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45화 (45/220)

45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8)

‘게다가 이번에는…. 레오폴트랑 함께 오겠지.’

원래는 그 지긋지긋한 숨바꼭질 끝에 재회하는 것이 바로 이 글렌치아의 무도회에서일 예정이었는데, 내 활약 덕에 오해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케인이 오늘 근무를 서는 걸 보면 케인의 에스코트가 필요 없는 거고. 그렇다면 레오폴트랑….’

후후후, 나는 다시금 케인을 내 수하로 만든 것이 탁월했음에 뿌듯해하며 속으로 웃었다.

“전하, 괜찮으시겠어요? 사람들 많은 곳 숨 막히신다면서.”

“나도 이제 스물둘이야. 괜찮아. 멋진 선생님도 있고.”

“헨리에테도 전하를 모시고 가는 건 처음이니까요.”

“으응, 나 우수한 학생이잖아. 기사도 많이 데려갈 거고. 걱정 마.”

나는 거울을 통해 패티샤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숨이 막히기는.

암조가 수집하는 정보와 헨리에테가 사교계 활동을 대신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귀찮아서 나다니지 않으려고 댔던 핑계였다.

숨은 코르셋 때문에 막히는 거였고.

‘올해는 정말 열심히 다녀야지. 우선 오늘은… 아멜리랑 레오폴트도 구경하고, 수정 광산에 투자하려는 귀족파도 많이 왔을 테니 그들도 감시하고. 좋아.’

나는 결의를 다지며 시녀들의 손길에 머리 손질을 맡겼다.

“세실리아 4황녀 전하 드십니다!”

내가 케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글렌치아 공작저의 연회장에 발을 내딛자, 사교계 일원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내가 성년이 되고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던 바깥 연회에 최초로 참석한 것이니까.

“진짜 4황녀 전하셔!”

“오신다는 게 헛소문이 아니었구먼?”

“무슨 바람이 부셨대…? 우리야 좋지만.”

“전하께서 혼기가 차셔서, 아무래도.”

“바깥에서 뵈니 더욱 아름다운 것 같네요….”

신비주의 막내 황녀에게 사람들의 호의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소리도 끼어들었지만.

벌써 세실 평생 22년째 겪는 일.

나는 태연한 낯으로 내 샤프롱 격인 헨리에테를 따르며, 또 한편으로 케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붉은 융단 길을 걸어갔다.

내 뒤로는 암조의 기사 여덟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는 어릴 때의 과보호가 그대로인 척하면서 암조 기사들을 최대한 많이 대동하기 위함이었다.

“세실리아, 나의 사랑하는 동생아! 드디어 글렌치아의 연회에 다 와주었구나.”

연회장 안쪽에서 손님들과 환담하고 있던 테오도르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편으로 다가왔다.

한때 사교계의 최고 미남으로 선망받던 테오도르에게선 이제 원숙한 미중년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간 잘 지내셨죠? 오월제 연회 때 뵈었지만 말이에요.”

“그럼, 그럼. 우리 세실, 아니, 아니지. 우리 세실리아 전하께서 글렌치아 연회를 밝혀 주시는 때가 다 오는구나. 드레스도 잘 어울리고.”

“오라버니께서 보내주신 건데, 안 어울릴 리가 있나요.”

내가 연회장 한가운데서 테오도르와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이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막히진 않지만, 황실 밖이다 보니 조금 떨리는 건 사실이었다.

‘배우는 쫄아도, 관객은 안 쫄아…!’

십여 년간 되뇐 말을 떠올리며 나는 테오도르를 향해 세실리아의 가장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 드디어 글렌치아에 찾아주셨어요.”

낭랑한 목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테오도르의 부인인 글렌치아 공작이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내 것처럼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민소매 드레스에 모피로 된 숄을 걸쳐 그 부를 과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간 초대를 너무 많이 거절했지?”

“별말씀을요. 글렌치아는 사람 마음을 공략하길 즐긴답니다. 결국 오셨잖아요. 짜릿해.”

글렌치아 공작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고는 슬며시, 내 뒤편의 기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도 늘 사람을 기민하게 훑었다.

“기사님들을 많이 데려와 주셨네요.”

“내 기사들 중에 혼처를 찾는 이들이 많아서 말이야. 분위기를 해친 건 아니지?”

“전하의 기사님들을 보러 온 영애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다다익선이랍니다?”

테오도르의 부인인 글렌치아 공작이 상인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끼리야 암조지만 겉으로는 내 최측근 호위 기사인 그들은, 한때 사교계를 달궜던 ‘막내 전하께서 어려운 처지의 기사 지망생들을 거두신 미담’의 주인공들로서 인기가 좋았으니까.

전생의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들이 생각날 정도로.

‘얘들이 다가 아닌 건 미안해요, 새언니.’

수정 광산을 다량 보유한 글렌치아의 연회에서 귀족파들이 어떤 작당을 벌일지 주의해야 하는 만큼, 연회의 종업원으로 변장하여 잠입한 인원도 더 있었던 것이다.

“부인, 오늘의 첫 춤을 내 누이와 춰도 괜찮겠소?”

“그러세요, 얼마든지. 연회의 시작으로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겠어요.”

글렌치아 공작이 빙긋 웃어 보이고는 악단을 향해 손짓했다.

내가 등장한 뒤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악단이 활을 크게 움직이면서, 첫 춤곡이 시작되었다.

“우리 세실리아 전하, 이 오라비에게 첫 춤의 영광을 줄 수 있겠니?”

“제가 영광이지요, 오라버니.”

나는 테오도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홀로 나가며 내 곁에 있던 호위들에게 눈짓했다.

‘잘 감시해.’

저편에 글렌치아 공작과 밀담을 나누겠답시고 귀족파의 귀족들이 한껏 모여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우리의 주의 대상인 알비누스 후작도 있었다.

테오도르와 느린 박자의 왈츠를 추면서 나는 여유롭게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연인이거나 서로를 연인 후보에 올려놓은 이들이 손과 허리와 어깨를 맞잡고 무도회의 첫 곡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실, 네 단짝을 뺏기고 말았구나?”

“뺏길 게 뭐가 있다고요.”

“아우렌바흐 소공자가 너 아카데미서 다치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아주 황실의 데릴사위로 뼈를 묻을 기세였는데.”

“농담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그때 황성에 계시지도 않으셨으면서.”

“윽, 아픈 곳을 찌르는구나.”

테오도르의 너스레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레오폴트는 정말로, 아멜리와 함께 입장해서는 첫 춤까지 함께 추고 있었다.

그 천사 같은 얼굴에 더없이 행복하다는 미소가 걸려 있었기에, 나는 절로 흐뭇해졌다.

아멜리는 내가 아직 잘 모르지만 어쨌든 미소를 띠고 있으니 기분 좋은 거겠지.

‘오해 풀라고 도서관에서 마주치게 해주기야 했지만, 레오폴트가 잘할지 걱정했는데 잘됐어. 드레스도 레오폴트가 맞춰준 것 같고.’

아멜리는 그녀의 연분홍색 머리칼에 어울리는 진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실루엣이 다른 영애들의 드레스와 비교했을 때 큰 위화감이 없는 게, 최신 유행에 맞춰 새로 지은 드레스인 모양이었다.

원작의 아멜리는 오늘도 옷차림으로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거였는데 말이다.

“저 영애가 저, 동북부 어디 출신이라지 않았어?”

“그렇다고 들었는데…. 왜요?”

“드레스가 크리스티앙 차넬 것 같은데.”

테오도르가 입매를 늘이며 그들 편을 눈짓했다.

전생의 명품 브랜드명을 뒤틀어 섞은 그 이름은 분명 황성에서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신진 디자이너의 이름이었다.

‘연애를 가문으로 하는 거냐던 어린이 어디 갔어?’

레오폴트가 재력과 인맥을 과시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러면 스칼렛은…?’

테오도르와 빙그르르 돌며 주변을 살피니, 목 좋은 곳에 스칼렛이 저를 추종하는 영애들을 거느린 채 서 있었다.

아우렌바흐 소공자를 연모하느라 모든 구혼장을 거절 중이라는 역할에 걸맞게, 표정을 한껏 굳혀둔 채로.

주변의 영애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아멜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들아, 작작 좀 괴롭혀, 응?’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을 보니,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두 남녀를 고깝게 쳐다보는 건 그녀들만이 아니었다.

‘윽. 윌로우 놈.’

스칼렛의 오라비인 윌로우 게이블스 역시 저와 비슷하게 질 낮은 귀족파의 영식 몇몇과 그쪽을 보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소문이 안 좋아 스물일곱에 혼담 하나 제대로 오가는 곳도 없는데, 저런 걸 후계자라고 밀고 있으니.’

나는 속으로 침을 퉤 뱉으며 원작에서 그가 오늘 아멜리를 해코지할 내용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늘 아멜리는 내 덕에 레오폴트와 되도록 붙어 있을 예정이니, 별일 없겠지.

하지만 착실히 악행 포인트를 쌓고 있는 윌로우 놈이라면….

「“너 같은 촌뜨기 영애가 거절하기에는 게이블스의 이름값이 너무 무겁지 않나?”」

어떻게든 그 망할 대사를 읊어버릴까 걱정되는 것이었다.

‘지금 제 앞가림만으로도 버거운 아멜리가 그 말에 얼마나 상처받을 거라고.’

저들끼리 술 한 잔씩 걸치고서 뭐라고 쑥덕대며 낄낄대는 윌로우 패거리를 보며 나는 시름에 잠겼다.

‘레오폴트한테 아멜리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조언할까? 아니면 핑곗거리를 만들어 암조 애를 붙일까? 아니, 계획을 전면 수정해서 아멜리와 안면을 트고 내 곁에 있으라고 할까….’

끙끙 고민하고 있을 때, 익숙한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둥이 살짝 튀어나와 있는 쪽의 벽에 기대어 서서, 얼음 넣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안경 너머로 사교계의 인간 군상을 관망하고 있는 남자.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글렌치아 공작가의 무도회에 모두가 화려하게 차려입은 풍경과 이질적으로, 오늘도 그저 새까만 정장을 입고 있는 훤칠한 남자.

그의 안경에 샹들리에의 찬란한 빛이 어슷하게 비쳤을까.

‘…아.’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찰나가 아니어서, 내게 용건이 있다고 착각할 만큼.

“세실,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라버니.”

나는 당황한 낯을 숨기며 테오도르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응, 좋은 저녁이야, 영애. 아까 나랑 눈 마주쳐놓고 무시하던데.”

“…그게.”

“으응, 배역에 몰입하면 그럴 수도 있지.”

“다 들어요, 전하.”

나는 오늘도 큰 키를 활용해 한껏 화려하게 꾸민 스칼렛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테오도르와 춤을 추고서 홀로 상석에 남았으니 이런 소리도 마음껏 했다.

주변을 한번 살핀 스칼렛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로즈버리 영애를 너무들 싫어해요.”

“영애가 다독여서 될 것도 아니지?”

“짐작하시는 대로요.”

“어쩔 수 없지 뭐. 영애가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너무도 연모하는 탓인걸.”

“…사랑이 죄네요.”

나는 웃으면서 스칼렛을 보냈다. 우리가 남들 다 보는 데서 오래 담소할 사이는 아니니까.

제보야 고맙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아멜리의 최대 고난은 윌로우 놈이니 그녀들은 문제도 아니었다.

‘레오폴트가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윌로우 놈이 들러붙는 거 아냐? 어쩌지….’

괜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를 때, 누가 잡아끌기라도 한 것처럼 내 시선이 가닿는 곳이 있었다.

여전히 혼자 벽에 기대어 선 루시페우스가, 여전히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같은 걸 계속 마시나.’

그런 그의 시선은 아멜리 쪽을 향해 있었다. 어쩌면 그 너머의 알비누스 후작 쪽인 듯도 했지만.

‘알비누스 후작의 호위로 오기야 했겠지만…. 아멜리에게 마음이 간 것도 맞겠지.’

그를 살필 때마다 그의 시선이 그편을 향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앗차.’

다시금 그와 시선이 맞물리고 말았다.

이렇게 눈이 벌써 몇 번 마주치는 건지. 다섯 번은 되는 듯했다.

눈이 마주친다는 건 그도 나를 본다는 소린데….

‘그때도 그렇고, 정말 무슨 용건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난 빨간 눈 정말 모른 척해줄 건데.’

난 의아한 낯으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위가 높아서 좋은 것이 있다면 눈을 피하지 않아도, 궁금한 걸 참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 또한, 나를 지켜보던 걸 감출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사실 그건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혹시 정말 내게 용건이 있어서…? 그렇다면….’

나는 그의 시선을 오래, 깊이 마주한 채 천천히 일어나 위층 테라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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