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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48화 (48/220)

48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2)

아이고, 두야.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해 오는 것만 같았다.

‘공작 부인의 호감도 하락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껏 레오폴트처럼 다정하고 말 잘 듣는 아들에게 공작가의 그 누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을까.

덕분에 레오폴트는 타인의 말을 꼬아 듣지 못하는 퍽 순한 성정으로 자라났을 거였다.

‘그게 이렇게 발목을 잡나.’

아멜리의 시점에서 ‘공제눈’의 이야기가 진행되었기에 아우렌바흐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정확히 나타난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시댁의 반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은, 단순히 아멜리의 가문이 처져서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레오폴트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던 걸까…?’

그러고 보면 내가 겪은 공작 부인도, 선대 공작 부인도 모두 가문 갖고 차별할 사람 같진 않았으니까.

‘…그쪽의 반응도 내가 도울 수 있겠는걸.’

얘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나는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공작 부인에겐 뭐라고 했는데?”

“예약하신 시간에 대신 좀 가도 되냐고요.”

“왜냐고 안 물으시던?”

“물으셨죠.”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어, 드레스를 맞춰 드리고 싶은 영애가 생겨서 그렇다고요.”

“…솔직하네. 그래서 공작 부인이 뭐래?”

“그러라고요. 아, 어떤 영애인지도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제대로 답했어?”

“그럼요!”

“…….”

사람이, 학문에도 재능이 있고 무술도 수준급이지만 눈치만큼은 이렇게도 없을 수가 있다니.

다시금 나는 레오폴트의 고슬고슬한 금색 머리칼 속에 꽃이 잔뜩 피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걸 몰라서 하하 호호 즐겁게 드레스 구경했겠지.

덕분에 아멜리는 사정도 모르고 공작 부인에게 미운털이 박혔을 테고.

“그럼 공작 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아들이 드디어 짝을 찾았구나…?”

“으응, 그것도 아주 틀린 답은 아니네.”

“그렇죠? 전하께도 얼른 그런 분이 나타나야 할 텐데요!”

“뭐라고…?”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튀어?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 뜨악한 낯으로 레오폴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도 종소리, 들어 보셔야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아주 해사하게 웃는 레오폴트는, 정말 좋은 말씀 전하러 오신 그분들 같았다….

“제가 요즘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한지, 장밋빛 인생이라는 말을 다 이해할 것 같다니까요.”

“그래 보여….”

“얼마 전에는 비번 때, 혹시라도 그분을 마주칠 수 있을까 싶어서 머무시는 댁 근처를 기웃거렸어요. 2구역에도 제게 특별한 공간이 생길 줄이야.”

“기왕이면 약속 잡고 만나지 그랬어? 금쪽같은 휴무일에.”

“그런데 문득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제가 신기해서,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더라니까요.”

“…….”

야, 말 좀 들어라.

“그거 아세요? 사랑에 빠지면 한 사람의 미소에 가슴이 그렇게 두근댈 수가 없어요. 그 사실이 얼마나 멋진지, 전하께서는 아직 모르시죠?”

그러니까, 레오폴트는 내게 무언가 가르칠 날을 별러 왔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작정한 듯 줄줄 내뱉지 않으리라.

‘누가 그런 거 안 겪어본 줄 알아?’

쯧, 나는 혀를 짧게 차고는 헨리에테에게 손짓했다.

헨리에테가 응접탁자에 올린 것은, 레오폴트를 위해 공수해놓은 것이었다.

“열어봐. 선물이야.”

레오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벨벳으로 된 상자를 열었다.

제 생일도 멀었고 기념할 만한 일도 없는데 선물을 받자니 의아할 거였다.

“차…인가요?”

그 안에 들어 있는 양철 캔을 본 레오폴트의 낯에 다시금 물음표가 떠올랐다.

“요즘 영애들 사이에 유행인 찻잎이래. 냉차로 마셔도 좋고 그냥 마셔도 좋다고.”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고구마밭을 구르기 전에, 막 간질간질해질락 말락 할 때 두 사람이 즐겼던 찻잎이었다.

「“세실 전하께서 소개해주신 찻잎인데, 마음이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경께서는 4황녀 전하와 정말 막역하신가 봐요. 애칭으로 부르시는 것을 보면….”」

레오폴트가 물색없이 내 애칭을 입에 올리면 아멜리가 질투를 내비쳐서 서로에게 애칭을 허락하는 그 에피소드가 성사되겠지.

“다음 비번 때는 음습하게 훔쳐보지 말고 그 영애랑 티타임이라도 갖지 그래?”

“전하….”

상자를 양손으로 받잡은 레오폴트의 눈이 울먹울먹 이지러졌다.

내가 말 사이사이에 껴 넣은 가시 따윈 아무려면 좋은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도 꼭 종소리 들으시고 행복하셔야 해요. 제가 뭐든 다 선물해 드릴게요.”

“됐어, 네 님이나 잘 보살펴.”

내 행복은 황실 안에 있는데 뭐래.

그게 지금의 레오폴트에게 최고의 축복인 모양이었다.

「“영애께서 원하신다면 황녀 전하께도 애칭을 삼가시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만간 더 이상 레오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을 듣기를 기대하며 나는 방긋 웃었다.

“도대체 글렌치아 연회 때 어떻게 되신 거예요?”

레오폴트가 근무하러 돌아가고 얼마 뒤, 주간 보고를 위해 내 집무실로 찾아온 엘런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니?”

“전하 혼자 계시다가 게이블스 소후작에 알비누스의 차남이랑….”

“뭐어, 별일 아니었어.”

“별일 아니기는요. 그날 그림자였던 애들이 난리였어요.”

“뭐 그게 난리일 일이야?”

나는 두통에 좋다는 약차를 홀짝이다 말고 억울한 듯 말했다.

눈치 좋은 헨리에테가 레오폴트 때문에 골치 썩이는 나를 위해 내준 차였다.

“두 사람 다 암조에서 주시하는 인물들 아닙니까. 그림자 자율 출동권 좀 주세요. 그러다가 정말 다치셨으면 어떡해요?”

그림자 기사들이 은신하여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도, 호출기 신호가 없으면 나설 수 없는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조금 손쉽게 게이블스 소후작을 사교계에서 퇴출할 수 있었겠지…?”

“알비누스 차남은 또 어쩌고요?”

“그야, 뭐…. 그림자들이 출동했대도, 별수 없지 않았을까?”

알비누스 후작가와 더불어 그에 대해 오래간 조사한 덕에, 그가 이 세계의 최강자 수준이란 것은 암조의 정설이었다.

마탑의 그 어떤 마법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것도, 레베카 수준의 신성력이 아니라면 그의 술식을 파훼할 수 없다는 것도….

“저희에겐 어쨌든 전하의 호위 업무가 우선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포기할 순 없어요.”

으응, 엘런이 많이 컸어, 정말.

그녀의 낯에 담긴 열의가 퍽 흐뭇했다.

여전히 매사에 기본적으로 심드렁하긴 했지만, 나이 먹고 경력이 쌓이면서 책임감이 커진 게 보였다.

“그래도 그… 경이 날 해치러 온 건 아니었잖아.”

“심지어 도와줬다는 말은 저도 들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언제부터 알고 지내신 거예요?”

“으, 응?”

언제부터…라면 말하기가 썩 곤란한데. 공식적으로야 오월제 연회 때부터라고 해야 하나.

“그건 왜?”

“그림자 애들이 보기에 퍽 친근해 보였다고.”

치인그은?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경이 그거 구해준 걸로 뭘 얼마나 또 협박할지 모르는데, 친근은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봐도 고백하는 분위긴데 갑자기 호출기 울려서 애들이 놀랐다던데.”

“에엑, 그날 그림자 누구였어? 페터? 로니? 걔들 요즘 햇빛 좀 못 봤니…?”

“네?”

“무슨 억측이 그래? 그 경은 연모하는 이가 따로 있는걸.”

“그게 무슨…. 어휴, 전하도 또.”

“뭐, 왜, 뭐.”

나와 엘런은 얼마간 서로를 한심해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니, 얘들은 갑자기 무슨 소리람.

루시페우스는 아멜리에게 벌써 반했을 건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아멜리랑 루시페우스라….

‘슬슬 루시페우스가 아멜리 주변 맴돌면서 귀족파 음모도 꾸미기 시작하겠네.’

걔들이 이다음에 마주치는 게 귀족파가 운영하는 펍에서였던가….

“전하, 부르셨어요?”

“응, 경. 편하게 앉아. 오늘은 일 얘기 하자고 부른 거 아니니까.”

케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응접탁자 앞에 앉았다.

“경네 집에서 지내는 그 아가씨. 이번에 황성 처음 올라온 거라며. 재밌게 지내고 있대?”

“뭐, 저한테야 시시콜콜 얘기하시는 법이 없어서요.”

내 물음에, 케인이 멋쩍은 낯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멋쩍음은, 케인이 아멜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일 거였다.

어쨌든 저 때문에 아멜리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조금 곤란해지고 말았으니까.

‘그 덕에 아멜리가 레오폴트랑 만난 거지만, 케인은 그런 건 모를 테고 말이야.’

나는 오늘, 그 죄책감을 활용할 셈이었다. 내가 아멜리를 도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늦은 나이에 굳이 사교계 입성한 걸 보면, 개인적인 목적이 따로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 그런 것까지는 제가 잘….”

케인이 민망한 듯 얼버무렸다.

말은 그리해도, 내 앞에서 무언가를 온전히 숨기기란 힘든 일임을 떠올렸을 거였다.

‘암조 애들이 괜히 나를 예언자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월제 무도회 때 레오폴트랑 안면을 튼 모양이야.”

“그러게요…. 지난번 글렌치아 공작가 연회에 같이 오신 거 보니까요.”

“게다가 알비누스의 둘째랑 연이 생긴 것, 알아?”

“네?”

케인이 깜짝 놀랐다.

“그쪽이랑도 오월제 연회 때 알게 된 모양이야. 내가 그날 후원 산책하다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봤거든.”

“후원에서요?”

“응, 뭐, 머리 식히러 나왔었나 보지.”

케인의 머릿속에 초조함이 스치는 것이 선연했다.

카발리에 없이 데뷔탕트 치르는 영애가 연회장에서 빠져나왔다면 상황이 빤했으니까.

“글렌치아 무도회 때도 알비누스의 둘째가 경네 아가씨에게서 눈을 못 뗐다고도 하고…?”

…원작에 의하면 말이다.

내 말을 들은 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알비누스의 둘째는, 전하와 뭔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엥? 뭐?”

“그날 게이블스 소후작으로부터 전하를 구한 게 그 경이라면서요?”

아니, 얘들이 생사람 잡네?

아무래도 한번 단단히 이야기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우연이었을 뿐이야. 나랑은 그냥 몇 번 마주친 정도라니까?”

“그렇게 치면 저희 아가씨랑도….”

“경. 나 못 믿어?”

케인이 영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결국 내가 옳은 세월이 벌써 10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에.”

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경네 아가씨를 도와주면, 알비누스의 둘째를 감시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전하께서, 저희 아가씨를요?”

“응, 저를 학대했던 양부에게조차 충성하는 걸 보면 꽤나 애정 결핍인 듯한데. 그런 이가 누군가에게 집착한다면 주의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원작에 표현되었으니 비교적 사실에 가깝겠지.

그가 알비누스 후작의 개처럼 구는 데는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케인은 영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 제 상사가, 그것도 황녀가 안면도 없는 제 지인을 돕는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겠지.

“그 집착, 전하께….”

“경.”

“예에, 예에.”

얘들 요즘 왜 이렇게 불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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