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악녀를 포섭하는 중입니다 (5)
한편으로 나를 그녀와 비교하고 있는 그녀의 추종자들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기도 했다.
‘분명 스칼렛 추종자들은 나를 별로 안 좋아하고 있을 테지….’
아무리 황실 권력이 커도, 그녀들에게는 가까운 사교계의 권력자가 더 중요할 거였다.
나는 내 양옆에 자리한 티 트레이를 가리키며 영애들에게 말했다.
“영애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성내에서 유명하다는 디저트들도 다양하게 준비해 봤으니, 마음껏들 들도록 해요.”
케이커리 델리스의 치즈케이크와 당근케이크, 젠스 베이커리의 마들렌과 까눌레, 르루아의 마카롱 등등….
그걸 보는 스칼렛의 눈에 이채가 스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눈치챘으려나?’
3단짜리 티 트레이에 가득 찬 음식은 모두 스칼렛이 좋아하는 것들이었으니까.
“남대륙에서 공수해온 달마르사의 차도 일품이니, 마음껏들 맛보도록 해요.”
제국의 3대 찻잎 상단 중 하나인 달마르에서 독점적으로 유통하는 남대륙 차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테이블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작약과 그 작약이 장식된 방식, 테이블보와 냅킨의 배색, 찻잔까지….
무엇 하나 스칼렛의 취향에 빠지는 것이 없을 거였다.
나는 슬며시 내 옆에 앉은 헨리에테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잘했어.
별말씀을요.
지난 몇 년간 엘런이 이런저런 경로로 게이블스의 사용인들에게서 빼낸 정보들이 톡톡히 빛을 발한 것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맞이하면 반갑겠지만, 모든 게 제 취향으로만 이루어졌다면….’
나는 스칼렛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비치길 바라며 그 안색을 살폈다.
‘조금 소름 끼치겠지?’
시종일관 그랬듯 도자기처럼 잘 빚어 놓은 얼굴이어서 그 기색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래, 사교계에 데뷔하고 나니 정말 재미가 많아지던가요?”
티푸드를 즐기던 영애들의 손짓이 조금 느려졌을 무렵.
나는 스칼렛과 그 근처의 다른 영애들을 눈짓하면서 말을 열었다.
어렸을 때도 부모님을 따라 황실 연회에야 다닐 수 있었지만,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고 나면 각종 행사에 부모님 없이 초대받고 참석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무엇보다 사교계에 데뷔한다는 것은 구혼 활동을 시작하는 셈이니 분위기도 확실히 다를 거였다.
소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해 누가 먼저 입을 열지 정하는 듯했다.
“얼마 전에는 에멜 후작가에서 무도회를 열었는데요….”
그때, 스칼렛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연한 금발을 양 갈래로 땋아 내렸으니… 리피샤 쿠첼이겠군. 자칭 스칼렛 오른팔.’
쿠첼 백작가의 외동딸인 리피샤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입소문을 퍼뜨리는 데도 재능이 출중했다.
‘지금도 제일 먼저 입 연 거 봐.’
그런 그녀는, 아멜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귀족 사회에 퍼뜨릴 인물이었다.
‘좋은 쪽으로 쓰면 도움이 될 텐데….’
마치 스칼렛의 인기를 설파하려는 지금처럼 말이다.
리피샤가 포문을 열자 화제는 단연코 스칼렛이 되었다.
가문이 가진 위세로나 미모로나, 스칼렛은 이 자리의 참석자뿐 아니라 사교계의 그 누구도 압도했으니까.
원작에서도 스칼렛이 사교계에 데뷔하자마자 사교계의 정점에 올랐다고 서술돼 있기야 했지만, 리피샤의 입으로 듣는 것은 훨씬 생생했다.
“그래서 오렌 자작 영식과 발렌차 백작 영식이 레이디 스칼렛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 측근인 영애들에게 집적대다가….”
“그뿐이겠어요? 이제 사교계에는 이런 속설도 돈다잖아요, 레이디 스칼렛의 간택을 받아야만 연회가 성공한다고.”
“그런데 날아오는 초대장이 한둘이어야지요.”
“레이디 스칼렛이 초대장을 관리하는 시녀를 구한다시면 지원할 영애가 한둘이 아닐걸요? 우선 저부터….”
리피샤의 이야기가 절정에 달하자, 모두가 스칼렛의 인기에 대해 앞다투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모두 스칼렛에 대해 좋은 소리를 못 거들어 안달이었다.
“얼마 전에 익명의 영식으로부터 파란 장미 100송이를 받으셨다죠?”
‘연갈색 머리칼에 청록색 눈동자. 롬멜 백작가의 그레타군. 나중에 아멜리더러 같은 귀족으로서 수치스럽다고 면박을 줄 애고.’
“영애를 뮤즈로 삼아 드레스를 만들겠다고 나선 디자이너가 두 손으로 다 못 꼽는다고 들었어요.”
‘잿빛 머리칼에 보라색 눈동자면, 위테르트 자작가의 안젤라…. 손속이 매서워서 아멜리 돕는 하녀를 매타작하지.’
나는 스칼렛을 찬미하는 소녀들의 면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직속 소대가 물어다 준 정보 덕에 누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가까이서 살피는 건 처음이었다.
‘저 끄트머리의 노랑 모자는 글렌치아의 방계고, 보라색 리본을 단 애는 아우렌바흐 방계….’
스칼렛의 무리에는 귀족파의 영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따금 아카데미에서 같이 수학한 중립파의 영애들도 끼어 있었다.
‘거기다 황실파의 영애들도 거리낌 없이 함께 다과회에 다닐 정도로 호의적인 분위기라.’
과연, 같은 귀족파 사이에서도 ‘개새끼’라 불리는 윌로우 놈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영애가 하나같이 스칼렛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다들 그쯤 하지요.”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린 듯, 스칼렛이 나지막이 목소리를 울렸다.
여태 떠들던 것이 스칼렛의 말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는지, 영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오늘 다과회의 주인공은 4황녀 전하신데, 너무들 제 이야기만 하시니 쑥스럽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스칼렛의 입꼬리가, 그린 듯이 올라갔다.
나는 스칼렛의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저엉말 예쁘다. 다들 얘를 일단 좋아할 수밖에 없겠어.’
열 살의 신년 하례식 때 나를 노려보던 그 흉흉한 기색도, 황실 행사에서 인사를 주고받을 때마다 느껴지던 냉랭함도 없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미소였다.
‘그때 정말 나를 싫어해서였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내가 다양한 경로로 모은 정보는, 그녀가 나를 싫어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불어 한편으로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차라리 걱정인지 불쾌인지 모를 이유로 한껏 찌푸렸던 그 얼굴이 인간적이랄까?
‘몸가짐만 봐도 피나는 노력을 한 애니까 표정 관리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내가 스칼렛의 완벽한 자태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게이블스 영애께선….”
“그쵸, 영식들이 아무리 그래 봐야….”
“맞아요, 호호.”
스칼렛의 겸손이 무슨 뉘앙스를 띠는지 알아챈 영애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한편으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의뭉스러운 웃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알았다.
‘내가 레오폴트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면 얘들이 안 이럴 텐데.’
스칼렛은 사교계에 데뷔하여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동시에, 이미 레오폴트를 연모한다고 흘리고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의 소녀들은 황녀인 나를 어려워하면서도, 내가 스칼렛의 연적이라 생각해 경계하고 있는 거였다.
‘윌로우의 일로 게이블스에 타격을 입힌 것도 있고 말이지.’
뭐, 마침 이런 반응이 오기를 기대한 차였다.
‘이럴 줄 알고 옷도 수수하게 입었고.’
웃는 낯에는 침 못 뱉는다는 전생의 격언을 떠올려, 나는 세실리아의 미모를 활용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의 수수한 옷차림 덕에 무해하고도 순수한 미소로 비치리라.
“그래요? 게이블스 영애는 따로 마음에 둔 이가 있나요?”
최고의 미끼는, 여기에 무슨 술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할 묵직한 돌직구.
스칼렛의 그림 같은 미소에 실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계속하여 해맑은 미소를 지어내며 덧붙였다.
“그가 저와 절친한 영식이라면 제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고….”
결단코, 사교계 내에서 4황녀와 개인적인 교분이 있는 영식이라면 아우렌바흐의 레오폴트뿐이었다.
스물에 달하는 손님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스칼렛의 눈초리가 기민하게 내 얼굴에 들러붙었다. 내 낯에 떠오른 기색을 판별하려는 듯이.
순진한 척 포장해 두었지만 내가 사실은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뉘앙스에서, 그녀는 이 자리를 둘러싼 모든 위화감을 눈치챈 듯했다.
‘물어라, 물어.’
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전력으로 가동해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게이블스 영애. 달마르의 찻잎은 입에 좀 맞나요? 여기에 바닐라와 오렌지 향을 더한 것도 풍미가 좋던데. 혹시 괜찮다면 따로 선물해도 될까요?”
스칼렛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달마르의 차에 바닐라와 오렌지를 가향한 것.
스칼렛이 혼자서 다과를 즐길 때면 습관처럼 마시는 차였다.
“꽤… 좋은 취향을 갖고 계시네요.”
스칼렛이 간신히 답을 내었다.
거기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좌중의 소녀들은 모두 숨죽였다.
‘내가 스칼렛과 친해지고자 하는 티를 냈고, 스칼렛이 불쾌해하는 걸로 보이겠지.’
이 일이 리피샤 같은 애들의 입에 어떤 식으로 오르내릴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 진짜 목적과는 무관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스칼렛이 레오폴트를 연모한다는 소문을 부채질하리라는 것도.
다른 영애들이 돌아간 늦은 오후 시간.
스칼렛은 찻잎을 선물받는다는 구실로 프리지어궁의 내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스칼렛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녀와 따로 만나보고 싶었지만, 윌로우 때문에 게이블스와 사이가 틀어진 터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무의미한 경계를 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일부러 스칼렛이 레오폴트를 연모한다는 소문이 나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도 번거롭게 다과회도 열었고.
게이블스 후작가에 괜한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내가 지난번에 후작을 만났을 때 한껏 어리숙한 척을 해놔서 나를 경계하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나는 내 왼편에 앉은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잘 꾸며둔 무표정에 고아한 몸가짐으로 앉아 있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긴장했겠지. 내가 무슨 의도인지 모르니까.’
찻잔 너머로 그녀를 살피던 나는 살포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치 카페인을 다과회에서 홍차로 다 마신 터라 거기에 담긴 건 과일차였다. 그 찻물의 빛깔을 관찰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영애가 내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생각해.”
“제가 아둔하여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잘….”
“그냥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것 말이야. 알고도 오라비를 단속하지 못했다든가.”
“…….”
나는 나와 단둘이 있게 된 뒤로 단 한 순간도 풀어지지 않았던 스칼렛의 단단한 얼굴을 살폈다.
스칼렛은 제 찻잔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과회 때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것과는 판이했다.
“나는 영애가 나를 가문의 원수로 여기지 않는다고도 생각하고.”
“어찌 은사를 지신 분을 원수로 여기겠습니까.”
“글쎄, 그대의 오라비와 아비는 어떤지 모르지. 황제의 어리석은 막내딸이 감히 게이블스 후작 부인 자리도 걷어차고 참 거슬리더라, 그런 정도일까?”
스칼렛의 표정이 더 딱딱해졌다.
잘은 금이 가 있는 미간 너머로 수치심과 억울함이 피어오르고 있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윌로우 놈의 일로 인해 게이블스가 여전히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고, 그에 대해 게이블스 후작이 앙심을 품고 있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게 스칼렛의 일은 아닐 거였다.
무엇보다 스칼렛은 윌로우의 잘못을 너무나 잘 알았고.
“영애가 나를 질투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해.”
그녀의 낯에 작은 의문이 떠올라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아우렌바흐 소공자에 대해서 말이야.”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칼렛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다과회의 상차림이 제 취향대로 차려진 것을 봤을 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솟아났던 경계심이 극에 달했으리라.
“영애는 아우렌바흐 소공자를 잘 몰라. 내가 영애의 이상형은 몰라도, 영애가 정말 아우렌바흐 공작 부인이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건 확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