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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43화 (43/220)

43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6)

입을 연 건 벌써 9년째 알비누스 후작가를 담당하고 있는 1소대장 케인이었다.

“알비누스의 차남, 그러니까 양아들 루시페우스 알비누스가 주재하는 귀족파 청년들의 비밀 회동이 잦아졌습니다.”

오래간 알비누스 후작가를 담당해온 그의 말에, 나는 얼마 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를 떠올렸다.

“동대륙 유학 시절의 행적에 대해서는 새로이 들어온 소식은 없는 거지?”

“예, 그렇죠. 대륙 간 첩보망 정보를 확인해보긴 했는데, 제국인의 행적에 관해 따로 관리한 건 없더군요.”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와 새로이 접촉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확인하고는 있습니다만, 다들 동대륙과는 무관한 인연이긴 합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내가 만년필로 톡톡, 종이를 치기 시작하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내가 걔의 어린 시절을 아예 모르면 몰라. 그렇게 학대받고 있는 듯 없는 듯이 지내던 애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후작을 위해 일을 해….’

그 심리를 안다면 그의 행보를 예측하기도 쉬울 텐데.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가 앞으로 취할 행동과 그 결과뿐이었다.

원작에서는 그의 속내에 관하여 아멜리를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밖에 나타난 바가 없었다.

‘정말 ‘공제눈’ 작가, 루시페우스 설정만 이렇게 희미할 일인가.’

온갖 조연들의 나이는 다 정확하게 설정해놓고 루시페우스 나이는 얼버무려 놓질 않나.

명색이 서브 남준데 그의 심리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결말 본 뒤에야 흑막이어서 일부러 숨겼나, 싶긴 했지만. 덕분에 서브 주식 잡은 독자도 별로 없기야 했는데….’

그 설정이 어찌나 부족했던지, 열 살에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까지 꿈속의 아이가 루시페우스인 줄 상상도 못 했던 걸 생각하니 조금 억울해졌다.

나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밀빵을 뜯으며 물었다.

“알비누스 후작의 움직임은?”

“계속 게이블스 후작에게 알랑대는 중이죠.”

“게이블스는 올해는 무슨 사고를 치려나.”

내가 노래하듯 말하자, 기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게이블스를 비웃었다.

윌로우의 일 이후로 삐딱선을 탄 게이블스 후작가는 매해 새로운 반항을 보여주었다.

제 아들이 황족에게 위해를 가해서 저들이 납작 엎드렸던 건 까먹고, 손해 본 것만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진짜, 해금 첫해에 앤더슨령 포도를 아주 시어 터질 때까지 안 푸는 거 보면서 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작년 대리석 갖고 장난쳐서 대신전 보수 공사 늦춰진 건 또 어떻고요.”

“올해는 대리석 수급이 원활하겠네요. 황실에서 하는 공사가 없으니.”

게이블스의 영지 중에 대리석 생산을 독점하는 에버렛령이 있어서, 황실에 복수하겠답시고 대리석 공급으로 장난질을 치는 것이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비누스 후작이 혹시 새로운 상단에 투자하는 건 없는지 감시하도록 해.”

“알비누스 상단 말고요?”

“거길 통해서는 벌써 몇 번 일을 벌였잖아. 매번 우리한테 들통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질 때 됐어. 저들도 조심할 테니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네.”

케인은 다소 납득하지 못한 양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제대로 일할 것임을 나는 알았다.

십여 년을 같이 일하면서 번번이 내 감이 들어맞는 것을 겪다 보니, 이해는 안 가도 일단 믿는 모양새였다.

‘내가 감이 좋은 게 아니라 몇 가지 일을 미리 아는 것뿐이지만.’

나는 알비누스가 다른 상단들을 통해 마기에 오염된 약초를 유통할 것을 떠올렸다.

“자, 그럼 다음. 2소대.”

“음…. 우선, 리나 경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케인의 맞은편, 그러니까 내 오른편에 앉아 있던 암조의 2소대장 엘런이 말했다. 내가 그녀를 알아온 십여 년간 늘 그랬듯 심드렁한 낯이었다.

그 어조와는 퍽 이질적으로, 회의실에 자리한 기사들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 소득이 있었던 것 같아?”

“자세한 건 귀환하여 직접 말씀드린다고 합니다마는… 접촉에 성공한 듯합니다.”

“잘됐네.”

내가 후후 웃자, 숨죽여 듣고 있던 회의실의 기사들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빨간 눈의 마을’에?”

“리나 경이 대단은 해. 진짜 악바리야.”

“정말 오래 걸렸네요.”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 민가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엘런에게 빨간 눈에 관한 속설을 수소문하라고 시킨 게 벌써 8년 전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아카데미에서 내게 제 빨간 눈을 보여줬을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이렇다 할 목표가 있는 게 아닌 탓에, 매번 후 순위로 밀려 조사가 지지부진하던 차였다.

그런데 최근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조사하다가, 그 근방에 빨간 눈들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어쩌면 빨간 눈이 루시페우스가 악행을 저지르는 동기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나는 꽤나 흡족한 마음이 되어 엘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언제 귀환한대?”

“곧 귀환하겠다면서 보고서를 보낸 게 사흘 전이니, 2주 안엔 황성에 닿겠네요.”

“보고서?”

“…늘 그렇듯, 서고에 보관할 가치가 없는 단어의 나열이긴 합니다.”

엘런이 보고서로 보이는 종이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치고 꽤나 짜증스러운 기색을 얼굴에 띤 채.

그 다혈질 리나가 어찌나 문서 작업과 거리가 먼지를 암조의 모두가 알아, 다들 허허 웃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건에 관해서는, 드디어 마탑에서 연구 결과를 받았다고?”

“예, 지난주에 보고서가 입고됐습니다.”

3소대장 알렉스가 답했다. 어깨를 덮는 군청색 머리칼을 반만 묶은 그는 지능형 무사로, 마탑과 정보 길드 등 외부와의 연락책을 맡고 있었다.

그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한 차였다.

‘공전 주기상 올해는 이중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데, 원작대로면 올해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리는 게 수상했거든.’

연구가 꽤 까다로웠는지, 1년도 더 지난 지금에야 답이 온 것이었다.

내가 보고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회의실 모두가 알렉스의 입에 주목했다.

“…결론적으로, 이론상 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다만 엄청난 마력이 필요한 일이라고요.”

“마탑에서 손댈 가능성은 없겠지?”

“일단 연구 결과를 넙죽 바치기도 했고…. 그들도 대륙이 남아 있어야 그 괴짜 짓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죠.”

“그렇다면 마탑 밖에 있는 사람이니….”

“예, 아마… 그 인물 정도라야.”

“흐응, 역시.”

나는 의자에 깊게 기대어 앉았다. 암조의 기사들도 덩달아 숙연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탑 밖에 있는, 그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지닌 이.

그게 가리키는 인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루시페우스. 역시 그밖에 없지.’

주인공 커플을 찢어놓기 위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따라가서 결국 죽고 마는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들을 괴롭히려고 간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기 위해 간 거였나….

“인간 규격 외의 것이어서 측정이 어려웠고, 동시에 마력이 불안정해 개발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고 합니다.”

아카데미에서 루시페우스를 만나고 몇 년 뒤, 케인이 마탑의 정보통을 간신히 설득해 얻어낸 아주 두루뭉술한 정보.

루시페우스가 마탑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마력이 너무나도 뛰어나서였다.

“…포장은 좋네.”

“네. 결국 본인들 역량 부족이라는 변명이었죠.”

또 어쩌면, 그가 빨간 눈이어서였을 수도….

‘어떻게든 마탑에서 품었어야 했는데. 제멋대로 개발한 술식을 쓰니 대응하기도 힘들어졌어.’

쯧, 내가 혀를 작게 찼을 때였다. 알렉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귀족파에서 정말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인위적으로 열려고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이중 일식 직후에 수정 값이 폭등했던 것 기억하지?”

내가 한 살 때 그레이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추가 지원 다녀온 그해의 일이었다.

수정 값이 어찌나 올랐는지, 그레이스가 에델 공과 혼약을 맺은 데 로젠하르트가 바친 수정 광산이 결정적이었을 정도였으니까.

“요즘 귀족파 가문들 사이에 수정 광산에 투자하는 게 암암리에 유행이라잖아. 알비누스의 차남이 마법을 쓸 수 있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리면 웬만한 귀족 가문에서도 한 명씩은 차출되니…. 단단히 대비해 놓겠다는 소리겠네요.”

“기사가 아니라도 격랑에든, 그 이후의 복구 작업에든 강제 동원이니까 말이죠.”

기사들 중 발언권이 가장 센 케인과 엘런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수정에 신성력을 저장하여 무기로든, 회복용 아티팩트로든 만들어두면 도움이 될 거였다.

내가 레베카의 신성력이 담긴 초커를 달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추측이 맞는다면 알비누스의 차남, 무서운 사람이네요. 생모가 저번 격랑 때 전사했는데요. 기억을 못 하니 그럴 수 있나?”

“오히려 그 공포를 알고 있어서일 수도 있어.”

나는 꿈속에 보았던 에리나 경의 임종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루시페우스가 그때를 기억할 린 없지만….

“하지만 그게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겠죠?”

“뭐어, 그가 왜 후작의 개가 되었는지, 그것만 알면 퍼즐이 좀 맞춰지지 않을까.”

내 말에 수년간 알비누스 후작가를 담당하고 있는 케인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수십 년에 한 번 발생하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은 올해 예외적으로 나타날 예정이고, 원작에는 그 일에 귀족파에서 손을 썼다는 뉘앙스가 있었다.

‘정말 몇 번 읽어야 긴가민가할 정도로 두루뭉술한 암시였어서, 나도 이제야 확인해본 거지.’

그리고 그걸 막는 게, 올해의 내 목표였다.

올해 레오폴트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파견 나갈 순번이고, 아멜리가 거기 따라가면서 원작 최후의 위기가 발생하니까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이는 무엇보다 제국의 평화와 황실의 안녕을 수호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죽는 루시페우스.’

결의를 다지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떠올랐다.

‘루시페우스가 빨간 눈을 지녔고, 빨간 눈의 마을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 있고, 루시페우스만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라….’

지난주 오월제 개막 연회 때 정원에서 마주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빛 아래 창백하게 빛나던 그의 얼굴.

‘아멜리랑 제대로 만났으려나.’

내가 먼저 돌아설 때 그의 얼굴에 비쳤던 감정이, 뭔가 야속함 같은 거였다고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 표정 없는 남자에게서 무얼 읽었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했지만.

‘그리고 나한테 야속해할 게 있을 리도 없고.’

나는 그가 왜 내게 말을 걸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편한 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서 와. 정적 가문 아들을 너무 연모하는 나머지, 그 친구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게이블스 영애.”

“…전하.”

스칼렛의 고운 미간에 여느 때처럼 미세한 주름이 졌다.

오늘도 늘 그렇듯 최선을 다해 꾸미고 온 스칼렛이 내 온실을 찾았다.

서대륙에서 유행한다는 상의와 하의가 따로 나뉜 실용적인 드레스에 제국식으로 프릴과 레이스 잔뜩 단 전위적인 차림새였다.

“오늘도 과하네, 과해. 친우를 만날 땐 그렇게 입는 거 아닌데.”

“제가 친우 만나러 왔나요. 전하 뵈러 왔지.”

“밖에선 나랑 친우인 척한다며, 왜.”

오늘도 곱게 화장한 스칼렛의 얼굴이 매섭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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