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5)
그러니까, 케인은 여전히 루시페우스가 나를 위해 윌로우 놈을 공격한 줄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짜, 불경하다, 불경해.
“으응, 그래.”
“소후작이 끝까지 홀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루시페우스의 마법으로 다른 테라스에 옮겨진 윌로우 놈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들은 바가 없었다.
그것이 소문날 이야기는 못 됐으니까.
엘런이 딱히 보고하는 내용도 없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닌 모양이라 생각하고 말았는데.
조만간 스칼렛이 놀러 오면 물어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라서 엘런이 알아보는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보안이 철저한지 아직 정보 구했다는 얘기가 없네요.”
흠, 큰 문제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소후작의 용태가 심각하니 구설에 오를까 단속하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레몬수가 담긴 유리잔을 톡톡 건드렸다.
“아무튼, 그날 게이블스 후작과 알비누스 후작이 서로 으르렁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평소에 늘 저자세이던 알비누스 후작이 그날따라 좀 세게 나갔답니다.”
케인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루시페우스 쪽을 향했다.
“알비누스의 입김이 커지고 있는 게 확실한가 봅니다.”
“고고하게 살아온 게이블스로선 더러운 일을 하려면 알비누스의 손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알비누스의 손이,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너무도 강하고 유능하니 말이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인위적으로 열기까지 하게 될 테니….’
그때, 체격 좋은 사내 하나가 들어와 아멜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꽃뱀 사기꾼이었다.
“경.”
“네, 여기.”
우리는 턱을 괴고 음료수를 홀짝이는 체하며 마도구를 귀에 대었다.
아멜리와 사기꾼의 대화는 내가 기억하는 대로 이어졌다.
― 언니가, 경이 떠나시고서 위독해졌어요.
― 엘레나 양이…. 말입니까?
― 네, 식음을 전폐하고….
흑흑, 아멜리가 작게 우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케인이 침음을 흘렸다.
― 제발 언니를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 제가 지금 이런 꼴이라….
이런 꼴이라는 것은, 사업에 실패한 도망자 신세라는 거였다. 현실은 그냥 사기꾼일 뿐이지만.
그 목소리가 꽤나 아련한 것이, 이런 연기쯤은 일도 아닌 모양이었다.
으으, 나는 속으로 부르르 떨었다.
― 언니와의 시간을 다 잊으셨나요? 사업이야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건강하시면 그걸로 다 된걸요. 저도 언니와 함께, 경께서 로즈버리로 돌아와 제 형부가 되실 날을 고대하고 있었는데요.
아멜리는 끓는 복수심을 삼키고서 있지도 않고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내뱉으며 흐느꼈다.
‘오오, 연기력이 그럴싸한데?’
내 뒤편에 있어서 그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내 맞은편에 앉은 케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아멜리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공감성 수치였다.
―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이런 꼴론 차마 엘레나 양을 만날 용기가 없어서….
― 그렇다면 혹시 연서라도 하나 써주실 수 없으실까요? 이대로라면 언니는 올해를 넘기기가….
아멜리의 언니가 앓아누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사실 화병에 가까웠다.
― 그 정도입니까?
― 네, 경! 부디,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세요. 그게 아니고서는 제가 로즈버리에 돌아갈 수 없어요. 언니가 얼마나 경을 그리워하는지, 경은 모르시겠죠?
사기꾼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지,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 …저도, 엘레나 양을 한순간도 잊은 적은 없습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사기꾼 놈의 태도는 썩 달라져 있었다.
아멜리가 제가 사기 친 것을 모르는 듯하니,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을 이용해 재미 좀 볼 수 있겠다 판단한 거였다.
그걸 듣던 케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공감성 수치를 느꼈을 때보다 눈에 더 힘이 들어간 것이, 이제는 사기꾼의 뻔뻔한 작태에 분노한 듯했다.
― 하지만 저같이 못난 놈이 엘레나 양께 어찌 감히…. 시간이 필요합니다.
― 시간요? 좋아요, 얼마든지요. 경께서 편하신 대로 제가 다 맞출게요.
사기꾼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멜리는 들뜬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 우는 연기를 하던 것치고는 굉장히 고양된 목소리였는데, 사기꾼은 그런 것을 의아해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저, 젊은 여자가 제 발로 굴러들어 왔단 사실에 기분이 좋아서.
‘하, 정말….’
저놈이 지금 아멜리를 두고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는 나는, 열이 뻗치고 말아 고개를 돌려 그편을 노려보았다.
구릿빛 피부에 결 좋은 금발…. 마치 전생에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던 인형의 남자친구와도 같은 인상이었다.
― 사흘 뒤에 뵙죠. 그때까지 제가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그의 옆모습을 노려보는 내 귓가에 그 사기꾼이 아련한 척을 하며 지껄이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으으, 재수 없어. 반반한 낯짝으로 입만 살아서는!’
전생의 상처가 머릿속을 스쳐, 나는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연민을 담아 쯧쯧 혀를 찼다.
정말, 연애 감정에 소모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에너지 낭비가 없다.
내가 진저리치며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차였다.
시야에 스친 루시페우스가, 어쩐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던 모양새였다.
‘내가 혀 차는 소리가 거슬렸나?’
나는 다시금 두려움에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아멜리와 이야기를 마친 사기꾼은 그녀 몰래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인.”
“예.”
케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빠져나갔다.
밖에서 대기 중인 다른 기사들에게 저 사기꾼의 뒤를 밟으라고 명령을 내리러 간 거였다.
‘케인 돌아오면 나가야지. 아멜리 먼저 보내고.’
나는 고개를 젖혀 다 마신 레몬수를 털어 마시는 척하며, 아멜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멜리와 니콜슨은 그 사기꾼이 떠나가고도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저들끼리 무슨 실랑이를 벌이는 듯했다.
「“잘되겠습니까, 아가씨? 케인 녀석에게 귀띔이라도 좀 해두면….”
“할아범도 참, 케인을 데려가면 경계할 게 분명하다고! 일단 내가 그 녀석의 집 위치를 알아내기만 하면 다 착착착 잘될 거야.”
“잘 빠져나오실 수 있겠어요?”
“내가 로즈버리의 날다람쥐였잖아, 잊었어?”
그 말을 듣는 니콜슨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아멜리는 지레 더 발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다음에 경비대에 요청해서 들이닥쳐 달라고 말하면 그만이야.”
“이 할아범이라도 좀 데려가 주세요, 그럼.”
“날쌔게 막 도망 다닐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아멜리가 부러 윽박지르듯 하는 말에, 니콜슨의 낯이 어두워졌다.
그가 나이치고 체격이 좋은 편이지만, 젊은이들 속도를 따라잡기란 어려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아가씨를 혼자 보냅니까. 영주님 뵐 면목이 없어요.”
니콜슨은 이미 마음을 굳힌 아가씨에게 들리지도 않을 소리만 뇌까릴 뿐이었다.」
아마, 이런 류의 설전을 벌이고 있겠지. 사기꾼 놈이 나가자마자 마도구를 회수해서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멜리는 굉장히 세상 물정에 밝은 편이었고, 냉소적인 면도 있었지만…. 이 일에 관해서는 그릇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지인이었던 사기꾼을 얕봐서일 수도 있고, 일이 잘 풀리니 들떠서일 수도 있었다.
‘저놈의 숙소만 덮치면 경시청이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황성 경비대가 그리 빠릿빠릿하지도 않고 저놈은 생각보다 더 악질인걸.’
그의 숙소를 찾아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할 때, 그걸 도와주는 게 루시페우스였지.
나는 눈동자를 슬그머니 굴려 루시페우스 쪽을 쳐다보았다.
나를 알아볼 리 없다고 생각하니, 그를 살필 배짱도 생기는 것이었다.
요 얼마간 그를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루시페우스는 아멜리 일행과의 사이에 설치된 가벽에 느른히 기대 있었다.
눈을 슬며시 내리깔고서,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을 흔들어 달각달각, 얼음 부딪는 소리를 내면서.
맞은편에 일행이 있지만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왁자한 가게 안에서 홀로 외딴섬 같았다.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걸 듣고 있는 거겠지? 마법 이용하면 다 들릴 테니까….’
저렇게 엿들은 걸 갖고서 마치 우연처럼 나타나 구해주는 거겠지.
그때부터 아멜리의 성내 탐험 때마다 루시페우스가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도와주며 친분과 호감도를 쌓아갈 예정이었고.
‘원작에서는 그때까지 흑막 설정이 나오기 전이라, 위기를 해결해주는 서브남으로 은근히 인기 끌 때고.’
그런데 문제는 아멜리를 위기에서 구해줘 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악당을 놓치는 기행을 벌인다는 거였다.
‘이 일도 꽃뱀 사기꾼이 결국 도망치게 되니까.’
이때만 해도 루시페우스는 ‘정중한 서브남’ 이미지여서, 허당 기질이 있는 것으로 서브 병 환자들의 마음을 잠시간 사로잡았더랬다.
‘나중에 본색 드러내니까, 계속 자기 도움 받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던 걸로 재평가됐었는데.’
그런데 내가 세실리아가 되고서 보니, 아멜리와 얽힌 이들이 모두 귀족파 찌끄레기들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일부러 아멜리의 적수들을 놔줬다는 추측이 맞을 확률이 높은 거였다.
‘진짜 실수라면, 세계관 최강자 흑막치고 너무 어설프긴 하잖아.’
루시페우스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레오폴트를 위해서든 내 일을 위해서든 당분간 방해 좀 해야겠어.’
그리 생각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어린 시절에 그리 안쓰럽게 여기다가 적대하게 된 게, 썩 마음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알비누스 후작을 따르기 시작한 게 실수 아니겠어? 대신 그처럼 어려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레이스를 도우면 되니까….’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새 케인이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저희도 슬슬 움직일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레이디.”
가게를 나와 마차를 세워둔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놓고 가신 게 있는 듯합니다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아까 루시페우스와 함께 있던 그 남자였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를 지닌….
‘아, 겔프 자작 영식? 그때 아카데미에서?’
윌로우 놈이 아카데미에서 나를 해코지하려 들었을 때, 레오폴트를 내게서 떼놓기 위해 마멧돼지를 제압해 달라고 한 그 소년이었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윌로우의 끄나풀이었는데…?
‘아카데미 징계 위원회에서 증언한 일로 윌로우 놈이랑 사이가 틀어졌나? 하긴, 루시페우스도 같은 귀족파니까 같이 어울리는 게 말이 되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재빨리 추론을 마친 나는 태연한 낯으로 답했다.
“제가 뭘 놓고 나왔다고요?”
“아까 계셨던 자리에 떨어져 있던데요.”
엥, 애초에 들고나온 게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