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41화 (41/220)

41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4)

「“저 촌스러운 옷차림 좀 보세요.”

“20년 전에나 간신히 유행했을 디자인 아닌가요?”

“데뷔 시기도 못 맞추니, 유행도 못 맞출 법도 하죠.”

살랑대는 부채 너머에서 까르르 웃던 영애들의 목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다 각오했던 일인데….’

아멜리는 제가 기대어 선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조각된 달의 신에게는, 어린 시절 제 머리를 쓰다듬던 엄마의 푸근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엄마, 엄마. 미안해요.

내가 괜히 욕심부려서 엄마의 유품을 모욕당하게 했어.

“흑….”

또 한 번 울음소리가 새어나갔을 때였다.

“레이디.”

아멜리의 시야에 불쑥, 손수건이 튀어나왔다. 검은 장갑을 낀 손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다.

아멜리는 고개를 들어, 그 손의 주인을 보았다.

차가운 금속 안경테 너머로 무심한 눈동자를 지닌 신사였다.

온통 새까만 옷차림의 그를 밤의 정원에서 보자니 그의 얼굴만이 하얗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까 영애들이 수군대던….’

어느 후작가의 자제라 했던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나, 저와는 생판 다른 이유로 사교계에 첫걸음을 한 이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아멜리는 그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 신사분은 왜 이런 때 여기에 있을까.

갓 황성에 올라온 시골뜨기인 저야 예견된 낭패를 겪은 거라지만.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지금 정원을 거닐고 있는 신사 역시, 저 연회장의 호화로운 불빛에 섞여들 수 없었던 걸까.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었다.

“저는 얼마 전에 황성에 처음 올라와서요. 아직 모든 게 낯설기만 하네요.”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저도 모르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았으리라.

신사의 반듯한 미간에 설핏 실금이 갔다.

달빛 아래 빛나는 그의 창백한 얼굴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었다.

“혹시 제가 외롭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신사가 불쾌함을 표현하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사실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물음표가 빠져 있는 그 말에서 아멜리는 그에 대한 자그마한 연민을 느꼈다.」

─그런 식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훔쳐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루시페우스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나온 것은 맞았고, 그게 연회장 후원 서쪽의 달의 신상 근처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저, ‘공제눈’의 세계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만나는지, 그래서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해피 엔딩으로 끝날 그 원작의 중심 서사가 시작될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와 이리 직접 마주친다는 계산은 없었다.

‘기대하지도 않았고.’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레 그의 인사를 받게 된 당혹감을 누르고, 일단 답을 입에 올렸다.

“으응, 안녕. 반가워.”

그동안 내가 그를 본의 아니게 지켜본 적이 수많았지만…,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루시페우스를 마주하는 건 매번, 그래, 무서웠다.

‘부, 부정맥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심장이 이렇게 벌벌 뛰지 않으리라.

나는 나도 모르게 레베카의 초커를 손에 쥐었다.

안경알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공제눈’을 읽을 때부터 상상해온 그 무감한 다갈색 그 자체였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처럼 어떤 열의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

‘마, 많이 컸네….’

누워 있던 것을 보던 것과 달리, 마주 보고 서니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언젠가 젖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랐던 그 아이는 어느새 길고 넓은 체격을 탄탄히 다진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키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고….

‘그런데, 왜 나한테 말을 걸지?’

나는 몇 년 전 그에게 진 빚이 떠올랐고, 또 몇 년 전 당혹과 분노를 담아내던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카데미에서의 일 때문이겠지? 어렸을 때는 변장 보닛을 썼으니 모를 테니까….’

그러고 보면, 그때 왜 내게 제 눈동자를 보여줬을까.

이따금 생각해 봤지만, 나는 영 딱 들어맞는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잠깐.

‘혹시, 내가 빨간 눈 이야기 소문낼까 봐서?’

입단속을 시키려는 걸까?

다시금 심장이 쿵쾅대는 것 같았다.

그때 일부러 보여줘 놓고 왜….

우선 나는, 뻔뻔하게 나가며 그의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등장인물은 쫄아도, 관객은 안 쫄지.’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뜬 뒤 세실리아의 대외용 얼굴을 만들어냈다.

“혹시, 우리가 구면이던가?”

그에 대해 기억하는 게 없음을 피력하려는 대사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던 건 안 들렸길 바라며….

“아.”

짧게 목소리를 울린 그는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초면…이군요. 인사드립니다. 알비누스 후작의 차남, 루시페우스라 합니다.”

제 이름을 읊조리며, 루시페우스의 눈동자는 내 낯을 가만히 살폈다.

‘응, 맞아. 초면이야. 나 네 눈동자 색 같은 거 몰라….’

하지만 그의 낯에 깃든 기색이 조금… 그리움, 같은 거였을까.

‘설마?’

그 순간만큼은 이 정원의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살펴, 나는 간신히 말을 쥐어짜 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내, 내가 주인공인 줄 알겠네. 착각하면 안 되지. 관객의 자세, 관객의 자세….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를 털어내듯, 나는 명랑한 말투를 지어냈다.

“알비누스에 아들이 또 있는 건 몰랐네.”

“…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오래 유학하여.”

바로 대답을 만들어내지 못한 그 공백에, 어떠한 고민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아카데미에서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애초에 없었던 일로 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내게 무언가를 추궁하려던 걸까.

‘…무슨 소용이야,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은데.’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와의 어떤 인연이나 그의 비밀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야 할 일들이 차곡차곡 일어나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세실리아와 무관하게 앞으로 귀족파의 반사회적인 일들을 수행할 거였다.

이 자리를 빨리 마치기로 결심한 나는 하나 마나 한 대꾸를 입에 올렸다.

“그렇구나. 첫째도 유학 중이라 들었는데.”

“예, 형님…께서 유학 중이신 터라, 제가 아버지…를 모시는 중입니다.”

“후작이 든든하겠어.”

아들이 의지할 만해서 말이야. 그런 말을 혹자들은 덧붙이겠지만.

‘사정 빤히 알면서 후벼 팔 순 없지.’

그리 내 말을 듣고 있던 루시페우스는, 천천히 다시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예, 뭐.”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인데도, 올려다보자니 꽤나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양팔을 아무렇게나 내려둔 그는 아무런 미동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용건이 있는 걸까?’

나는 그와 말을 섞고픈 마음이 없는데.

우연히 그의 어린 시절을 엿보기도 했고 얽힌 일들도 있었지만, 그는 지금부터 내가 번번이 방해해야 할 인물이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묻건 간에 모르쇠로 일관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그를 마주 보았다.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한참을 내 낯만 살피던 그가 무언가 말소리를 빚어낼 무렵이었다.

“흐흑….”

그때, 관목 너머에서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번에 그게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렸다.

‘저 방향에 달의 신상이 있지.’

달빛이 흐르는 조각상을 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울음을 삼키고 있을 아멜리.

처음으로 참석한 황실 연회에 싫증을 느껴 정원을 떠돌던 루시페우스는 그 울음소리에 홀려 아멜리를 발견해야만 했다.

지금 여기 내 앞에 있을 게 아니라.

“가보지 않겠어? 레이디의 슬픔을 나누는 것이 신사의 도리니까.”

나는 턱짓으로 아멜리가 있을 쪽을 가리켜 보이고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얼핏 스친 그의 얼굴에 실금이 가는 듯도 했지만, 거기서 희미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지만…. 어쨌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 착각일 건데, 뭐.’

루시페우스는 나의 악역 구분에 따르면 ‘진짜 악역’.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앞길에 가시밭길을 깔아 주면서도, 그의 어떤 악행은 그들의 사랑을 더 깊게 만들어줄 거니까.

앞으로는 그의 일을 훼방 놓아야겠지만, 지금만큼은 그가 원작의 흐름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정말로 종소리가 울렸다니까요!”

“으응.”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영애와 눈이 마주치는데…. 성기사단 입단식에서 세례를 받을 때보다 더 따스하고 황홀한 빛이 저를 감싸는 것만 같고….”

“으응, 그래.”

하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레오폴트와 친구가 된 지 이제 햇수로 열여섯 해.

열여섯에 혼인하는 귀족들도 있는 만큼 정말 깊은 세월인데, 이 애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 줄은 이제야 알았다.

‘원작 속 아우렌바흐 소공자님은 이렇게 주책스럽지 않았는데 말이야….’

지난주 오월제 연회에서 아멜리를 만난 이후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레오폴트는 내 부름을 받자마자 달려와 이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누가 얘 뒤통수 좀 후려쳐서 기절시켜 줬으면.’

친우가 순리대로 제 사랑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인데, 심지어 그걸 내가 세실 평생 기다려 오기까지 했는데….

삼십 분째 주접을 떨어대는 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전생까지 합치면 두 배로 어른스러운 환생자.

너른 마음으로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선에서 그의 난리를 갈무리하기로 했다.

“그래서 통성명은 했어?”

“예, 로즈버리 남작가의 영애라고 하더군요.”

“로즈버리?”

“동북부의 노르타 산맥 끝자락에 있는 영지인데, 예전에는 탄광이 있어서 유명했죠. 하지만 서대륙으로부터 마도 공학이 도입되어 마도구가 상용화되면서부터는 폐광해서….”

어쩌고저쩌고. 그새 탐문 조사까지 마쳤구먼.

나는 과일차를 적당히 홀짝이며 내가 더 잘 아는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네가 아우렌바흐인 것도 똑바로 말했고?”

“그, 저, 가문이 뭐 대수라고요….”

그러면 그렇지, 아이고 답답아.

“하아, 레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아니, 왜, 왜요?”

“가문을 과시하라는 게 아니라 네가 누군지는 네 입으로 똑바로 밝혔어야지!”

“그냥, 저는 제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지. 그랬지, 그랬어. 내 남주가 그랬지.

레오폴트는 아멜리에게 아우렌바흐 이름을 쏙 뺀 채로 ‘레오폴트 경’이라고만 자기를 소개했고, 덕분에 그 현실적인 아멜리가 레오폴트와 마음껏 어울린 거였다.

‘사랑을 가문으로 하는 거냐던 우리 레오 어디 안 갔지.’

가문 언급 안 하니 평민 출신 기사로 보여서 부담 없이 반할 만도 했다. 아멜리가 옷이 고급인지 저급인지 알아볼 안목도 없고….

‘지금쯤이면 말로테 자작 영애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겠지. 그때 사람들이 저를 두고 심하게 쑥덕대니까 무슨 일인가 싶었을 텐데 말이야.’

바야흐로 대(大)오해 시대의 서막.

어딜 가나 귀족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하니, 아멜리는 설렘보다 속았다는 마음이 커지면서 레오폴트를 피할 결심을 할 거였다.

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레오폴트를 째려보았다.

“아, 왜, 왜 그렇게 보세요….”

“넌 그 영애를 기만한 거야.”

“…….”

레오폴트의 낯이 사뭇 침울해졌다.

사아실, 레오폴트가 그럴 걸 알고 일부러 내버려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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