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5)
‘안 속였으면 아멜리가 부담스러워서 아우렌바흐 공자님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곤란에 빠진 내 친구의 얼굴을 보는 게 이리 즐거울 데가.
“그래서, 데이트 신청은 했어? 언제 다시 만날 거야?”
“예? 데, 데이트 신청이요?”
“그냥 혼자 좋아하고 말 거야? 만나고, 사랑 고백하고, 뭐 그런 거 아냐?”
“사사사사사사랑 고백이라뇨.”
숨이 넘어갈 듯 말을 더듬는 레오폴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직 그런 것까지는….”
“흐응, 그래.”
원작에서보다 친밀해진 동료들에게서 연애사에 대해 주워들은 게 많아졌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나 보다.
‘전생에 비하면 여기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니까,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그러고 보면 얘들 손잡는 것도 엄청 오래 걸릴 예정이었다.
그래도 반년은 너무 길단다….
“남들이 보기엔 시골에서 뒤늦게 올라온 데뷔탕트 영애가 한몫 잡겠다고 아우렌바흐 소공작에게 꼬리 친 거야.”
“그렇지 않아요!”
“나야 당연히 아닌 걸 알지. 하지만 그 영애는 영문도 모르고 그런 오명을 썼을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 그 친절한 사교계 사람들이?”
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피식 웃었다.
“레오. 너나 내 가족은 우리의 외모가 어떻건, 학식이 어떻건 관계없이 우리를 사랑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
그런 것 같은데요…. 레오폴트가 마음속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걸, 나는 너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영재 설정 있어도 사람 마음 가늠하는 건 확실히 다른 종류의 머리인 모양이었다.
“네가 아우렌바흐여서 배려받는 만큼 어떤 사람은 지위가 낮거나 가문이 한미해서 무시당할 수 있는 거야.”
“혹시, 그래서….”
레오폴트는 조금 진지한 낯이 되었다. 그날 뭔가 심상찮았던 아멜리의 기색에 대해 되짚고 있으리라.
‘울었을 테니 티가 안 났을 리가 없지.’
루시페우스가 빌려준 손수건에 코를 푼 바람에 다음에 세탁해서 돌려주기로 했으니까.
운 바람에 화장도 꽤 망가졌을 테고.
“다음에 만나면 꼭 사과하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네 진심을 보이면서 말이야.”
“…그래야겠네요.”
레오폴트의 낯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래, 습득이 빠르긴 하니 다행이다.
“…그렇게 좋아?”
“데뷔탕트들 중에 맨 마지막에 들어갔던 영앤데….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전하께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나를? 왜?”
“그냥, 전하께서는 저와 가장 가까운 분이시니….”
“일단 용서부터 받고, 나중에 사랑 고백하고 수락받은 뒤에 소개하든가 해. 나한테 아메, 아니, 그 영애를 뭐라고 소개하게?”
“사, 사랑 고백….”
레오폴트는 빨개진 얼굴 그대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늦게 든 바람이 더 무섭다고…. 쯧쯧.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그래도 제가 어디서 머무르시는지 확인해 뒀으니까, 한번 찾아가 봐야겠네요.”
“뒤를 밟았어?”
“설마요!”
내 짓궂은 질문에 레오폴트가 펄쩍 뛰었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어.’
내가 모른 척 호로록 찻잔에 입을 묻자 레오폴트는 아주 새빨개진 낯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연회 마치고 마침 기회가 닿아서 제가 모셔다드렸어요. 일행을 잃으셨다 해서.”
“으응, 잘했네.”
케인 녀석, 결국 원작대로 연회 내내 아멜리를 다시 살피지 못했구나.
말로테 자작 영애가 쓰러졌었다나 뭐라나, 그런 소동에 자리를 비운 케인은 연회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 놓고 나중에 오호홍, 내가 병약해서 영애께 폐를, 가식 떨다가 레오폴트랑 안면 튼 거 보고 눈 뒤집혀서 스칼렛 끄나풀들한테 붙어먹는 애지.’
앞으로 그 애가 케인의 연인이라는 설정으로 아멜리에게 먹일 고구마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걔는 조금만 더 뒀다가, 슬슬 케인에게서도 떼어 내야겠어. 케인이야 제 나이도 있고 저 좋다는 영애 고맙기도 하니 마음을 주려고 노력하고야 있겠지만.’
케인의 공무조차 방해하게 될 예정이어서 말이지.
앞으로 몇 번은 그녀 덕분에 아멜리의 파트너가 없어져야, 레오폴트가 보살필 구실이 생기니 놔두겠지만 말이다.
이번처럼.
‘원래대로라면 3구역 어스름한 데서 헤어지고 서로 오해가 쌓일 일이었지만, 이건 내 덕에 해결됐고.’
아멜리가 3구역 주소를 대니, 귀족이 3구역에 살 리가 없다고 생각한 레오폴트가 저를 거절하기 위해 둘러댄 말로 착각하는 에피소드였다.
레오폴트의 분위기가 얼어붙으니 아멜리는 제가 착각했다며 땅을 파고.
‘케인과 니콜슨 부자에게 2구역 집을 장만해준 나, 칭찬해.’
나는 속으로 세실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상상을 하며 아네트에게 손짓했다.
짙은 금발을 단정하게 땋아 내린 아네트가 두꺼운 책 두 권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레오, 돌아가는 길에 내 심부름 좀 해줘.”
“예, 어떤 일인가요?”
운명의 상대를 만날 날을 점지해 줬다는 감격에, 레오폴트는 내게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굴었다.
“이 책, 내가 얼마 전에 황궁 도서관에서 빌린 건데, 반납 좀 해줘. 나 바로 회의 있어.”
“에이…. 전하께선 제가 예전의 그 레오폴트 아우렌바흐인 줄 아십니까.”
그 쓸개는 제 쓸개가 아니었나 보다….
“아니, 그래서 내 덕에 운명의 상대 만났잖아? 종소리 들리고?”
반역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레오폴트가 내 말을 안 들을 애는 아니지.
성기사단 정복을 차려입은 스물두 살의 아우렌바흐 소공작은 입술을 삐죽이며 책을 집어 들었다.
“참, 후문 말고 정문으로 가. 거기가 지름길이니까.”
“아니, 퇴궁하는 길에 들르려면….”
“정문. 4황녀 전하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서 들어가. 오늘까지 반납이니까 꼭 지금 당장.”
레오폴트는 억울한 낯이 되었다.
「“귀족 명부를 열람하시고 싶으시다고요?”
“네, 저희 가문의 선조께서 은혜를 입으신 분들이 계신데, 연락이 안 되는지라.”
도서관 사서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아멜리는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또, 저런 눈빛이다. 행색으로 상대의 지위를 가늠하려는 눈빛….
황성에 와서 수십 번째 겪은 거였다.
‘나도 안다고, 내 옷이 황성 귀족들에 비교하면 허름한 거.’
아멜리는 기가 질리려는 것을 애써 누른 채, 조심스레 가문의 문장이 박힌 반지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아셨던 거야.’
황실에서 영지와 함께 하사하는, 제국의 귀족 자격을 증명하는 반지였다.
사서는 눈썹을 슬쩍 들썩인 뒤, 그것을 받아 감별 마도구와 감응시켰다.
때로롱.
청아한 알림음과 함께 진품 여부가 판별되자, 사서는 사무적인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영애님.”
우호적인 낯이 된 사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멜리를 안내했다.
‘내가, 어? 우리 영지에서는 어? 완전 사랑받는 둘째 아가씬데 말이야.’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기분이 풀릴 때였을까.
“어머어, 저기 좀 봐요. 그 유우명한 로즈버리 영애네요.”
“어머머, 맞아요. 아우렌바흐 소공자님을 어떻게 홀렸는지, 배웅까지 받았던 그 영애죠?”
“게이블스 영애께서도 단 한 번 손조차 못 잡아본 그분께 가암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로비에 자리한 모든 사람 다 들으라는 건지 그 말투가 사뭇 낭랑히 울렸다.
아멜리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어머머, 못 들은 척하는 거 보세요. 황성 말씨가 아직 익숙하지 않으신가?”
“하기인, 사교계에 가문 명이 변변히 알려지지 못할 정도면, 꽤나 시골 촌구석이겠네요.”
“황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의 영지를 수호하는 아우렌바흐와는 격이 다르죠, 격이.”
…누가 넘보기라도 했대? 아멜리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저는 성기사단 소속의… 레오폴트 경이라고 불러주세요.”
애초에 그 따뜻한 눈동자의 기사님이 그리 귀하신 분인 줄 알았더라면,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벽의 꽃이 되는 창피를 당할지라도 거절했을 거였다.
아멜리는 남들 다 보는 이 자리에서 절대 흘릴 수 없는 분루를 삼켰다.」
‘그때 딱, 레오폴트가 도착하겠지.’
복도를 걸으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황궁 도서관에서 열리는 영애들의 독서 모임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레오폴트를 보낸 거니까.
2주간 치러지는 오월제 기간 동안 오늘이 유일하게 도서관이 여는 날이었다.
귀족 명부를 확인하려는 아멜리가 황궁에 올 날이 오늘뿐이라는 거였다.
‘지금쯤 한창 마음 접으려고 할 때니까, 얼른 만나서 오해 풀게 해야지.’
원작에서 레오폴트가 아멜리의 가짜 주소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생각했다면, 아멜리는 레오폴트가 아우렌바흐 소공작이란 걸 알고서 마음을 접을 예정이었다.
그걸 부추기는 건 자꾸만 그녀를 험담하는 스칼렛의 끄나풀들이었다.
‘레오가 뒤늦게 아멜리를 찾아 헤매지만 주소를 정확히 몰라서 번번이 허탕 치고, 아멜리는 일부러 피해 다니고.’
그 숨바꼭질이 얼마나 스릴 넘치고 답답했던지.
5화에 첫 만남을 가져놓고 그다음에 대화 나누는 게 30화는 됐었지, 아마?
나는 도대체 언제 말 다시 섞나 싶어 오기로 캐시를 지르던 그때를 떠올렸다.
‘오늘 마주쳤으니 오해 풀고 사과하고 마음 잘 잡아놓겠지. 레오 녀석, 아주 싱글벙글이겠네.’
레오폴트가 어리숙한 것과 별개로 아멜리에겐 늘 다정한 공자님이니 걱정 없었다.
나는 다시금 마음속으로 세실리아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응, 그래. 다들 오랜만이야.”
내가 도착한 곳은 수선화궁의 소회의실.
한 달에 한 번 암조 기사들이 모두 모여 정례 회의를 하는 자리였다.
“축제도 못 즐기고 회의 끌려다니느라 고생들이 많아.”
내가 소탈한 주군답게 새초롬히 내뱉은 말에 기사들의 낯이 풀어졌다.
오월제가 열리는 2주간 황성 전역이 들떠 있지만 정례 회의는 빠뜨릴 수 없었다.
오히려 모든 귀족이 황성 사교 시즌의 개막을 즐기기 위해 상경하는 시기인지라, 바쁜 시기 중 하나였다.
“간식 드시면서 하세요.”
내 보좌관 헨리에테가 능숙한 손길로 내 테이블 위로 다기를 차려 주었다.
그리고 작은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밀빵들.
‘이젠 케인한테 빵 심부름 시키면 안 되니까, 성년 되자마자 폴리나네랑 납품 계약을 맺었단 말이지.’
황실의 식사 빵도 풍미가 있지만, 조금 더 짭조름한 이 맛이 내 입에는 더 착 붙었다.
‘그러고 보니 아멜리는 이 맛을 모르겠구나? 케인이 3구역 그 동네에 안 사니까.’
나중에 친해지면 한번 같이 먹어야겠다.
계 탄 덕후가 될 생각에 마음이 흐뭇해져서, 나는 격의 없이 빵을 조금 떼어 물면서 입을 열었다.
“귀족파 동향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지. 알비누스 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