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3)
“경이 알비누스 담당이잖아? 마침 알비누스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이 경의 아가씨에게 비이성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물론 진짜 비이성적인 건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아멜리 아가씨가 영지에서 인기가 좋으시기야 했는데, 참.”
반쯤 넘어왔는지, 케인의 중얼거림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게다가 레오폴트가 그 아가씨에게 푹 빠진 기색이어서 말이야. 알비누스의 둘째를 견제하는 김에 레오를 돕고 싶기도 하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소공작께서는 진심이신가요? 사실 글렌치아 연회 다녀오고서 아가씨께 여쭤봤는데, 쑥스러우신지 제대로 말씀을 안 하셔서 말이죠.”
“말도 마. 레오가 만났다 하면 그 아가씨 찬양이야.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어.”
내 너스레에 케인이 하하 웃었다.
“아우렌바흐 소공작께서 전하를 연모하는 줄 알았는데, 취향이 전혀 달랐나 보군요?”
“내가 뭐랬어? 레오는 나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그런 걸로 하죠, 뭐.”
케인이 빙긋이 웃었다.
분명히 레오폴트가 나를 좋아했지만 내가 철벽을 치는 바람에 조금도 진전이 안 된 걸로 착각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거기엔 엘런이 내게 지어 보이던 한심해하는 표정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내 철벽이 꽤나 강고하긴 했지만, 그건 그들의 운명이 따로 있어서였다고!
“그러니까 편하게 생각해. 나한테는 경이 아니라 레오폴트의 사랑을 도와주는 일이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왜 굳이 아우렌바흐 공자님의 사랑을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 진짜 연유를 이야기할 수 없어서, 나는 적당히 우리의 관계에 어울리는 말을 지어냈다.
“친구가 스물두 해 만에 운명을 찾았다는데, 두 손 들고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전하께서는요?”
“경, 아까부터 질문이 계속 불경하지 않아?”
암조 기사들은 내가 황궁에 눌러살 거라 노래하는 걸 질리도록 들었지만, 이따금 이렇게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이번에 글렌치아 연회 다녀오시고서 구혼장 엄청 들어왔다면서요?”
“프리지어궁 궁인들만 신났지, 뭐.”
내게 들어온 선물 다 나눠 가졌으니까.
진짜, 이 세계 혼인 적령도 전생 수준으로 대폭 늦춰야 한다. 아니, 애초에 혼인 적령이란 말도 웃기고….
“허전하지 않으시겠어요?”
“뭐, 연인이 생긴대서 친구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그렇죠.”
내 여상한 말소리에, 케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시려는데요?”
“레오가 멋있게 보일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
“멋있어 보일 기회요? 아우렌바흐 공자님 정도면….”
“그렇지만 뭐랄까, 지금까지 레오랑 무도회에서만 만난 거잖아? 레오가 키도 크고 몸도 좋아서 남성적인 매력이 있기야 하지만, 얼굴이 예쁘고 사근사근한 이미지라 옷 입혀놓으면 그 매력이 안 보인단 말이지.”
“…꽤나 분석적이시네요.”
케인의 얼굴에는 나를 놀리는 기색이 배어 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뭔가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이미지를 쇄신하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왕자님처럼 딱! 멋있게, 딱! 이런 거 있잖아.”
“왕자…님요?”
아, 아차. 제국에서는 왕자님이 딱히 멋있게 울리는 단어가 아니지.
“그러니까, 그 영애가 위기에 빠졌을 때 레오가 나와서 딱! 멋있게 구해주면 어떻겠느냐는 거지.”
“꼭 위기에… 빠져야 합니까?”
케인이 의아한 듯이 대꾸했다.
아, 너무 앞서갔나.
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고 새침하게 말했다.
“일단, 경네 아가씨가 성 밑에서 하려는 일이 어떤 건지 알아보고 정리해줘. 늦은 나이에 굳이 황성까지 와서, 수모당할 거 빤히 알면서까지 귀족들하고 안면을 트려는 걸 보면 좀 복잡한 일 아니겠어?”
나는 아멜리가 황성에서 벌이려는 그 위험한 일들의 목록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케인을 설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뭔가 험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닐지 같이 지켜보자는 거야.”
“그건 아가씨의 사생활이라, 아무래도….”
“경.”
나는 허브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놓으며 케인을 바라보았다.
“궁극적으로는 알비누스의 둘째를 견제하는 일이야. 그중 레오에게 도움이 될 일은 내가 정할게. 그 아가씨를 가장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는 건 레오잖아.”
내 단호한 말에, 케인의 얼굴이 슬며시 진지하게 굳었다.
마음으로는 어려워도 머리로는 납득했을 거였다.
아멜리가 상경하고부터 줄곧 정보 길드 쏘다니고 했을 테니 꽤나 걱정스럽던 차였을 터.
한참 생각에 빠졌던 케인은 뒤통수를 맞은 듯 얼떨떨한 얼굴로 덧붙였다.
“전하, 그런데…. 일 얘기 안 하신다면서요.”
이거 일 얘기잖아요, 케인이 억울한 듯 뇌까렸다.
아멜리가 상경한 가장 큰 이유는 로즈버리 남작에게 투자하라고 꼬드겨 놓고 돈만 챙겨 튄 언니의 약혼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사업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그는 그야말로 혼인 빙자 사기를 저지른 ‘꽃뱀’이었던 것이다.
‘꽃뱀에 남녀가 어딨어? 사랑 갖고 물면 다 꽃뱀이지.’
그것 말고도 로즈버리 남작가의 가주들은 대대로 호구… 아니, 호인들이었는지, 차용증을 쓰고도 돌려받지 못한 빚이 꽤 남아 있었다.
그 금액들만 돌려받으면, 가문이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걸 누가 하느냐가 문제였다.
사람을 쓸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게다가 남작은 영지를 지켜야 했고, 약혼자의 탈을 쓴 꽃뱀에게 물린 언니는 몸져누웠으며,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눈 떠도 코 베어 간다는 황성으로 혈혈단신 떠날 사람은 자연히 둘째 아멜리가 되었다.
‘그래서 귀족 지인을 한 사람이라도 만들려고 데뷔탕트도 무도회에도 힘들게 참가한 거고 말이야.’
상대가 대부분 귀족이다 보니 사교계의 지형을 파악하기도 해야 했을 테고.
다만, 코 대신 마음이 많이 베여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날에 남 눈을 피해 훌쩍이는 신세가 되기야 했지만….
‘아주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지. 그날 귀족 명부라는 게 있다는 걸 들어서 채무자들의 인적 사항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거 열람하러 황궁 도서관 온 덕분에 레오폴트랑 재회할 수도 있었고.’
귀족으로서 체면 상할 일이지만, 로즈버리의 상황에 그런 고민은 사치였다.
‘그래도 이젠 레오폴트라는 운명의 연인을 만났으니까. 황성 생활이 고달프지 않도록, 다른 일은 내가 도와주면 훨씬 나아질 거야.’
며칠 뒤, 케인이 가져온 보고는 퍽 내 짐작대로 맞아떨어졌다.
“전하의 혜안이 영험하신 줄이야 알았지만, 깜짝 놀랐네요.”
“아, 이젠 무슨 토템 취급이야?”
케인이 실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로즈버리 남작님께 사기 친 이 하나를 쫓고 있는데, 마침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에서 만나기로 했다지 뭡니까.”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이라면.”
“네, 귀족파 청년들이 요즘 자주 모이는 그곳 말이에요.”
나는 퍽 흡족한 마음으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역시, 거기서 루시페우스를 마주치는 게 맞았구나.
‘남대륙의 낮, 노르타의 밤’. 낮에는 남대륙산 커피를 팔고 밤에는 노르타 산지의 독주를 팔며 종일 장사하는 펍으로, 2구역 변두리 슬럼가에 자리한 곳이었다.
다른 귀족들 눈 피하기 쉽다는 이유로 루시페우스는 그곳을 활동 거점 중 하나로 삼았다.
후일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납치했을 때 레오폴트가 덮치는 곳 중 하나기도 했다.
‘뜨내기 평민들이 자주 오가는 곳이라 꽃뱀 사기꾼이 거기서 만나자고 했나 보네.’
그 꽃뱀 때문에 아멜리가 위기에 처하자 루시페우스가 도와주는데, 어찌 알고 나타났나 했더니 그 펍에서 엿듣고 따라간 모양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랑 가까워질 기회를 최대한 차단해야지. 대신 레오를 투입해주고.’
이때를 위해 레오폴트를 세뇌해 왔는걸.
빚 받아내는 데도, 사기꾼 잡는 데도, 소공작의 권력이 아주 으뜸이니까.
“사랑에는 역경이라는 게 있단다? 그때 가문이 얼마나 유용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도울 수 있어.”
소공작의 권력으로 떼인 돈 받아드리면 그게 일석이조 아니겠어?
나는 속으로 후후 웃으며 케인에게 말했다.
“그게 끝은 아니지?”
“예에…. 선선대 로즈버리 남작님께서 황성 귀족들에게 빌려주시고 못 돌려받으신 빚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분들을 찾아서 상환을 요청하신다고요.”
“혹시 그 가문들 어딘지도 알아?”
“마르크 백작가, 프랑 자작가, 리라 남작가에… 크론, 스털링, 굴덴, 실링, 페니….”
준비된 목록을 듣던 나는 흐뭇하게 미소했다.
‘역시, 죄다 귀족파….’
내 미소를 뭐라 해석했는지, 케인이 멋쩍은 듯 덧붙였다.
“제 아버지 말씀으로는 선선대 남작님께서 아카데미 다니시던 시절에 꽤 친우를 많이 사귀셨다고.”
“퍽 아름다운 우정이네.”
내가 피식 웃자, 케인도 공감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 그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가도 동등한 교우 관계를 맺는 것이 꽤나 어려웠다.
작위로 차별하고, 지방이라 차별하고, 영지가 가난해서 차별하고.
그 모든 콤보를 달성한 로즈버리는 어땠겠는가.
‘선대 남작 때면 지금보단 사정이 나았겠지만, 로즈버리의 탄광이 폐광된 이후로 쇠락한 지 오래됐댔으니까 그때도 가난하긴 했겠지.’
그 해맑은 레오폴트도 아카데미 시절, 지방에서 올라온 학우들에 대한 차별이 있다고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헨리에테.”
“네, 전하.”
집무실 바깥쪽 책상에서 제 일을 보고 있던 헨리에테가 내 부름에 안경을 추켜올렸다.
“방금, 들었어?”
“마르크, 프랑, 리라, 크론, 스털링, 굴덴, 실링, 페니요.”
“응. 여기 재무 상황 좀 조사해 봐. 3소대랑 같이 해도 되고.”
“전하.”
케인이 말리듯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아멜리의 치부라고 할 만한 것이 널리 퍼지는 게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케인. 저 가문들 이름에서 느껴지는 거 없어?”
“…좀 영세하다? 한미하다?”
“말고.”
케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졌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케인 말대로 한미한 가문들이니까.
“다 귀족파고요.”
“응, 게다가 경 말대로 중앙에서 힘 하나도 못 쓰고. 선선대 남작 때면 한 30년, 많으면 50년쯤 전의 일이니까, 그땐 다들 지금보단 사정이 나았다는 공통점도 있네.”
“네, 그중에 리라 남작가와 스털링 백작가는 그사이 파산 신청을 한 이력이 있어요.”
헨리에테가 말을 보탰다.
그녀는 평민 출신인 암조의 기사들이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을 보완해주곤 했다.
사교계 지형이나 각 가문의 역사 같은 것은, 어려서부터 귀족으로 자라난 그녀가 더 빠삭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가문들이 로즈버리처럼 중앙 정치와 거리가 있는 가문에게서 돈을 빌린 걸 보면, 귀족파 내부에서 뒷돈을 주고받았을 수 있어. 로즈버리 말고도 피해자가 있을 수 있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에겐 나만의 근거가 있는 일이었다.
원작이라는 공고한 근거….
“흠, 그렇다면 역시 3소대가 나서야겠네요.”
“내가 말했잖아. 결국 우리 할 일이 될 거라니까.”
내가 간만에 세실리아의 얼굴을 활용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케인은 내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이, 저를 놀리거나 의견을 일축하려는 때인 것을 알아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편은 헨리에테가 수고해주고… 그래서 그 꽃뱀 새…. 흠흠. 그 작자를 잡는 게 우선의 목표래?
“네. 사흘 뒤에 만나기로 했다고 하셨어요.”
“그럼 그 만난다는 자리를 한번 따라가 볼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