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6)
나는 의아함과 떨떠름함이 섞인 눈빛으로 겔프 영식을 보았다.
그가 내게 내밀고 있는 것을 살피니 손바닥 크기의 손거울….
맙소사, 루시페우스가 보냈던 거다!
‘분명 불태우라고 했는데? 아니, 다시 만든 건가?’
위치 추적 마도구라 버린 것도 알았나?
‘아니, 그것보다 나를 알아본 거야?’
엄청 흘끔댔는데!
깜짝 놀란 나는 우리가 앉았던 즈음으로 시선을 던졌다.
루시페우스가 창가에 턱을 괸 채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별 표정을 만들어두지 않은 낯으로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 무감정한 눈빛은 내게 진득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빚을 갚으려면 늘 지니고 다니라고 했으니, 내가 너무 섣불리 행동했던 걸까…?’
마주친 시선이 오래간 물러나지 않았다. 거기에 무언의 강요가 담겨 있는 듯도….
나는 홀린 듯 그 손거울을 받아 들고 말았다.
귀족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손거울이었다. 실크로 덧대진 뚜껑에는 자수가 놓여 있었는데, 가장자리를 따라 장미 덩굴이 조잘조잘 수놓인 것이 화려하지 않아 취향을 타지 않을 듯했다.
그 손거울을 한참 살피고 있을 때, 케인이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마력이 대단하면 변장 보닛을 간파하는 정돈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까요?”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도르가 나 군부 임관할 때 새로 선물해준 거라 나름 마탑 최신 제품인데.
“…아무래도 내가 누군지 알고 준 것 같지?”
“예, 아무래도.”
케인이 고개를 주억이며 하는 말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 시켜서 마탑에 자문 좀 구해보라고 해야겠네….
“그런데 알비누스의 둘째랑….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셔요?”
“아니, 왜 또 그래?”
“그, 선물도 받으시고 말이에요.”
“이게 선물이야?”
“아니, 그럼 뭔가요?”
케인의 낯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처음 받았을 땐 선물의 모양새를 하고 있기야 했지만….
‘이건 진짜, 일종의 협박인데.’
끄응, 나는 꺼림칙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그날 도와줬으니, 뭐, 은혜를 잊지 말라 그런 경고성이야.”
“네에?”
뜨악해하는 케인의 표정이 한껏 불경했다. 왜 이래?
“아니, 애초에 말입니다. 글렌치아 연회 때에도 알비누스의 둘째가 전하를 도운 셈이잖아요.”
“으응, 그렇지.”
“그가 혹시 전하를….”
“전하를, 뭐!”
기색이 진지해서 들어주려고 했더니, 얘가 또?
“사모 그런 거 갖다 붙일 생각 하지 마?”
“아니, 그럼 뭔데요? 말이 안 되는데.”
“말했잖아, 그 경은 경네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까?”
“물어보기라도 하셨어요? 그 경이 그래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아니지만, 실제로 그런걸.
루시페우스는 원작 그대로 자라나 착실히 흑화하기도 했고.
내가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케인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걸로 하지요.”
그리 말하는 케인의 낯은, 언젠가 레오폴트를 두고 빙글대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얘들이 원작 우습게 아네?
그날 저녁, 나는 레베카의 방을 찾았다.
아무거나 주워 오면 동티가 나니, 레베카의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이제는 상급 신관이 된 레베카는 매일같이 대신전에 나가지 않아도 되어서, 이전보다 궁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래도 주일을 포함하여 일주일의 반은 대신전에 가야 했지만.
“세실, 우리 막둥이가 또 어디를 다쳐서 왔나?”
“언니도 참, 누가 들으면 제가 매일 다치는 줄 알겠어요.”
“안색이 좋아 보이진 않는데?”
“헤헤. 사실 오늘 성내에 좀 다녀와서요….”
그러면 그렇지, 레베카가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네가 성내에는 무슨 일로?”
“음, 전략실 일로 잠시 시찰 다녀왔어요.”
“위험한 일은 아니고?”
“그런 거였으면 기사들을 보냈겠죠오. 저도 안에서만 살피자니 아쉬운 점이 많아서.”
말마따나, 레오폴트는 제게 있었던 일 알아서 다 말해주지만 루시페우스와 아멜리 일은 직접 알 수 없으니까….
레베카는 자못 걱정스러운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지만, 나는 모른 척 태연하게 굴었다.
레베카가 내 언니로서 내 건강을 걱정한 세월이 벌써 스물두 해.
하지만 나는 이미 성년이고, 군부에서 내 자리를 잡아 일한 지도 벌써 두 해가 넘었으니까.
나는 걱정 말라는 듯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한테는 언니의 초커도 있고, 테오 오라버니가 선물해주신 반지들도 많은걸요.”
10년 전 텔레포트 반지를 선물해 주었던 테오도르는 지금도 내게 다양한 종류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반지를 수시로 선물하곤 했다.
그것들을 내가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 어디가 아프니? 목소리가 조금 안 좋은 것 같긴 하네.”
“헤헤, 역시 언니. 바깥바람 오래 쐤더니 목이 좀 깔깔하네요.”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레베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2구역 선술집에 갔다가 담배 연기를 마셨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
레베카는 내게 필요한 간단한 치유를 도맡았다.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사소한 회복마저 의원들의 손을 타면 내가 신성력이 없는 게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성력이 질병을 치유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기관지를 괴롭히는 나쁜 공기 정도는 정화해줄 수 있을 거였다.
내 목덜미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불어넣으면서 레베카가 익살스레 말했다.
“우리 막둥이, 신성력 잘 쓰는 남자를 만나야 할 텐데.”
“아휴, 언니 또 그러신다. 저는 황궁에서 죽을 때까지 살 거라니까요?”
“어이구, 그래?”
레베카의 눈이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이런 눈초리는 전생이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구나.
‘어쩌면 아수라마수라가 그런 면에서 더 보수적이어서일지도….’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황실 가족들은, 황궁에 평생 남겠다는 내 다짐을 그저 막내의 치기 어린 투정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내 전생을 알려줄 수도 없고, 참.’
뭐, 굳이 정정할 필요도 없었다. 행동으로 보이면 되니까!
나는 그저 방긋 웃어 보이며, 아까 겔프 자작 영식으로부터 건네받은 손거울을 꺼냈다.
“맞다, 언니. 제가 오늘 이런 걸 주웠는데, 혹시 위험한 물건인지 봐줄 수 있으세요?”
“주웠…다고?”
“네, 소담하니 예쁘고 해서 기념품 삼아….”
“이젠 하다 하다…. 기념품이랍시고 남이 쓰던 걸 주워 오는 황녀는 아수라마수라 500년 역사를 통틀어 너밖에 없을 거야, 세실.”
전생 소시민의 버릇이 어디 가지 못하는 건지, 나는 황실 사람치고 기이하리만치 검소한 편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또 방긋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보자….”
손거울을 받아 든 레베카가 거기에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신성력 줄기를 실처럼 뽑아 물체를 탐사하는 거라고 했다.
“흐음, 별 특별한 느낌은 없네. 주술이 걸린 것 같지도 않고, 마나가 좀 묻어 있는 것 같은데, 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진 않고.”
“그럼 안전한 거예요? 혹시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다거나….”
“그런 마법이 걸려 있으면 마나가 더 짙어야 할걸?”
엥, 그럼 진짜 그냥 선물인가?
‘하지만 분명 계속 지니고 있으라고 했는데…?’
신성력 제어에 있어서는 현세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레베카의 의견이 그렇다면 틀림이 없을 텐데.
불태웠는데도 다시 돌아온 걸 보면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찝찝한 마음을 안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 ‘선물’의 정체는 그날 밤 곧바로 밝혀졌다.
시녀들도 다 나가고, 내가 온전히 혼자가 된 깊은 밤.
“뭐, 뭐야…?”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었던 그 손거울에서 갑작스레 빛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침실을 은은하게 밝힐 정도로 배어난 불빛에,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프리지어궁에 신성력 결계가 겹겹이라서 웬만하면 마력이 개입하기가 어려운데…?’
마치 형광 물질을 입힌 것처럼 장미 덩굴 자수 부분이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맞물린 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꺼림칙한 마음을 다독이며 조심스레 손거울을 열어 보았다.
분명 거울이 자리했던 곳에, 마치 김 서린 창에 낙서하듯 가느다란 글씨가 피어나고 있었다.
“꺅!”
“전하!”
“괜찮으십니까!”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더니, 밖에서 불침번 중이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놀라는 바람에 침대 위에 떨군 손거울에서는 다행히도 더 이상 빛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으, 응, 별일 아냐, 괜찮아! 그, 그림자를 잘못 봤어.”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손사래를 쳐 그들을 다시 내보냈다.
“아이고, 주무십쇼.”
놀라서 들어왔던 기사들이 꾸벅 인사하며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 손거울에서는 다시금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이상해….
‘누가 들어왔던 걸 아는 건가?’
나는 손거울을 차마 집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거기에 어떤 글자가 나타나는지 꺼림칙한 낯으로 지켜보았다.
「당신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문장. 그때 카드에 쓰인 것과 같은 필체였다.
「덕분에 이걸 다시 드릴 수 있었지만요.」
꼴깍, 내가 마른침을 삼키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나는 그 손거울을 한참을 들여다볼 뿐 어떤 움직임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레베카가 탐지할 수 없을 만큼 적은 마나로도 이런 걸 할 수 있는 거야…?’
변장 보닛을 쓴 걸 알아본 것도 그렇고…. 새삼 그가 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는 것이 실감 났다.
‘이게 위치 추적 마도구가 아니고, 내게 말을 걸려고 이걸 줬다고…? 왜?’
그가 내게 왜 이러는지 몰라, 나는 혼란스러운 가슴을 꼬옥 끌어안을 뿐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려움에 또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활짝 열린 손거울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 맞잡은 손을 끌어올려 입을 가렸다.
「그때의 빚을 갚으실 생각이 없는 건 아니실 텐데요.」
히익, 나도 모르게 눈이 한도 끝도 없이 커졌다. 세실 눈 빠지겠네….
‘아, 혹시 변장 보닛 간파한 게 아니라 내 눈동자 색을 그 멀리서도 알아본 걸 수도 있겠다.’
금빛이 섞인 이 황족의 상징은 신의 가호였기에 어떤 마법으로도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안경으로 눈 색을 바꾸는 걸 보면, 변장 보닛도 좀 더 힘내줄 법도 한데 말이다.
아니,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이걸 지금 창밖으로 던져버릴까….’
나는 흘끗 창문 쪽을 보았다.
「참, 프리지어궁의 궁인들은 시키신 대로 제대로 소각하였습니다. 다시 버리신다면 피차 번거로워지겠지요.」
으아앙, 얘 나한테 왜 이래. 속마음 읽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