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37화 (37/220)

37화. 악녀를 포섭하는 중입니다 (6)

“지금 제 꿈을 폄하하시는 건가요?”

“그게 영애의 진짜 꿈이야?”

스칼렛은 입을 꼭 다물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채 가장하지 못한 억울함이 깃들었다.

사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되리라 점쳐지는, 아직 앳된 얼굴.

수년 뒤 스칼렛은 결국 ‘공제눈’의 무대에서 주인공 커플에게 패악을 부리다가 파멸을 맞게 된다.

게이블스 후작가는 개인의 일탈이라며 선을 긋고는, 유유히 윌로우에게 후작위를 넘기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고.

‘귀족파의 실세 가문 가주가 윌로우 놈이라니, 아수라마수라를 위해서도 안 될 일이지.’

나는 내가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피력하기 위해서, 오늘의 다과회를 최선을 다해 스칼렛의 취향대로 꾸몄다.

“게이블스 영애요? 여전히 단 한 번도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는데요. 두 학년이나 다르고요.”

“아뇨? 저 아무하고도 춤 안 췄는데요…. 전하께서는 왜 매번 제게 게이블스 영애에 대해 여쭈십니까?”

그리고 내게는 아우렌바흐 소공자에 대한 가장 충실한 정보원, 본인도 큰 도움이 되었다.

레오폴트가 읊은 사정과 엘런의 정보를 취합해보면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스칼렛이 레오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영애가 6년 전, 신년 하례식 때 나를 걱정해줬을 때부터 영애에게 관심이 많았어.”

“걱정…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스칼렛의 미간이 조금 더 좁혀졌다.

그래, 저 흉흉한 기색이 내가 처음 마주한 그녀의 얼굴이었지.

그때는 그것이 적의인 줄 알았지만….

‘표정을 감추는 게 어려운 것뿐이었어.’

지난 3년간 엘런이 힘내준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게이블스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스칼렛을 좋아했다.

마음 따스하고, 총명한 아가씨라고.

그렇지만 애정 한 줌 비치지 않는 가주님께 구박받아 너무 가련한 아가씨라고.

그 아가씨가 제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웃으시지도 못하는 걸 다들 안타까워하면서.

‘같잖은 아들을 차기 가주로 밀려면 잘난 딸을 얼마나 핍박해야 했겠어?’

거기서 버티기 위해서는 제 진심을 감추고 무표정을 고수하는 수밖에 없었을 거였다.

그런 사연이 내게는 아주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전생의 내 부모님도 그랬으니까….’

나는 씁쓸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난 영애에게 꿈이 있다고 생각해. 아우렌바흐 공작 부인이 아니라 다른 꿈 말이야. 그걸 도와주고 싶어.”

“…….”

“가문을 배신하란 것도 아니야. 내가 황실의 일원이긴 하지만,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옵티무스 3세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신하에 불과하잖아? 게이블스와 황녀 사이에 편 가를 게 뭐가 있겠어?”

스칼렛의 얼굴에 심란한 기색이 서렸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한편으로, 가문을 배신한다는 말이 다소 깊이 와닿았으리라.

그녀는 제 눈에 차지 않는 오라비를 차기 가주로 섬길 것을 강요받고 있으니까.

“그저, 우리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교분을 맺는다면 영애의 꿈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는 달마르사의 양철 캔을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 그 안에는 내가 그녀의 마음에 심으려는 씨앗이 담겨 있었다.

“오늘 일을 통해 나와 친분을 쌓으면 아우렌바흐 소공자를 연모한다는 소문에 진정성이 붙을 거야.”

스칼렛은 제 눈앞에 놓인 양철 캔에 시선을 잠시 던졌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까딱임으로써 열어봐도 좋음을 표했다.

내가 건네는 양만 보아도 찻잎이 가득 담긴 것이라기엔 퍽 가벼워 보였을 테니까.

스칼렛이 뚜껑을 열면, 반쯤 차 있는 찻잎 위로 작은 유리병이 보일 거였다.

그 안에 둘둘 말린 종이에, 그녀를 회유하기 위한 대가가 적혀 있었다.

“지금 읽어봐도 좋아.”

스칼렛은 경계하는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 내 낯을 슬쩍 바라보고는 그 안에 든 유리병을 꺼냈다.

꺼내기 쉽도록 종이 끄트머리를 바깥에 걸쳐 놓은 채였다.

그 종이를 꺼내서 펴 본 스칼렛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내가 그녀를 본 일이 손에 꼽지만, 그중 가장 극적인 변화였다.

입이 자그마하게나마 벌어지며 옅게 웃음을 흘리는 그 낯은 일견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게 스칼렛의 진짜 표정인지도….

“그녀를 찾았지?”

“…….”

스칼렛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쉽게 대답할 리가 없지.

하지만 오히려 스칼렛이 아니라고 즉답하지 않았기에, 나는 직속 소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추론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라면 영애를 도울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가 상황만 맞는다면 판에 끼어들리라 확신해.”

스칼렛은 여전히 그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저를 박대하는 후작저에서 세를 일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였을 스칼렛.

그 외로운 소녀가 찾아 헤맸을 것이 자명한 인물의 인적 사항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게이블스 전대 후작에게 후계자로 인정받고 싶어 했으나, 저보다 못난 남동생에게 밀려서 게이블스를 떠난 인물.

스칼렛의 고모.

‘그리고 내 스승, 렌틸 자작.’

야반도주하여 학자의 탑에 들어갔다가 작위를 받아 성까지 바꾸었으니, 자취를 찾기 어려웠을 거였다.

‘내어놓고 찾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나는 스칼렛이 마음을 정리하게끔 얼마간 내버려둔 채, 과일차를 조금 홀짝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스칼렛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잘 꾸며둔 무표정이었지만 그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체 제게 왜 이런 것을…?”

“내가 영애에게 바라는 건 크지 않아.”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지금처럼 귀족 사회 내의 영향력을 키워줘. 가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기만 하면 돼.”

스칼렛의 눈썹이 꿈틀댔다.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절대 영애에게는 흠 될 일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오히려 패악을 떨지 않아도 되니 명예에 도움이 되면 될 거였다.

예전에는 단순히 아멜리만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녀에게 퍽 바라는 게 많아지게 되었지만.

‘한 사람 포섭해서 두 가지 일로 쓰니, 일석이조지 뭐야.’

스칼렛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다정한 마음조차 유약한 것이라 폄하돼온 소녀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거래라는 형식으로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말해줄 수 있는 건 딱 하나야. 영애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을 저지른다면 게이블스는 영애를 돕지 않을 거라는 것. 그게 게이블스를 위해 행한 일일지라도 말이야.”

스칼렛은 아멜리를 괴롭히기 위한 수작이 지나쳐 재판을 받게 되고, 결국 수도원이 유폐되고 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게이블스는 아무런 구명 활동도 하지 않는다.

게이블스의 위세를 떨치는 일에, 오늘처럼 스칼렛을 알차게 활용했으면서 말이다.

‘후계자만 있으면 딸 따위 아무려면 어떻냐는 거겠지. 한심한 족속들.’

곰곰이 생각에 빠진 스칼렛의 낯에 다시금 심란함이 깃들었다.

그리고, 내가 찻잔에 담긴 과일차를 거의 다 마실 때쯤.

“어쩐지….”

응접실에 오고서 한없이 복잡해 보이기만 했던 스칼렛의 표정이, 한결 맑아졌다.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진 바가 없더라니, 일부러 모든 소문을 차단하셨던가 보아요.”

나는 간단히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첩보부에서는 정보 통제가 기본 아니겠어?’

내 근황에 대해 알려진 거라고 해봐야 이따금 6소대의 수련생을 뽑는 게 전부일 거였다.

윌로우와의 일을 처리할 때도, 게이블스 후작 앞에서 소문과 달리 모자라 보이는 인상을 남겼으니까.

스칼렛의 낯에는 미소도, 분노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뿐.

오늘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제시했는지 제대로 이해한 기색이었다.

‘역시 영리한 애야.’

나는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선물은, 우선 감사히 받겠습니다, 전하.”

그 달라진 태도만으로도 나는 스칼렛이 내 제안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내 거래에 응한다면, 언제든 내게 알현 신청을 해. 그때까지 영애의 고모를 포섭해 놓을게.”

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경계하는 방법은, 내 곁에 두는 것이리라.

“결국 제 조카딸을 만나 보셨군요.”

“자작하고 꽤 닮았던데.”

“설마요….”

렌틸 자작이 쓸쓸한 낯으로 웃었다.

안네마리 렌틸. 옛 이름, 안네마리 게이블스.

학자의 탑에 들어간 이들은 진리만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성을 버리고 이름만을 갖고 살아간다고 한다.

렌틸 자작은 스칼렛과 마찬가지로 뒤떨어지는 제 동생과 후계 다툼을 하다가, 도망치듯 학자의 탑에 들어가 게이블스라는 성을 버렸다.

그 기록조차 남은 곳이 없으니, 스칼렛이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학자의 탑에 들어갔대도 가족하고 연락할 수야 있지만, 렌틸 자작은 그 연을 스스로 끊어버린 거니까.’

그리고 학자의 탑에서 인상적인 논문을 발표하여 제국으로부터 렌틸 자작위를 하사받았다.

‘아마 부모님은 자작이 게이블스 출신인 걸 아시고서 황실 교사로 섭외하셨겠지.’

그러고 보면 그녀가 황실파와 귀족파의 갈등, 귀족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딸에 대한 차별 같은 것에 진저리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 점이 현대를 살다 온 나와 통하여 더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녀가 게이블스 출신이란 것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자작이 대단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나는 내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은 채, 자작을 향해 한껏 미소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자작의 얼굴에는 일종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게이블스를 멸문하시려는 게 목적은 아니시죠?”

“황태자 전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게, 귀족파는 황실의 폭정을 견제하는 소금과도 같은 존재라는걸.”

“그렇다면 그 애에게 괜한 꿈을 심어주시는 건 아닐까요?”

그 걱정은, 한 번도 직접 안아본 적 없는 조카딸에 대한 거였다.

자작이 귀족 사회의 권력 구도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서 내게 가르친 걸 생각하면, 그녀가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 할 뿐 관심은 끄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여성이 후계가 되지 못하는 가문들을 비판한 걸 보면, 게이블스에 대한 애정도 남아 있었고.

“나는 좀 더 합당한 이가 가주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합당하기는 정말 합당하지. 윌로우 놈보다 합당하지 못한 인재를 찾기도 어려울 거였다.

나는 내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게 괜한 꿈일까…? 이 능력 좋은 고모가 있는데.”

“…제 소싯적 꿈을 건드리시는군요.”

자작이 빙긋 웃으며 찻잔에 입을 묻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일종의 향수 같은 게 어려 있었다.

지금의 게이블스 후작이 후계자가 된 것이 그들이 10대 때의 일. 그리고 그들이 현재 40대.

스칼렛의 것과 꼭 닮은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 너머로, 30년 전 게이블스 후작저의 풍경이 스치고 있음을 나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작, 나는 궁극적으로는 황태자 전하의 치세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전하께선 늘 제가 드린 가르침보다 더 멀리 바라보시곤 하셨죠.”

“게이블스 영애처럼 딸이라는 이유로 가주 자리를 꿈꾸지 못하는 이들이 없게 되는 세상.”

“황태자 전하께서 헤르미아나 전하를 후계로 정하신다면, 정말 먼일도 아니겠고요.”

아수라마수라 500년 역사에 여자 황제가 나온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두 세대 연속으로 여자가 황제가 된 아직 없었다.

“이 드넓은 제국에서 같은 귀족인데 지방 출신이라고 차별하지 않는 귀족 사회.”

그래서 아멜리처럼 산간벽지에서 상경한 이여도 비웃음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혼외자라거나 빨간 눈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이 없는 세상….”

나는 기실 꿈에서, 저잣거리에서, 수확제 연회에서 보았던 루시페우스의 웅크린 어깨를 오래간 생각해왔다.

그가 ‘공제눈’의 흑막이고, 레오폴트와 적대할 서브 남주라는 것과 별개로… 그와 같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준비하는 일들이 빠짐없이 중요했다.

“그거참, 기대되네요.”

“응, 나도요.”

그 시작은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사랑을 도움으로써, 귀족파의 음모를 저지하는 데서 비롯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