜리를 중심으로 재편성된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제가 전하를 수행하는 것이 케인 경에게 가장 좋겠죠? 제 소대에도 바쁜 일 없고, 오랜만에 옛날 분위기도 내고요. 케인 경에게 제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전해주세요.”

“역시 그렇지?”

후후, 나는 내 알기 쉬운 친우에게 진심을 다해 방긋 웃어 보였다.

레오폴트는 내가 군부 전략실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다.

사교계의 동향을 정리하고 귀족들의 뒷조사를 한다는 게 공개적으로 알릴 일은 아니었으니까.

본대륙에는 국가가 아수라마수라밖에 없으니,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을 제하면 전쟁이랄 것도 없는 터.

노르타 산맥의 이민족들을 경계하는 일이나, 다른 대륙에 깔아놓은 첩보망 관련된 일을 하겠거니 막연히 짐작할 거였다.

“근데, 어쩌다가 빈민 지구를 다 지나가셨어요?”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돕도록 하기 위한 나의 위장 잠행은, 황녀로서의 빈민 지구 시찰 쪽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매달 마지막 주에 배급소가 열린다더라고. 그런데 당장 내일밖에 날이 없잖아?”

배급소가 열리는 것도 사실이었고, 이번 주가 곧 끝나는 것도 맞았다.

거기가 내 진짜 목적지가 그곳이 아닐 뿐.

“으응,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아이가 있는데, 어려운 일이 있다길래 시찰하러 나갔었어.”

이번에도, 진실을 살포시 보탠 이야기였다.

그 후원이라는 게 물질적인 게 아니라 다른 도움을 주는 거였고, 아이라는 게 스물셋 아멜리지만.

‘그런 의미에서 너도 나한테는 후원하는 아이란다, 레오야.’

그런 것도 모르고 레오폴트는 사뭇 놀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전하께서 개인적으로 빈민 구제를 하기도 하셨군요? 몰랐네요….”

그의 담백한 반응에서도 나는 그가 퍽 달라졌음을 여실히 느꼈다.

“저는 전하께 모든 걸 다 말씀드리는데, 전하께선 정말 비밀이 많으셔요! 제가 그리 미덥지 않으신가요?”

재작년에 성인이 된 내가 군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시무식 자리에서야 들은 레오폴트는 꽤나 서운해했더랬는데.

나는 기실 레오폴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고 그 이상으로 그가 내게 솔직하게 군 걸 생각하면 서운해할 법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몰랐네, 하고 마는 거지?’

나는 다시금 친구의 마음으로 조금 괘씸하게 생각했다가, 독자의 마음으로 흐뭇해했다.

그래. 네 세상의 중심은, 이제 아멜리니까.

“으응, 테오 오라버니 하시는 거 보고 영감받은 셈이지, 뭐. 어렸을 땐 오라버니 하시는 일을 도울까도 했었잖아.”

그런 걸 레오폴트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에 대한 관심이 꽤나 희미해진 레오폴트는 그러려니 고개를 주억이는 것이었다.

나와 레오폴트를 태운 황실의 마차는 오늘도 암조의 위장용 건물 앞에서 섰다.

레오폴트는 나의 잠행이 꽤나 체계적인 것에 속으로 놀란 눈치였다.

“여기는 무슨 건물이에요?”

“으응, 전략실 기밀이야.”

“기밀인데 제게 노출하셔도 되는 건가요?”

애초에 웃음기가 밴 레오폴트의 말이어서, 나는 크게 괘념치 않고 가볍게 대꾸했다.

“여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뭐, 기밀이시라니까요.”

케인과 함께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에 갔을 때처럼 허름한 마차로 옮겨 탄 우리는 다시금 길을 떠났다.

미리 내 일정을 일러두었던 터라, 별다른 지시를 듣지 않고도 마부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레오폴트는 거기에 한 번 더 감탄했다.

“여기에 저 말고도 전하 기사들 따라오고 있죠? 원래 이렇게 몰래 따라다녀요?”

“응, 말 태워서 거느리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띄잖아. 케인네 소대 애들이 다 와서, 여섯은 돼.”

“여섯요?”

레오폴트는 그럼 굳이 저를 왜…? 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후후, 그건 네가 나 대신 구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나는 그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게끔 세실의 얼굴을 백 퍼센트 활용하여 웃어 보였다.

“소대장급은 없어서 말이야.”

“그러면, 3구역은 그때 다녀오신 게 처음이셨겠네요?”

“아니, 오늘이 처음이야. 그 아이를 만난 건 2구역 끄트머리에서였거든.”

사실 오늘도 3구역 빈민가까지는 안 가고, 그 경계 어딘가에서 멈춰 설 거였지만.

아멜리가 오늘 방문할 그 망할 잡화점이 3구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어렸을 때도 2구역밖에 못 가셨잖아요.”

“그건 로젤리아 언니가 기사들에게 그렇게 지령을 내려서였으니까.”

“…하긴, 단장님이 좀 엄격하셔야죠.”

레오폴트가 친근한 듯한 말소리를 내었다.

그가 성기사단에 들어간 것이 어느덧 4년, 직급 차 꽤 나는 친구의 언니를 단장님으로서 친근히 여길 때도 된 것이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나 만나러 황궁에 드나들면서 로젤리아랑 안면도 트기도 했고.’

레오폴트와는 어렸을 때 두어 번 함께 잠행을 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열두 살이던 어느 날 레오폴트가 성내에 나갔던 일을 즐겁게 얘기하자, 첫 잠행 날에 맛봤던 그 건강하지 못한 전생의 조미료 맛을 잊지 못한 내가 아버지를 또 엄청 조른 것이었다.

‘의젓한 세실은 다 연기였답니다, 로젤리아 언니….’

당시 저잣거리 상인들은 왠지 모를 위압감에 당황했을 거였다.

내게 딸려 나온 호위 기사만도 6소대에서 가장 무섭게 생긴 란셀과 브랜든인데 레오폴트의 호위까지 형형한 눈빛을 보였으니까.

메리제인과 패티샤 또한, 평민처럼 차려입었대도 태생이 귀족인 것은 숨길 수 없을 거였고.

그때 먹었던 슈크림 붕어빵에, 크레이프에, 와플에….

스읍, 군침이 흘렀다.

“레오. 우리 오랜만에 같이 나온 김에, 저잣거리 들러서 군것질거리 좀 사서 먹으면서 가자.”

“전하께서는 은근히 평민들 음식을 좋아하시네요, 정말.”

레오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마부 쪽 쪽창을 열어 말을 전했다.

활기찬 저잣거리가 끝나고 조금씩 인적이 드물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2구역과 3구역 사이의 낙후된 지역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방문했던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은 흥성대기라도 했지, 여긴 정말 슬럼가 그 자체였다.

나는 저잣거리에서 산 커스터드 크림빵을 오물거리며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살폈다.

‘루시페우스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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