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1)
온통 밤이었다.
새까만 밤하늘엔 모래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별빛이 빼곡했다.
그 아래, 넓디넓은 초원.
동부의 평원이 이럴까? 아니면 남부의 밀림?
세실의 스물하나 평생, 황성을 나서본 일이 손에 꼽는 내게는 굉장히 생경한 풍경이었다.
황성을 나섰대도 황실의 별장이나, 지난해 성년이 되면서 하사받은 내 영지에 가본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나마도 멀미 때문에 특수 제작한 마차 안에서 괴로워하느라 바깥 풍경을 볼 여유는 없었고.
‘세계 여행을 80년을 해도 될 재력과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이람. 체질이 비판타지여서 세실 인생도 고달프지.’
속으로 자조하며 이 청량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돌아볼 때였다.
사방이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둘러싸여 있는 평원.
마치 배꼽과도 같은 분지의 초원 한중간에, 한 남자가 별빛을 쬐며 누워 있었다.
나는 슬며시 그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장신의 남자였다.
목이 올라온 무명옷부터 그 위에 덧입은 여행자용 튜닉과 망토, 바지, 부츠, 장갑…. 모든 것이 온통 새까맸다.
그의 창백한 얼굴만 빼고.
오랜 여정으로 인해 바랜 그 옷가지는 별빛 아래 회색으로 빛났다.
꿈에서 누군가를 관찰하는 것도 정말 오래된 감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루시페우스를 꿈에서 본 것이….
‘설마.’
그리 생각하며 나는 남자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달빛에 어슴푸레 빛나는 하얀 얼굴,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물들인 듯한 새까만 머리카락.
가슴 위로 모아 쥔 손에는 검은색 장갑이 끼어 있었고, 그 손에는 사각 테의 안경이 꼭 쥐여 있었다.
‘진짜야?’
눈동자 색만 확인하면 좋겠지만….
정말 그가 맞는다면, 꿈에 그가 나타난 건 거의 10년 만이었다.
그가 마탑에서 거부당해 후작저로 돌아와 울고 있었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
‘동대륙으로 유학 갔다고 돼 있었는데. 그럼 여기가 동대륙…?’
3년 전, 그가 열일곱이고 내가 열여덟이던 해. 아카데미를 조기 수료한 루시페우스는 동대륙으로 떠났다.
그것이 무슨 연유인지는 알비누스 내에도 알려지지 않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원작대로의 일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와서 사교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사라는 서술이 나왔으니까.’
대륙 동쪽 오테스트항의 출항 기록으로도 확인한 바였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어, 그의 귀국만을 기다리던 터였는데.
‘덕분에 오테스트항도 계속 주시하느라 케인네 애들이 바쁘지.’
그의 마력으로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바다를 건널 수도 있으니, 알비누스 저택 내부의 동향도 빠짐없이 살피는 와중에 말이다.
내가 지난해 성년이 되면서 제국군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타 대륙에 깔아둔 첩보망을 이 일에 활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 정확한 업무는 군부 내에서도 비밀이었으니까.
한데 그런 그를, 이렇게 보다니.
‘괜히 반갑네.’
나는 평온한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살폈다.
잘 빚은 도자기 같았다.
두드러진 눈썹 뼈 아래로 날카롭게 뻗은 콧날, 그 아래 모양 좋게 꼭 다물린 입술. 숱 많은 눈썹 아래 우아하게 들어간 눈두덩, 그 가장자리를 따라 빼곡한 속눈썹과 어린 날처럼 동그란 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고집스러운 턱선까지.
‘잘 자랐네.’
앞으로 그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일이 있을까?
내가 하려는 일을 하자면, 꽤나 괴롭히게 될 텐데.
나는 슬며시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미간을 슬며시 만졌다.
촉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에게 정말로 가닿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때. 그의 눈꺼풀이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깜짝이야!’
놀라 자빠질 뻔한 나는 손을 거두고 콩닥콩닥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꿈속이어서 정말 자빠질 일은 없었지만.
길게 찢어진 눈꺼풀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렇게 드러난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밤하늘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깊디깊은 그리움이 배어 있는 눈빛….
그 눈가가 일견 촉촉한 듯싶었을까.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한동안 제 몸을 돌보지 않은 듯 바싹 말라 있는 입술은 희었다.
“…그랬구나.”
오래간 목소리를 내지 않은 듯 건조한 말소리였다.
한숨과도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
거기에는 어째선가 회한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다시 1년 뒤, 봄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황궁의 온실.
나는 남국의 우림처럼 만들어놓은 나무들 사이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롱, 포로롱, 쨍한 색깔의 작은 새들이 나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내 휘파람 소리에 따라 내 손에 와서 앉기도 했다.
재작년 내 성인식 때 아버지께서 하사하신 프리지어궁 후원의 온실이었다.
사계절이 명확한 황성에서 보기 힘든 열대의 꽃과 초목이 우거져 있는 곳.
내가 개인적인 손님을 만날 때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프리지어궁에서보다 더 비밀스러운 만남을 위한 곳.
저벅저벅.
숨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익숙한 발소리가 울렸다. 주변의 새들이 파드득 날아갔다.
나는 내 손에 남아 있는 새를 물리지 않은 채, 발소리의 주인공에게 말했다.
“이번 오월제 무도회 준비는 잘하고 있어?”
“…전하, 저 스물둘인데요.”
레오폴트가 헛웃음과 함께 내뱉으며 근처의 티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위라도 하듯이 탁자 위에 던진 그의 건틀렛이 탁, 먹먹한 울림을 냈다.
교대 근무 마치고서 들르랬더니 피곤한 모양이었다.
투박한 성기사단의 정복 위로 여전히 천사 같은 레오폴트의 얼굴.
‘잘 자랐어, 우리 남주.’
레오폴트는 4년 전, 우리가 열여덟일 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 성기사단에 입단해 현재 3소대 부대장으로 승승장구 중이었다.
나는 이상적인 남주인공의 모습을 달성한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말대꾸하면 반역죄로 넣을 거야. 또 그 정복 입고 갈 거 아니지?”
“정복에 훈장 달고 망토 걸치면 예복입니다.”
“그런 거 말고, 좀 소공작 같은 거 입으라고.”
“아니, 제가 아직도 입 헤벌리고 있던 어린앤 줄 아십니까? 저희 어머니께서도 참견 않으시는 걸….”
“레오.”
손을 살짝 흔들어 새를 날려 보내고는, 나는 레오폴트를 내려다보았다.
결단코 한심한 남동생을 바라보는 감정만을 담은 눈빛으로.
“네가 내 말 들어서 잘못된 것 있었니?”
“…그건 아니지요.”
“내가 너를 잘 키운 덕에 성기사단에 수석으로 들어갔고.”
“저를 키운 건 제 부모님이죠?”
“반항기야, 레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레오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온 얼굴로 툴툴거리고 있었다.
‘얘가 이렇게 응석꾸러기인 걸 영애들이 몰라서 그리들 좋아하지.’
어려서부터 신성력을 열심히 갈고닦은 레오폴트는 수석으로 성기사단 입단 시험을 통과했다.
지병을 핑계로 신성력 수련을 게을리한 결과 과락을 간신히 면한 원작 레오폴트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덕분에 성기사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망도 얻었고.’
원래는 곱상한 남자애 무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분 때문에 요직을 얻었다며 성기사단 동료들과 갈등이 있을 거였다.
그 봉합되지 않은 갈등은 ‘공제눈’의 고구마밭에 착실히 이용될 거였고.
게다가 신성력 제어가 부족한 탓에 결정적인 순간에 아멜리를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기까지.
‘하지만 내가 잘 키워서 다 처리해줬지.’
후후후. 나는 레오폴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번 무도회는 좀 신경 쓰고 와. 신성력으로 정화해도 아저씨 냄새 나니까 기왕이면 새 옷 입고.”
“예?”
레오폴트가 팔을 들어 겨드랑이 쪽을 킁킁대는 것 같았다.
…야, 너 남주야.
내 뜨악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레오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요. 이론상 그럴 리가 없는데.”
“좀 공자님답게, 예쁘게 좀 입고 오라고.”
입술을 삐죽대던 레오폴트는 과일 냉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더니, 넌지시 내뱉었다.
“그럼 전하께서 춤춰 주십니까?”
“내가 너랑 춤을 왜 춰?”
“아니, 그럼 제가 뭐 하러 예복을 차려입는단 말이에요?”
레오폴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하이고, 스물둘에 다 커서 저러니…. 뭐, 남주인공의 외모 덕에 나름 보는 맛이야 있다만.
‘요즘 들어 자꾸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한단 말이지.’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하시는 아우렌바흐 소공작께서는 가장 가까운 여성 지인인 내게 가끔 이런 은근한 말소리를 뱉곤 했다.
예전에는 친구로서 집착하는 정도였다면, 요즘엔 어디서 주워들은 수작을 부리는 듯했다.
동료들이나 또래 영식들 다 연애하는데 저는 내가 세뇌한 종소리나 여태껏 기다리고 있는 모태 솔로 신세니 답답할 법도 했다.
뭐, 이런 아슬아슬한 철벽도 그만둘 때가 왔지.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오월제야. 네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때.”
“또 그 말씀이세요? 예전부터 자꾸 종이 치네, 어쩌네….”
“아니, 정말로 이번 연회라고. 믿어봐.”
겉으로는 구시렁대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내심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 스치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껏 레오폴트가 내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일이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일곱 살 때부터 세뇌해온 ‘종소리를 들리게 해주는 진정한 사랑’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얼마 안 있으면, 드디어 레오폴트가 여주인공 아멜리와 첫 만남을 가질 예정이었다.
나는 정말… 레오폴트가 그놈의 종소리를 기다린 것보다 더 오래 더 깊이 고대한 그 순간을 마주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예상하신 대로 알비누스의 둘째도 사교계 활동을 하려나 봅니다. 후작저에 최근 양복사가 드나들었다고요.”
“오월제 연회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는 케인의 짤막한 보고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대륙 초원의 루시페우스를 꿈에서 보고 얼마 뒤, 그가 드디어 오테스트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 이후 귀족파의 젊은 영식들을 규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알비누스 후작도 세를 불리려는 듯 더욱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루시페우스가 귀족파의 해결사로서 활동할 테니, 원작대로의 흐름이었다.
“오월제 연회에 경도 가지?”
“예? 예, 그렇죠.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내가 누군데.”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하긴…. 그래도 저를 발고할 일이 생기시면 미리 귀띔은 해주시는 겁니다?”
“경이 나를 배신할 일도 있어?”
“아직까지는 안 들켰나 보군요.”
케인이 익살스레 웃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 군부에 전략실을 꾸려 들어가면서, 케인을 비롯한 직속 소대 또한 전략실 산하로 이동했다.
‘암조’라는 퍽 비밀스러운 별칭을 달고서.
직속 소대가 하던 일을 발전시켜서 귀족 사회를 감찰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작전을 수행하는 나의 정예 부대, 암조.
사실 이 이름은 공식 명칭도 아니었고, 내가 하는 일 또한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끽해야 돌아올 수 없는 바다 파견 업무를 보조하고 다른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는 일을 하겠거니 하는 정도?
‘내가 어려서부터 키운 기사들을 이렇게 굴리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거야.’
공식적으로는 내 호위 소대가 편제만 옮긴 걸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직속 소대의 대장이었던 케인은 세 소대로 꾸려진 암조의 1소대장이 되었다.
20대 후반의 어엿한 베테랑 기사가 된 케인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 카발리에를 맡게 돼서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모시던 아가씨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