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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47화 (47/220)

47화. 여주의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1)

글렌치아의 연회에 다녀오고 첫 업무일.

나는 집무실에 들어찬 선물 더미들에 기가 질렸다.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 예상대로네….’

세실리아 인생 최초로 참석한 사저에서의 연회. 그 행보가 내가 구혼 활동을 개시하겠다는 의미로 비친 모양인지, 다양한 선물 더미가 말 그대로 내 책상을 뒤덮었다.

‘황궁 안에서 사윗감 찾기 어려워서 간 게 아니라, 레오폴트랑 아멜리가 춤추는 거 보러 간 거라고!’

그리 외칠 수가 없어, 나는 그저 썩은 표정만 지을 따름이었다.

“제 선에서 처리하기가 퍽 어려워서요….”

내 불쾌한 기색을 알아차린 헨리에테가 민망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잘했어. 괜찮아.”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지만.

유능한 보좌관 헨리에테는 서신과 선물을 모두 따로 분류해 놓은 참이었다.

“막심 블라우베르? 이 영식, 이제는 청혼이야?”

“아, 아뇨. 유일하게 구혼장이 아닌 것 같아서 제일 위에 놓았어요.”

“그럼 그거 말고는 다 구혼장이라는 거지?”

헨리에테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헛헛한 표정으로 서신 더미 맨 위에 있는 것을 집었다.

막심 블라우베르. 내가 9년 전 전 수확제 연회 때 윌로우 패거리에게 모욕당하고 있는 걸 막아준 그 소년이었다.

‘이제는 청년이지.’

막아 줬다기보다, 하고 싶은 말을 한 것뿐이지만.

헨리에테보다 1년 늦게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내 밑에 들어오겠다고 나섰는데, 아쉽게도 그의 출신이 문제였다.

블라우베르 백작가가 귀족파의 일원이었으니까.

나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그의 편지를 뜯었다.

「이번 글렌치아 공작가의 연회에서 존안을 뵐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전하께서 군부에 부임하신 이후로 일어난 정책상의 변화에 대해 졸견이라도 피력할 기회를 주신다면 영광일 터입니다. 필요하시다면 학자의 탑에 가서 관련된 공부를 하여 훗날 전하의 날개가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학자의 탑에 들어간다는 건 성을 버린다는 뜻이니, 가문에 따라서는 상속권조차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때의 일이 그에게 퍽 감명을 주었는지, 그는 내가 딱히 답을 주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연락해오고 있었다.

‘전략실 행정 직원을 더 뽑아야 하긴 하는데….’

하지만 정말 올해만은, 아주 작은 변수라도 조심해야 했으니까.

‘내가 게이블스 후작과 사이가 안 좋은 걸 알 텐데도 이러는 걸 보면 블라우베르 백작가가 귀족파 주류와 거리를 좀 두나…?’

한편으로는, 충성 인재는 많을수록 좋은 법. 한번 알아보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아래 쌓인 서신들을 건성으로 열어 보았다.

「제게는 혼인 전 사별한 연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저는 어려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제 아들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려서 평민들과 더불어 자라나 계급을 뛰어넘는 사고를 가진…」

“아니, 알테르 소백작이 혼외자였어? 이런 출생의 비밀을 왜 구혼장에 쓰는 거야?”

“전하께서 최근에 발탁하신 인재가 모두, 아무래도 그러니까요.”

헨리에테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어 보였다.

귀족들의 혼외자에 대한 의식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겠다고 일부러 개인 시녀건 프리지어궁 시종이건 혼외자만 등용한 지 6년.

내가 혼인에 뜻이 없다니 아버지도 내 부마를 들이는 데 미온적이어서,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모양이었다.

4황녀의 취향이 혼외자다. 적통 귀족은 데릴사위로 들이기 힘들어 피한다. 뭐 그런….

‘인간관계가 이성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참….’

내 얼굴에 피로감이 스치는 걸 본 헨리에테가 재빨리 말했다.

“그럼 전하, 이 서신들은.”

“응, 버려.”

“선물들은요?”

“적당히 하녀들 나눠주고.”

내가 이렇게 말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헨리에테는 미리 준비해놓은 작은 수레에 포장 뜯은 선물들을 넣었다.

선물로 온 꽃다발 역시 이미 몇 송이씩 나뉘어 포장돼 있었다.

역시 유능한 내 보좌관.

“참, 전하. 이건 발신인이 분명치 않아서 제가 빼놓았는데요….”

헨리에테는 따로 보관해둔 듯한 상자 하나를 내게 건넸다.

한 손에 빠듯하게 들어차는 크기의 나무 상자였다. 흑단에 옻칠로 마감돼 있어 별다른 장식이 없어도 퍽 고급스러워 보였다.

황궁 입구에서 한 번, 프리지어궁에서 여러 번 결계를 통과했을 테니 위험한 물건은 아닐 터.

나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그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카드가 들어 있었다. 정갈하게 말린 보랏빛 델피니움이 아무 문장도 없는 봉랍으로 장식돼 있는 퍽 소박한 카드였다.

그리고 거기 적힌 글씨는….

「그 밤 테라스의 손님으로부터.」

…그 밤? 글렌치아 연회 날?

테라스의 손님?

윌로우 놈일 리는 없으니… 루시페우스?

“헙.”

나는 예상치 못한 발신인의 정체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상자를 놓칠 뻔했다.

“전하, 괜찮으세요?”

“으, 응….”

“누구예요?”

“연회 날 마주쳤던 사람….”

나는 헨리에테에게 중얼거리듯 대답하며,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카드 뒷면을 살폈다.

강박적이리만치 유려한 필기체로 적혀 있는 글귀.

「옛날의 빚은 제 비밀을 앞으로도 혼자서만 알고 계신 것으로 받겠습니다. 이번의 빚을 갚으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부디 이걸 늘 지녀 주시기를.」

이거…?

나는 조금 꺼림칙한 마음으로 상자 안을 쳐다보았다.

마법으로 시들지 않게 해놓았을 것이 분명한 델피니움이 가득 찬 위로 작은 손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딱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위치 추적 마도구…!’

혹시 도청 기능도 있는 거 아냐? 내가 어디 가서 제 비밀 발설하나 확인하려고?

난 그 손거울을 집을까 말까, 손만 움찔대다가 그대로 상자를 탁, 덮었다.

“태워버려.”

“…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헨리에테 쪽으로 상자를 밀었다.

이게 뭔데 굳이 소각을…? 헨리에테는 평소와 다른 처분을 의아해하는 낯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원작에서 세실리아가 언급된 것은 정말 단 두 번뿐이었다.

아멜리가 레오폴트와 처음으로 만나는 오월제 무도회에서 입장하는 나를 두고 사람들이 수군댈 때.

그리고 마음이 깊어진 두 사람의 티타임에서, 레오폴트가 눈치 없이 나를 애칭으로 불러 아멜리가 질투하는 사건이 벌어질 때.

루시페우스와는 정말 단 한 번도 접점이 없었다.

‘루시페우스 설정이 어째 두루뭉술하더라니, 세실리아랑 얽히는 비하인드도 있었던 거야?’

원작은 아멜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니, 서술되지 않은 부분도 당연히 있을 거였다.

‘원작 보고 짐작했던 거랑 다른 점이 많기야 하니까….’

…그렇게 간편하게 생각해 버리기에는, 내가 그와 꽤나 촘촘하게 얽혀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원작에서 설명 안 한 루시페우스 이야기를 친절히 보여주려고 어린 시절부터 얽혔나?’

레오폴트랑은 친구가 되어서, 아멜리 이야기는 원작에 다 나와 있어서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라고…?

‘하긴,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건을 잘 해결하려면 그가 알비누스 후작에게 충성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하긴 해.’

루시페우스의 어린 시절을 몰랐다면 그가 후작의 개처럼 구는 것에 아무런 의구심도 못 느꼈을 테니까.

거기에 어떤 실마리가 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나는 간편히 이 세계관을 납득하고 말았다.

그리고 도움도 받았으니, 그걸 빌미로 직접 떠보면….

‘아, 아냐. 무서워. 안 돼.’

그를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벌벌 떨렸던 것을 돌이켰다.

최대한 안 봐야지.

저런 삿된 물건도, 저의는 몰라도 일단 무시하고 보는 게 상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레 내 손을 잡으려던, 뭔가 간절한 빛이 비치던 그의 낯도 떠올랐다.

‘…뭘 확인하려던 걸까?’

내 손은 왜….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았다.

‘아냐, 아냐. 생각 자체를 말자.’

나는 작게 도리질 쳤다.

그는 아멜리에게 적당히 집착함으로써 레오폴트의 질투심을 유발해,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도록 하는 보조 장치일 뿐.

그의 음모에 대한 일들은 암조에서 고민하면 된다.

‘아멜리에게서 손수건은 돌려받았겠지? 레오폴트가 그거 봤으려나?’

그게 그날 그의 역할 중 제일 중요한 건데.

‘얌전히 자리나 지키고 있다가 그 장면 구경이나 할걸.’

이미 그에게 주목받아 버렸단 것은 잊은 채, 나는 태평하게 그리 생각하고 말았다.

“전하, 듣고 계세요?”

“으응, 그럼. 계속해.”

정말 오랜만이다, 이런 감각은.

첫사랑에 홀딱 빠진 친구의 기승전연애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하는 이 지루함.

‘내가 기대한 건 ‘공제눈’ 속 아우렌바흐 공자님이지, 이 팔불출은 아니었다고…!’

무도회에서 아멜리와 즐겁게 춤을 추고, 그 곁에서 다정하게 갖은 걸 다 챙겨주던 모습.

딱 거기까지는 기대대로였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여성과 가까이 지내본 경험이 부족해서…. 아, 전하께서는 저의 오랜 친우시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이따금 말실수를 하는데, 그때마다 웃어주시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얼마나 다정하고 현명한지, 저는 그분의 외면도 내면도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 기대에, 주말 지나자마자 찾아와서는 미주알고주알 여주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남주의 모습은 없었단 말이다.

하아.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한편으로 내 오랜 친구기도 하니까.’

이런 친구가 어딨어? 바로 앞에서 이 진상 부리는 걸 견뎌주고.

‘내가 전생에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애들이 얼마나 야멸차게 굴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레오폴트를 친구로도, 등장인물로도 좋아하는 셈이었다.

“전하, 듣고 계신 거죠, 네?”

“…아주 입이 귀에 걸렸구나.”

“전하께서 직접 보셨으면 제 마음을 아실 건데요. 같이 인사 오지 말라고 하셔서.”

“그 영애랑 사랑에 빠진 건 내가 아니고 넌데, 내가 왜 네 마음을 알아?”

나의 익숙한 타박에, 그래도 좋다고 레오폴트는 헤실헤실했다.

“글렌치아 연회에 꼭 모셔오고 싶어서 제가 얼마나 마음 졸였다고요. 황성 사교계 첫 시즌이시라니, 좋은 것만 보여드리고 싶어서….”

“흐응, 볼거리가 많긴 하더라.”

레오폴트가 없어도 아멜리는 그 연회에 갔을 테지만, 뭐 꿈보다 해몽이니까.

“급한 일로 올라오시느라 드레스가 별로 없다고 걱정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 부티크 예약을 넘겨받아서….”

눈치 좋게 드레스를 선물해준 걸 보면 레오폴트가 아주 꽃밭까지는….

잠깐. 뭔가 이상한 걸 들은 것 같은데.

“공작 부인의 예약을…?”

그의 말을 되짚는 내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울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내내 그랬듯,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어머니께서 흔쾌히 그러라 하시던걸요.”

내 말의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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