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4)
“상황이 어떤지 보고, 레오를 어찌 도와줄지 생각해야 하니까.”
이 상황을 레오폴트에게 귀띔해주면, 눈치 없는 그는 아멜리에게 돌직구로 물어볼 게 빤했다.
그러면 아멜리는 자존심 상해서 입 다물고, 오해가 쌓이고, 고구마 대잔치가 펼쳐질 게 눈에 선한 일.
해서, 나는 상황을 제대로 살핀 다음에 딱 필요한 부분에만 레오폴트를 투입할 심산이었다.
며칠 뒤, 아멜리가 꽃뱀 사기꾼을 만나는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나가는 길.
“혹시 글렌치아 공작저에서 일 있었다고 저 벌주시는 건 아니죠?”
“왜 생각이 그렇게 튀어?”
“아무리 단독 행동하실 때 수행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대도 주시하고 있었어야지, 뭐 그런 생각이신가 해서요.”
“설마.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으로 보여?”
“딱히 그렇다기보다요….”
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데리고서 평민들이 모여드는 곳에 갈 생각을 하니 꽤나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게다가 목적지가 루시페우스의 거점 중 하나이니, 그와 맞닥뜨릴까 걱정도 될 테고.’
실제로도 그럴 예정이었으니, 그건 기우가 아니었다.
‘루시페우스가 거기서 아멜리가 꽃뱀 사기꾼이랑 다시 만나기로 하는 거 엿듣고 따라갈 거니까….’
미안하지만, 거기서 구해주는 역할은 우리 레오에게 양보해 줘야겠어.
나는 속으로 후후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 거기에 경 아버지가 그 영애랑 간다고?”
“네에, 아무래도 아가씨 혼자 보내는 게 영 마음에 안 놓이신다고 하셔서….”
“경 아버지, 연세가?”
“제가 늦둥이여서…. 예순이 넘긴 하셨는데, 체격이며 체력이며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으셔요.”
나는 감탄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기사의 아버지란 웬만한 일반인보다야 믿음직하겠지.
하지만 케인은 초조한 낯으로 불만스레 웅얼거렸다.
“제가 같이 가드린다고 했는데, 오히려 제가 가면 놈이 도망갈 것 같다고, 일부러 못 쫓아오게 저 근무하는 날로 약속 잡으셨더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지. 경은 누가 봐도 황성 기사 같거든.”
“그럼 더더욱 제가 곁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저 멀리서 봐도 기사 같아서 찔리는 구석이 있는 놈들은 경계하고 꽁지 뺄 거란 소리야.”
“그런가요.”
쩝, 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리한 아멜리는 다짜고짜 사기꾼을 드잡이하지 않고, 우선 그를 방심하게 하려고 애쓸 예정이었다.
그가 제 영지에 하고 간 짓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냥 언니를 위해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는 여동생을 연기하면서.
‘문제는 그 쓰레기에게 동정심이나 언니에 대한 애정 따위 한 톨도 없다는 거지.’
내가 아멜리가 빠질 위기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마차가 첫 도착지에 다다랐다.
암조의 바깥 임무를 편히 수행하기 위해 위장용으로 만들어놓은 상단 건물에서 마차를 한 번 갈아타려는 거였다.
가장 수수한 것이라도 황실 마차는 다 티가 나서, 이걸 타고 아멜리의 약속 장소까지 갈 수는 없었다.
“전하, 여기 보닛요.”
“응.”
나는 황실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변장 보닛을 눌러쓰고 마차를 갈아탔다. 보닛을 쓰자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진짜 목적지에 다다르고서도, 주목받지 않도록 후미진 곳에 마차를 대야 했다.
‘귀족파 청년들이 종종 오가는 곳이니, 조심하면 조심할수록 좋으니까….’
물론 내 얼굴도 다른 얼굴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아, 아무래도 영 불안한데요.”
“경이 나랑 동석하고, 그림자들도 따라붙었는데 뭐가?”
“그래도, 아가씨랑 이렇게 험한 데를 다 오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써서 나를 아가씨라 부르며, 케인이 주변을 살폈다.
“저기인가 보네요.”
허름한 목제 간판에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이라 적혀 있었다.
슬럼화된 2구역 변두리의 한적한 사거리에서 밤낮없이 장사하는 이곳만이 복작거렸다.
‘전생에서나 여기나 요식업장은 밤에만 열어서는 장사가 안 되는 거지.’
나는 걱정하는 케인을 독려하듯 툭 쳐 앞장서게 했다.
“어서 오십쇼!”
문을 열고 들어서자 취객들의 웅얼대는 목소리와 담배 연기가 혼미하게 가득 찬 공간이 등장했다.
윽, 뿌연 연기.
‘세실 몸이 이걸 버틸 수 있으려나 몰라.’
켈록켈록, 절로 기침을 뱉으니 케인의 낯이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당분간 황궁 밖에 나다닐 일이 없으니 며칠 앓아누워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케인의 마음은 안 괜찮겠지만….
그는 다시금, 이 잠행이 글렌치아에서의 일에 대한 문책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빈자리를 찾는 척하며 두리번거릴 때였다.
‘앗, 아멜리다.’
그 혼탁한 공기 속에서 아멜리의 분홍색 머리칼이 빛나고 있었다.
정말, 못 알아볼 수가 없네.
케인과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아멜리에게서 대각선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케인 역시 변장 모자를 쓴 덕에 아멜리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저 옆에 있는 게 경 아버지라는 거지? 누가 봐도 경 아버지인 줄 알겠는걸?”
내 눈앞의 거구 유전자가 다른 데서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케인이 아멜리가 니콜슨이랑 단둘이 가게 놔뒀구나.’
니콜슨은 아멜리에게 친척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의 임무에 그의 존재가 도움이 되냐면…. 그게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손녀딸 같은 아가씨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니콜슨은 사기꾼을 마주한 내내 굳은 얼굴로 그를 노려볼 예정이었다.
눈물로 호소하는 아멜리 옆의 그 굳은 낯은 사기꾼에게 의심을 사기 충분할 예정이었지만….
‘사기꾼 놈은 더 예쁜 동생이 절로 굴러들어 왔다고 생각해서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좋은 오후입니다요. 무엇으로들 드릴까?”
“에일 맥주 한 잔이랑 레몬수 한 잔 주시게.”
우리 테이블로 다가온 점원에게 케인이 목소리를 낮춰 능숙하게 주문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가게 풍경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왁자한 선술집의 풍경은 희미해진 기억 속 전생의 풍경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역시 창조주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뭔가 그리운 마음이 되어 서민들의 술집을 둘러보았다.
귀족파의 청년들이 종종 모인다고는 했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평민들만 있는 것 같은….
‘아.’
그때. 한 바퀴 둘러보던 내 시선에 익숙한 얼굴이 걸려,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 같은 하얀 얼굴, 내려 묶은 검은 머리칼, 손에 낀 검은 장갑과 안경….
루시페우스였다.
평소보다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은 채, 여느 손님들처럼 편하게 린넨 셔츠에 가죽 바지를 받쳐 입은 그 남자.
그는 창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서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무서워서 그런가, 심장이 떨렸다.
‘마주칠 걸 알고 있었는데도 떨리기는 매한가지네….’
그가 앉은 자리는 아멜리와 니콜슨의 자리를 등진 곳이었다.
그들의 일행, 꽃뱀 사기꾼 놈이 오면 가벽을 놓고 그와 등을 맞대게 될 거였다.
‘아멜리 발견하고서는 무슨 얘기하는지 엿들으려고 일부러 저기 앉은 거겠지?’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이 가게를 가득 메운 담배 연기에 부옇게 빛나서일까. 그 사이에서 그는 한결 나른해 보였다.
‘여기가 귀족파 청년들 모이는 거점이니, 누굴 기다리는 중이기도 하겠고.’
아멜리가 사교계의 화려한 것들을 맛볼 때 레오폴트를 만났다면, 황성에 온 목적을 위해 성내를 돌아다니면서는 루시페우스와 부딪혔다.
처음에는 기분 좋은 우연이고, 또 얼마간은 도움을 주기도 했던 것이, 조금씩 집착으로 변해 갔다.
‘그게 오늘부터 시작이고 말이야.’
그의 얼굴에 어떤 실마리라도 피어오를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남성적인 윤곽 안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필 때였다.
“나 왔네. 기다렸지?”
사내 하나가 불쑥 나타나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소리에, 미동도 없던 루시페우스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마치 동대륙의 초원에서 잠들어 있던 그를 훔쳐봤을 때처럼.
두근, 두근, 두근, 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나는 왠지 모르게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두 번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점멸하던 그의 다갈색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와, 내 쪽을 시선에 담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변장 보닛 덕분에 어차피 알아보진 못했을 거야.’
괜히 그쪽에 면한 내 관자놀이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주문하신 에일이랑 레몬수 나왔습니다.”
때마침, 점원이 우리가 시킨 음료수를 갖고 오면서 내 옆을 가려주었다.
‘고마워라.’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따가워서, 진땀을 빼고 있던 차에 다행이었다.
“저, 이것 좀.”
그때, 케인이 다른 쪽을 보면서 은화 하나와 달걀 크기의 마도구 하나를 점원 쪽으로 밀었다.
주변을 슬쩍 훑은 점원은 재빨리 은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걸 저기 분홍 머리 아가씨 있는 쪽 있지? 저 테이블에 갖다둬 주게.”
그러면서 케인이 제 주머니에 든 것 하나를 슬며시 꺼내 보였다. 성기사단의 견장이었다.
점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마도구야?”
“네. 소리를 모아서 이쪽으로 전달해주는 거예요.”
그러고서 케인은 납작한 달걀 모양의 마도구 한 쌍을 꺼냈다. 한쪽 귀에 하나씩 대는 모양이었다.
케인에게 은화를 받은 점원을 보니, 식기 통에 마도구를 넣어서 아멜리의 테이블에 가져가고 있었다.
대강의 준비가 끝났겠다, 나는 책상에 상체를 바싹 붙여서 케인에게 속삭였다.
“경, 고개 돌리지 말고 왼쪽 봐.”
벌써 10년 차의 연륜인지, 케인은 자연스럽게 눈동자만 굴려 내가 언급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멜리네 테이블과 맞닿은 쪽, 루시페우스를 발견한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제 우람한 상체를 탁자 쪽으로 기울이고서 케인이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 아가씨에게 진짜 관심이 있나 보네요? 바로 뒤에 앉은 게….”
“그렇다니까.”
내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차린 케인. 역시 십여 년 수하다웠다.
조금 생각하는 기색이던 케인은 목소리를 한껏 더 낮춰서 말했다.
“지난번 글렌치아 후작가의 연회 때요.”
“응.”
“시종으로 위장했던 애들 말이, 저희 복귀하고서 게이블스 후작과 알비누스 후작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엘런 쪽이랑 아직 얘기가 덜 끝나서요. 정확히 의견 수렴해서 알려드리려 했죠.”
“무슨 일이었는데?”
“그, 저분이 ‘우연히’ 게이블스 소후작을 처리하고서 말입니다.”
케인이 루시페우스 쪽을 흘끗대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雪花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