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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40화 (40/220)

40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3)

희고 가녀린 목 아래서 굽이치는 분홍색 머리칼.

한낮의 햇볕 아래 빛나는 바닷물을 머금은 듯한 선량한 눈동자.

내가 전생에서부터 오래간 상상해온 여주인공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조차 잊을 뻔했다.

‘아멜리야! 내 여주라고…!’

그 아래로 입은 금빛으로 빛나는 아이보리색 드레스. 유행에야 뒤떨어지겠지만, 이 세계의 여주인공께 무엇인들 비루하겠는가.

나는 오늘 수십 번은 벅차오른 가슴이 숨도 못 쉴 만큼 빠듯해지는 걸 간신히 진정했다.

습습 후후, 심호흡.

‘레오도 제대로 와 있나…?’

아니나 다를까, 그 주변을 살피자 아멜리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레오폴트가 있었다.

‘이제 곧 마주치겠지? 어쩜 좋아. 우리 레오, 멋있게 보여야 할 텐데.’

보아하니, 말 잘 듣는 레오폴트는 소공작다운 예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다.

감색에 어두운 금사로 수놓은 재킷, 실크로 된 크라바트, 그리고 깔끔하게 빗어 넘긴 금빛 머리칼까지….

‘내가 준 향수도 뿌렸겠지? 일부러 아멜리의 취향에 맞춘 건데.’

우디 향이었나 쿨워터 향이었나.

원작에 언급된 아멜리의 ‘최애’ 향수인 유명 향수 공방 썽씨블의 6번을 얼마 전 선물로 준 참이었다.

‘한참 뒤에 황성 데이트하다가 사게 되는 거지만, 나 아니면 그 데이트 에필로그에서나 할 텐데.’

에필로그는 연말이나 돼야 하고. 성격 급한 독자에겐 반년도 길었다.

때마침 레오폴트와 눈이 마주쳤다.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웃는 레오폴트의 온화한 미소….

‘저걸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그는 앞으로 내 여자에게만 유독 다정한 남자가 될 거니까.

나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설렘을 숨기며 엘런과 발을 맞추어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섰다.

“전하! 이쪽 봐 주세요!”

“아수라마수라의 요정 만세!”

“사랑해요, 전하!”

아, 역시 세실리아의 미모.

내가 플로어에 내려서자 나를 둘러싼 귀족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지금껏 내가 바깥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신비주의 노선을 고수해온 탓에, 이런 열성분자들이 생기는 것이었다.

“전하도 솔직히 귀찮으시죠?”

“말 걸지 마. 입 모양 읽혀.”

나는 귀찮다는 생각을 미뤄둔 채, 한껏 올린 입꼬리를 박제한 낯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에 가려서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안 보이네. 얼른 단상에 올라야….’

나는 엘런의 손을 잡고서 붉은 융단 길을 지나 황실 직계의 자리로 향했다.

연회장 가장 안쪽, 열 계단 정도 오른 곳에 설치된 단상이었다. 먼저 입장한 부모님과 그레이스의 가족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거기서 엘런과 헤어진 나는 사뿐사뿐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옆자리에 올라서자마자.

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척하며 재빨리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있던 쪽을 살폈다.

‘분명 아까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아!’

아까 멀리서 내게 미소 짓던 레오폴트는, 어느새 그 연분홍색 머리칼의 영애와 나란히 서 있었다.

서로 같은 곳을 향해 있었지만,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 머리가 꽤나 가까워져 있었다.

역시나.

아멜리와 레오폴트는, 만났다.

「“그레이스 황태자 전하와 그 부군 에델 공, 헤르미아나 1황손 전하와 유스티안 2황손 전하 드십니다!”

연회장 뒤편에서 황실 일원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아멜리는 저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틈을 타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꾸깃, 놀림 받던 넓은 레이스 소맷자락을 말아 쥐면서.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워했던 어머니의 드레스를 창피하게 여기는 제가 한심했다.

그 한심함에, 억울함과 슬픔까지 깃들어 아멜리의 마음은 총체적으로 침울해졌다.

“마지막으로 세실리아 4황녀 전하 드십니다!”

“어머, 정말 요정 같으셔라.”

“막내 황녀 전하께서 벌써 정무 회의에 배석하신다죠?”

“어찌나 영명하신지 조만간 중책에 임명되실 것 같다고들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4황녀를 가까이서 보겠답시고 몰려가는 바람에, 뒷걸음질 치던 아멜리는 속절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신발이 또 문제였을까, 일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댈 무렵.

툭.

어깨 뒤에 누군가의 단단한 품이 닿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굽신대던 아멜리의 눈에, 금발 고수머리 미청년의 초록색 눈동자가 들어왔다.

아멜리가 사랑하는 새봄의 여린 잎처럼 따뜻한 녹색의 눈동자….

“괜찮으신가요, 레이디?”

걱정스러운 듯 말하는 그의 얼굴은, 아멜리의 눈에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그 모든 침울했던 마음을 정화해주는 듯이….」

“세실, 오늘따라 과음하는 거 아니니?”

“즐거운 날이잖아요.”

나는 아멜리와 레오폴트가 함께 춤추는 것을 보며 혼자만의 축배를 들었다.

‘이걸 보기 위해 내가 22년을 기다린 거야.’

22년,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는 세월….

두 사람은 벌써 띄엄띄엄 세 번째 춤곡을 함께하고 있었다.

저들을 둘러싼 이들이 질시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모르고, 아주 둘만의 세상에 빠져서.

그들이 내가 기억하는 그 대사를 읊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드디어 만났다.

예정대로 아멜리의 카발리에인 케인이 사라진 덕에, 레오폴트는 아멜리의 데뷔탕트 왈츠부터 함께했다.

‘K로판 클리셰답게 아멜리가 발을 열 번은 밟았댔지.’

영주 딸의 데뷔탕트 무도회까지 못 열 정도로 궁벽한 로즈버리 영지의 사정이니, 이런 연회도 처음일 거였으니까.

게다가 말로테 자작 영애 때문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었고.

그럼에도 레오폴트의 눈은 감동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멀리서도 선연했다.

‘이제 훨훨 날아가렴, 레오야….’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한 낯으로 바라보며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게 벌써 몇 모금이 되었을까.

신성력이 없어서 알코올 분해 능력도 떨어지는 나는, 세실 평생 처음으로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거의 다 비웠다.

‘왕년엔 내가 맥주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는데 말이야.’

나는 자못 알딸딸해져서 광대가 올라붙은 것도 수습하지 못한 채 무도회장만 바라보았다.

“세실, 정말 괜찮은 거니?”

“전 괜찮은데…. 많이 빨개요?”

“밤공기가 선선하니 산책 한번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어머니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씀하시는 게, 확실히 그런 모양이었다.

‘지금 자리를 비워도 될까?’

나는 오늘 일어나야 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았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첫 만남, 혼자 남은 아멜리와 춤을 추는 레오폴트.

‘그리고 나도 아버지랑 테오도르랑 한 번씩 춤췄고. 다과회 영애들도 아까 다 인사하고 갔고.’

비번인 내 기사들은 알아서 잘 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후원에서 아멜리와 루시페우스가 마주치는 장면.’

아멜리가 지금은 저렇게 행복한 얼굴로 춤을 춰도, 레오폴트랑 떨어지는 순간 사람들의 입방아가 귀에 들려올 거였다.

‘남자들 눈에 튀어 보이려고 일부러 촌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왔다느니 뭐라느니….’

비참해진 마음에 후원으로 뛰쳐나갔을 때, 이를 루시페우스가 뒤따르면서 처음 마주칠 예정이었고.

카발리에가 없어졌는데도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인이, 연회장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설움을 삼키는 모습….

꺾이지 않는 밝음과 그 이면의 단단함은, 루시페우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연회장 벽면에 돌출된 기둥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쪽으로 길쭉한 다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알비누스의 둘째가 포착됐습니다.”

내 자리에서 사각지대인 그쪽에 그, 루시페우스가 와 있다고 암조 기사들이 확인해 주었더랬다.

그가 성년이 되고서 황실 연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암조 기사들도 긴장한 상태였다.

‘아, 또.’

내가 그에게 신경을 써서일까. 아까부터 저쪽에서 시선이 느껴지곤 했다.

실상 이 연회장의 모두가 나를 흘끔대긴 했지만….

‘그럼, 두 사람이 제대로 마주치는지 확인할 겸 산책 좀 할까?’

고즈넉하게 조경된 후원에는 달빛 아래 5월의 신록이 청량한 내음을 풍겼다.

‘정말로, 진짜로, 기어코, 아멜리가 레오폴트랑 만나고야 말았어.’

으흐흐, 나는 밤의 어둑함에 힘입어 마음 놓고 온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그뿐이랴, 아멜리를 코앞에서도 봤는데.’

데뷔탕트 영애들이 카발리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 황실 직계들에게 하례할 때, 아멜리도 그 대열에 자리해 있었다.

케인이 기어코 돌아오지 못해 카발리에 없이 등장했지만.

그때를 생각하자니 나는 다시금 감격에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지고하신 대륙의 태양, 신께 축복받으신 보름달의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로즈버리 남작가의 여식, 아멜리라 하옵니다.”

분홍색 머리칼과 푸른색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귀여운 느낌을 자아내는 아멜리의 얼굴을 본 순간….

‘사랑스러움이 인간이라면 바로 아멜리겠지?’

스칼렛이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면, 아멜리는 누구나 가까이하고픈 따스한 매력을 지녔다.

소매가 넓고 금빛 광택이 나는 드레스. 다른 데뷔탕트 영애들의 드레스와 색만 같다뿐이지 촌스러운 그 드레스도 아멜리의 사랑스러움을 가리지 못했다.

평생 사랑받고 자란다면 그런 분위기가 나는 걸까?

그런 매력이 있어서 평생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걸까?

사랑받는 막내 세실리아로 스물두 해를 살았지만, 여전히 거기엔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까 레오 녀석, 가관이었지.’

평소였으면 나와 한 번쯤은 눈을 맞췄을 레오폴트가 아멜리의 뒷모습만 좇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멀어지겠지. 인사도 안 오고 계속 아멜리랑 춤출 타이밍만 재던데.’

조금 허전하려나.

옛 독자로서는 벅찼지만, 친구로서는 조금 시원섭섭하달까.

이 마음이 자식을 떠나보내는 엄마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바스락.

일부러 낸 듯한 발소리와 함께 바로 옆의 관목 모퉁이에서 인기척이 났다.

잘 닦인 구두코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서 이어지는 길쭉한 다리를 완벽한 핏으로 감싸고 있는 바지, 검은색 자카르 공단으로 만들어진 조끼, 칼같이 몸에 달라붙은 재킷.

목 끝의 끝까지 채운 셔츠와 단정하기 그지없는 암적색 타이.

천천히 올라간 내 시선의 끝에 걸린 것은, 금속 테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다갈색 눈동자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술기운으로 달아올랐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긴 머리칼을 목 뒤에서 묶은 그 남자는, 별안간 다리를 성큼 내뻗어 내게 다가왔다.

‘다음에.’

어느 날 아카데미의 후원에서 보았던 소년의 입 모양이, 나를 살피던 빨간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다.

그 빨간 눈의 소년은, 지난해 꿈속에서 보았던 그 남자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있었다.

“…루시페우스.”

그와 초면임도 잊고, 나는 갑작스러운 조우에 절로 그의 이름을 베어 물었다.

다행인지, 그 소리는 바람결에 바스러졌다.

나는 눈조차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 루시페우스는 가슴에 장갑을 낀 손을 올리며, 내게 허리를 굽혔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한없이 낮은, 마음의 끝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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