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7)
나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반응에 쿡쿡 웃었다.
‘당황했나 보네. 스칼렛 놀려먹기도 꽤 재밌단 말이지.’
저 굳은 얼굴을 무섭게 여겼던 게 벌써 12년 전의 일인데, 이젠 저게 당황해서인지, 창피해서인지, 안타까워서인지 구분할 수도 있게 됐다니.
“밖에 덥지 않아? 오월제 지나면 여름이잖아.”
“뭐, 이쯤은요.”
스칼렛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쫀쫀하게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사선으로 가르며 어찌나 잘 고정돼 있는지, 그것부터가 더워 보였다.
‘이런 모습이어야 게이블스에 쓸모가 있다고 훈육돼온 거겠지. 물론 그것이 지금 스칼렛의 경쟁력이긴 하지만.’
나는 마음속에 연민이 피어나는 것을 티 내지 않으며 스칼렛에게 자리를 권했다.
우리가 만날 때면 늘 그렇듯, 서로의 시녀들을 물리고서였다.
“온실이라기에 더울 줄 알았는데, 여긴 또 안 그렇네요.”
“더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입고 왔어?”
“전하 뵈러 가는데 대충 입고 가면 아버지랑 소후작께서 난리 나셔요.”
“…그들의 존재가 난리다, 난리야.”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유리천장에 달린 국부 냉방 마도구를 가리켰다.
“마법 좋다는 게 뭐야. 사람 있을 쪽은 시원하게 해뒀지.”
신성력은 시전자가 있어야만 쓸 수 있지만, 마법은 마도구에 마력만 저장해두면 누구나 쓸 수 있기에 이런 식으로 많이 쓰였다.
‘내가 냉방병에 걸리면 안 되니까 바깥 기온보다 살짝 낮은 정도로만 냉방하는 거지만.’
나는 시녀들이 준비해두고 간 다구를 이용해 차를 냈다.
스칼렛이 좋아하는 달마르사의 찻잎으로 우린 거였다.
“집안에 별일은 없고?”
“뭐, 제가 보기에는요.”
스칼렛은 어깨를 으쓱이며 찻잔에 입을 묻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게이블스 후작이 그녀에게는 집안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체념이기도 했다.
게이블스에게 별일이 없을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스칼렛이 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기꺼워 씨익 웃었다.
‘벌써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6년째네.’
그날 다과회에서 내가 스칼렛을 회유한 일은,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제가 당장 뭘 할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아요. 하지만 전하와 거래하는 게 제가 게이블스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 이후로 스칼렛은 이따금 나를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가 레오폴트를 연모한다는 소문을 부채질하는 데 착실히 도움이 되었다.
게이블스 후작은 나를 그리 원망하면서도, 스칼렛이 나를 사로잡았다며 좋아하는 눈치였고.
하지만 우리의 진짜 관계는 그 누구의 예상과도 다를 거였지만.
“전하께서 온실 자랑을 그리 하셨는데, 드디어 와보네요.”
스칼렛은 차를 마시다 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특히 남대륙의 아열대 지방 나무들을 신기해하는 눈초리였다.
그것이 또 그녀의 칼 같은 예법에서 벗어난 거라, 나는 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볼만하지? 그 지역 경치 즐기면서 차 마시면 좀 더 입체적인 경험이랄까?”
“부모의 총애를 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후작저에 사교계의 명소를 만든다고 하면 기꺼이 해주지 않겠어?”
“집에서까지 사교계의 무슨 역할을 하고 싶진 않네요.”
스칼렛이 피식 웃으며 찻잔에 입을 묻었다.
그건 내가 처음 다과회에서 봤던 것처럼 조형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도, 나를 걱정하며 단단히 굳던 표정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스칼렛은, 내게 마음을 많이 열었다.
어려서부터 진심을 드러내면 유약한 것이라 혼나며 자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지 않고 거래의 형태로 접근한 것이 잘 먹힌 셈이었다.
내가 저에게 바라는 게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는지, 이렇게 허물없이 굴곤 하는 것이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따로 있기야 하지. 너무 소박해서 문제지만.’
나는 스칼렛이 패악을 부리지 않으면 황성 생활이 한결 편해질 아멜리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전하께선 점이라도 볼 줄 아시는 건가요?”
“내 기사들은 예언자라고 하던데, 좀 평가가 짜네.”
스칼렛의 입가로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씀하신 대로 소후작이 또 돌았어요. 며칠 전 개막 연회 때 또 관심을 가진 영애가 생겼나 보던데, 웬 듣도 보도 못한….”
윌로우 놈은 착실하게 악행 포인트를 잘 쌓고 있구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가 레오폴트에게 철벽을 치며 종소리 운운했던 것도, 연회 날 후원에서 루시페우스의 등을 떠밀었던 것도…. 내 나름대로는 원작의 흐름을 존중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윌로우 놈은 원작 설정을 잘 따라가고 있었다.
‘다 좋아. 계속 망나니로 지내면 스칼렛에게 명분이 더 생기겠지. 아멜리한테 이상한 소리만 안 하면 돼.’
그가 아멜리에게 저의 저열한 인성을 반영한 소리를 지껄일 때가 조만간이네….
‘그 소리 못 듣게, 조만간 또 출동해 줘야지.’
그리 다짐하며, 나는 스칼렛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 듣도 보도 못한 영애가 영애의 연적이 될 거야.”
“네?”
“분홍색 머리칼의 로즈버리 남작 영애, 맞지?”
“으음….”
스칼렛의 찌푸린 미간이, 그녀가 저택에서 흘려들은 윌로우의 질 낮은 언행을 되새기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나를 두고도 다른 영식들 앞에서 허튼소리를 했던 걸 보면, 집에선 얼마나 더했겠어?
“네, 분홍 머리.”
“레오폴트가 아주 반했어.”
“역시나. 오월제 연회 날 정신 얻다 팔아먹은 것 같아 보이시더라니.”
스칼렛은 미소뿐 아니라 제가 내어놓고 연모한다 하는 분에 대한 평가 또한 아주 박했다.
“적당한 선에서 괴롭혀. 레오폴트에게 밉보여 봐야 좋을 것 없잖아?”
“괴롭히기는요.”
스칼렛이 입매를 비틀어 씨익 웃었다.
결론적으로 원작 속 스칼렛의 패악은 정말로, 보여 주기식이었다.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연모한다 자처함으로써 후작저로 밀려드는 구혼장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수라마수라에 아우렌바흐보다 나은 혼처는 없으니까.
이는 스칼렛이 게이블스의 저택을 최대한 늦게 떠나기 위한 것이었다.
버티다 보면 윌로우 놈이 제풀에 후계자 자리를 내놓아야 할 만한 실책을 저지르고, 그러면 언젠가 제가 게이블스의 가주가 될 수 있으리라는 계산.
그걸 납득할 제 아버지, 게이블스 후작의 허영심을 잘 노린 계책이었다.
‘후작도 후작이야. 정적 가문에서 제 딸을 받아준다면 항복했다고 기뻐하려고 그러나.’
황실파와 그리 으르렁거리면서도 스칼렛이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연모하는 걸 방치하고, 또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 또한 독려하고 있다.
‘줏대보단 권력 부스러기가 더 중요한가 봐.’
그 전략이 꽤나 기발한 것과 별개로, 그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계속 미혼 상태로 둔답시고 아멜리를 괴롭히면 안 되지.
‘레오폴트야 흑화하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다 긍정적으로 넘기는 애지만.’
그 악행이 지나치면, 어둠 속에서 아멜리를 사모하는 루시페우스가 파벌이고 나발이고 스칼렛을 처단하려 나설 거였다.
‘스칼렛이 결국 유폐되는 데는 루시페우스의 계략이 결정적이었으니까.’
무섭다, 무서워. 파벌도 무시하는 돌은 서브 남주.
“그리고 어차피 아우렌바흐 공작가도 난공불락일 거야. 게이블스만큼이나 로즈버리도 싫을걸?”
“…….”
스칼렛의 무표정한 낯에 음울한 기색이 깃들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스칼렛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모님은, 뭐라셔요?”
“응, 힘내라고.”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렌틸 자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도 확답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내 은사(恩師)로서 황궁에 방문할 때마다 꼭 게이블스의 작태에 대해 한마디씩 얹곤 했다.
‘마음으로는 이미 스칼렛을 돕고 난리 났는데, 아직은 게이블스 후작의 눈을 피할 때라는 거겠지.’
내가 스칼렛을 회유하고 싶고 그에 렌틸 자작을 이용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자작의 얼굴에는 먼발치에서 가끔 바라보기만 했던 저와 같은 처지의 조카딸에 대한 애정이 물씬거렸다.
‘게이블스에 이런 고모가 남아 있었다면 스칼렛이 지금보다는 조금 밝은 애였을 텐데.’
조카딸을 걱정하는 내 오랜 스승을 위해서라도 올해를 잘 넘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명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만났는데 무슨 연구 때문에 바쁜가 봐.”
“저는 도대체 언제 뵐 수 있을까요?”
“올해 게이블스에 풍파가 몰아칠 텐데 키 잘 잡고 있으면 자작이 시험을 통과했다고 칭찬해줄 수도?”
“…뭔가 계획이 또 있으시군요.”
스칼렛의 무표정한 낯이 미세하게 불만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그 호박빛 눈동자에, 내가 렌틸 자작에게서 느끼던 예리한 기운이 스쳤다.
“머지않았어. 가문에서 벌이는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멜리와 레오폴트의 사랑을 돕는 김에 귀족파를 잘 솎아낸다면, 스칼렛도 제 합당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하, 정말로 글렌치아 공작가 연회에 가시게요?”
“못 갈 게 뭐 있어? 내 오라버니가 주최하는 연회인데.”
“그야 그렇지만, 전하께서 사저 연회를 가시는 건 처음이시잖아요.”
“으응, 올해는 좀 다녀보려고.”
아멜리가 왔으니까 말이지.
5월의 두 번째 주말, 느지막이 입궁한 패티샤가 단장 중인 나를 보고 깜짝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껏 황궁 연회를 제외하면 사저 연회는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나였으니까.
“백작님께서 좋아하시겠어요. 그동안 엄청 서운해하셨잖아요.”
포발트 백작, 테오도르가 성년이 되면서 받은 작위였다.
“으응, 말도 마. 오늘 드레스도 오라버니가 보내셨어.”
내 말에 패티샤가 파우더룸 한쪽에 걸린 드레스로 시선을 던졌다.
오래간 내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을 전담한 패티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슴께의 물빛으로 시작하여 치마 끝자락에는 밤하늘의 짙은 먹빛으로 마무리되는 그러데이션 민소매 드레스 위로, 오간자 실크로 투명하게 덧댄 반팔 드레스에 촘촘한 보석 장식이 은하수처럼 박혀 있었다.
누가 봐도 천문학적인 금액일 게 빤한 드레스였다.
아휴, 저걸 입으려면 또 코르셋 조여야 하는데. 상상만 해도 속이 갑갑했다.
“이 비즈는….”
“응, 비즈 아니지. 이번엔 또 서대륙 다이아몬드 광산 조합과 친해졌대.”
“백작님, 자선 재단… 차리신 게 맞죠?”
“나도 늘 궁금하지만, 글렌치아 힘이겠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내가 걸음을 하려는 곳은 제국 최고의 거부, 글렌치아 공작가에서 여는 무도회였다.
오월제 황실 무도회로 황성 사교 시즌이 개막한 뒤 최초로 열리는 무도회였다.
중립파인 글렌치아 공작가는 보유한 수정 광산도 많고 남대륙과의 무역에도 손을 대고 있어서 굉장히 부유했다.
황성 노른자위 땅 너른 부지에 타운하우스를 지어 대규모의 연회를 열 만큼.
그래서 황궁 연회만큼이나 기대를 받는 것이 글렌치아의 무도회였다.
매번 새로운 콘셉트로 꾸려졌으며, 여느 사저의 무도회보다 훨씬 고가의 주류를 내놓았으니까.
덕분에 황성에서 사교 시즌을 보내는 귀족치고 글렌치아의 무도회에 오지 않는 귀족은 없었다.
‘아멜리도 글렌치아 무도회에 온 귀족이 다 온단 소리를 듣고서, 루시페우스에게 손수건을 돌려주러 올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