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34화 (34/220)

34화. 악녀를 포섭하는 중입니다 (3)

“공. 앤더슨령의 포도로 게이블스 양조장에서 만든 포도주를 최고급으로들 치지?”

“네, 네, 맞습니다, 전하.”

내가 온유하게 구는 것으로 착각한 게이블스 후작이 내게 살가운 낯을 지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앤더슨령의 포도를 황실 양조장에 절충된 가격으로 독점 납품하면 어떨까요? 포도 수가가 떨어져서 타격이 클 테니 게이블스 영식이 교훈도 얻고, 황실 양조장에 독점으로 공급하니 영광 아니겠어요?”

내가 천진하게 눈망울을 빛내며 하는 말에 후작은 다시금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게이블스에게 황실 양조장 독점 납품이 무슨 영예겠어? 자기들 양조장에서 포도주 빚어서 비싸게 파는 게 이득이지.’

하지만 내 말이 모조리 게이블스를 위하는 척이라 죄인의 아비로서 그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 5년간 에버렛령의 포도를 황실 양조장에서 원가에 독점 매수하면 되겠구나.”

“네, 마침 황실에 양조장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 양조장 규모가 저희 포도를 다 소화하기에는 다소 작은 걸로….”

“어머, 후작. 에버렛령의 포도가 다른 곳도 아닌 황실에 납품되는 거네. 얼마나 큰 영광인가?”

나의 세상 물정 모르는 연기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어, 게이블스 후작은 패배감만 맛봤다.

“그래, 마음 같아서는 게이블스 영식의 황궁 출입을 평생 금지하고 싶지만, 게이블스의 후계자니 어쩔 수 없지.”

후작은 마음속으로는 차라리 윌로우의 금족령을 30년 내려도 좋으니 에버렛령만은 건들지 말기를 바라고 있을 거였다.

‘아까 제가 후계자 운운해서 뭐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야.’

그것만으로도 고소했지만, 내게 계산이 하나 더 있지.

“아 참.”

내 말소리에, 후작이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올해 포도는 이미 수확이 끝났지? 올해 작황이 아주 좋았다고 들었네.”

“예, 이미 수확해서, 양조까지 마쳤지요….”

게이블스 후작의 낯에 다시 식은땀이 흘렀다.

또 뭘 뜯어가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한창 포도주 숙성 중인데 그거 내놓으라고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선했다.

“그럼 올해는 어쩔 수 없고 내년부터. 어떤가?”

“황녀 전하께서 그리 생각해 주시니, 제 아들놈도 큰 깨달음을 얻을 겁니다….”

조삼모사이긴 했지만, 한창 숙성 중인 근래 최고의 포도주를 바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거였다.

“아버지, 그럼 올해는 소소하게, 세금을 조금 더 내는 걸로 어떨까요? 포도줏값에 비하면 헐값이겠지만, 당장에 아무런 처벌도 없으면 황실의 위신이, 아무래도….”

“그래, 맞는 말이다. 게다가 황녀를 감히 후작 부인으로 삼겠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지?”

“그, 그것이….”

나와 아버지의 잘 짜인 연극에 어떻게든 끼어들려던 게이블스 후작은 입술만 깨물었다.

윌로우 놈이 그리 말하고 다닌 데는 분명 후작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을 거였으니까.

“아비의 마음으로는 에버렛령을 몰수하고 벌금을 크게 매기고 싶다만, 황녀의 마음이 이토록 어지니 내 여기서 참겠다.”

“감사해요, 아버지! 비록 그의 죄가 크나 죗값을 온전히 치르게 했다면 제가 미안함에 잠 못 이뤘을 것 같아요.”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겠느냐. 그렇지, 공?”

“예, 예에….”

“이 정도면, 공의 영식에게 큰 교훈이 되겠나?”

“그, 그럴 것 같습니다….”

후작은 정말이지 잔뜩 체념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니 참 다행이네.”

나는 진심으로 해맑게 웃었다.

윌로우 사건의 여파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하, 오늘 어전 회의 때 폐하께서 게이블스 후작 영식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들으셨어요?”

“뭐라고 하셨는데?”

“게이블스 영식과 4황녀 간의 혼담은 황실의 명예를 걸고 결단코 이루어질 일 없다고 못 박으셨대요.”

오오, 우리 아버지 단호하시네.

나는 견과류와 녹색 채소가 잔뜩 들어간 밀크셰이크를 마시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처벌은 처벌, 해명은 해명.

내년에 윌로우 놈의 금족령이 풀리더라도 헛소리하는 일은 없겠지.

‘이 영양소 폭탄도 달다, 달아.’

아카데미 역시 아버지의 질책을 피할 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마기에 잠식된 야생동물을 신고하지 않고 사육한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학생들이 신성력 운용과 전투 기술을 익히게 하기 위한 수업 교보재로 썼다지만 말이다.

“저를 전하에게서 떼어놓으라며 게이블스 영식이 겁박했다고 겔프 영식이 증언했어요.”

“사육장 자물쇠를 부수라고?”

“…예에.”

곧바로 내게 상황을 보고하러 온 레오폴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기세 좋게 나를 아카데미에 초대해놓고 이런 일이 생겨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럼 사육장은 다 폐쇄됐어?”

“아뇨, 학습용으로 필요하긴 하다고 판단했는지, 사육장 우리를 훨씬 더 견고한 것으로 바꿨어요.”

“…사육장을 또 부숴 먹을 멍청이가 나오려고?”

“아카데미로서는 황실에 체면이 말도 아니었으니까요. 뭐라도 했어야죠.”

레오폴트가 난처한 듯 웃었다. 침 흘리며 헤실대던 레오폴트가 이제 이런 정치적인 표정도 짓게 되었구나….

‘키만 큰 건 아니었네.’

이토록 가끔씩 공작가 후계자다운 순간을 비칠 때마다, 나는 다시금 수년 뒤 ‘공제눈’ 속 공자님의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흐뭇한 눈으로 그의 낯에서 청년의 기미를 찾을 때였다.

“아 참, 게이블스 영식요.”

…얘가 내 흐뭇한 마음에 산통을 깨네.

내가 미간을 좁히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자, 레오폴트가 다시금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에서 정학을 내리려고 했어요.”

“이미 유급했다며?”

“그러니 엄청난 불명예죠. 그런데….”

“그런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바로 후작저로 돌아가고서는 휴학계를 냈더라는 거예요.”

“정학 먹기 싫어서?”

“아뇨, 그다음 날 바로 서신이 왔대요. 와병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역시 그가 아프다던 후작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구나.

‘…혹시.’

나는 마법에 당해 몸을 못 가누며 낑낑대다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그의 신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소년의 빨간 눈동자도.

‘루시페우스에게 졸지에 고마워할 일이 생겼네.’

그가 앓아누운 일이,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쓴 일과 연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게이블스 후작가에 대해 지시하셨던 사항은, 어떻게 할까요?”

게이블스 후작가가 큰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며칠 사이에 황성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달이 난 날이 마침 내가 추가 지시를 내린 날임을 눈치챈 엘런이 넌지시 물어왔다.

상황이 종료됐으니 임무도 종료인가 싶어서일 거였다.

‘사용인들 사이의 여론까지 파악하는 건 아무래도 품이 너무 많이 드니 귀찮겠지.’

그녀의 심드렁한 얼굴에 미미한 희망이 깃들어 있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인걸.’

게이블스 후작가가 처벌을 받은 것은 잘된 일이었다.

몇 학점 남지 않은 아카데미조차 휴학할 정도로 윌로우가 당했다는 것 역시, 쌤통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윌로우가 개과천선할 리는 없었다.

‘그나마 나는 황녀니까 괜찮았지, 몇 년 뒤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비뚤어질 텐데.’

이번의 처벌은 게이블스의 재산에 일시적인 손해만 끼쳤을 뿐, 그에게 별 교훈을 줬을 리가 없었다.

‘이 정도론 황실만 진정시켰지, 내 복수는 시작도 안 했다고.’

나는 경쾌하게 말했다.

“아냐, 별개의 일이야. 시일이 오래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진행해.”

순간 엘런의 낯에 깃들었던 희망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인사해 보이고는 방을 나서는 그녀의 포니테일이 평소보다 더 추욱 처진 것 같았다.

‘잘할 거면서 꼭 저래.’

윌로우 게이블스는 어떻게 해서든, 귀족 사회에서 최대한 밀어내는 편이 나았다.

윌로우가 나중에 아멜리에게 집적대지 않도록, 그 치 떨리는 대사들을 입 밖에도 내뱉지 못하도록 말이다.

“세실, 집무실은 마음에 드느냐?”

“그럼요, 언니. 정말 감사해요!”

윌로우 게이블스의 일이 있고서 1년 반 뒤 초봄, 나의 집무실.

‘그래, 내 집무실!’

나는 열여섯 번째 생일 선물로 그레이스에게서 집무실을 선물받았다.

프리지어궁의 내 침소와 같은 층의 반대편을 통째로 개조해 만든 것이었다.

겉으로는 서재 겸 응접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직속 소대와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용도로 쓰일 예정이었다.

집무실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열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회의실이 나왔고, 응접실 책장 뒤편의 비밀 문을 열면 그간 수집한 정보를 정리해놓은 열람실로 이어졌다.

그레이스가 내게 보이는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의 상징.

크으, 뿌듯해.

“어떤 깜짝 보고를 하려고 이 바쁜 언니를 오라 가라 했을까?”

“에이, 오신 김에 저랑 다과 드시면서 쉬시다 가시란 말씀이지요.”

내 열여섯 번째 생일에 맞춰 집무실이 완공되고서 며칠 뒤, 나는 첫 손님인 그레이스에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세실, 네가 나를 만났다 하면 일 얘기만 하는 건 알고 하는 소리니?”

“헤헤.”

요즘 직속 소대 업무에 아주 골몰해서 그만.

나는 슬슬 앳된 티를 벗고 있는 세실리아의 얼굴로 생긋 웃어 보였다.

직속 소대를 정식으로 편성한 게 아직 3년도 되지 않았으니 정보를 축적하는 단계일 뿐,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내가 성년이 되려면 4년이나 남았기에 그레이스가 재촉하는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내가, 성과 지상주의 사회에서 전생을 살다 오지 않았겠는가!

“중간 점검 차, 앞으로 어찌 활동할지 보고드리려고요.”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저 성년 되고서 저를 어찌 쓰실지 미리미리 계획하시면 좋겠지요. 생각보다 제 작당이 무용하면 어쩌시려고요?”

“네가 달라는 자리면 만들어서라도 줘야지, 어쩌겠니.”

그레이스의 무심한 듯한 미소에 나는 마주 웃었다.

그레이스는 내가 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일에 욕심이 많다는 것도.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레오폴트랑 아멜리가 무탈하게 꽁냥대는 걸 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황실의 안정을 위해서!’

나는 그런 마음을 숨긴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으음, 향기 좋아.

열여섯이 됐는데도 비타민 폭탄 과일차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내겐 그레이스와 함께여서 마실 수 있는 이 홍차 맛이 각별했다.

“앞으로 게이블스와 알비누스를 주목하려고요.”

“알비누스라.”

“아직은 세가 떨어지지만, 최근 1년간 일부 귀족파가 알비누스를 중심으로 회동하고 있더군요.”

“…그렇구나. 알비누스 후작은 나도 편한 인물은 아닌데.”

싫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게이블스와 알비누스가 공동 투자 등으로 예전보다 긴밀히 지내는 걸로 보아, 두 가문 사이에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합니다.”

“게이블스가 그때 이후로 많이 삐딱해지긴 했지.”

그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윌로우 일에 대해 처벌한 이후. 게이블스는 사사건건 황실에 맞서며 반황실파처럼 굴기 시작했다.

원작에서도 그리될 예정이었지만 막상 그 계기를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꺼림칙했다.

‘원작에서 삐딱선을 탄 계기는 모르지만, 혹시….’

나도 모르게 원작 내용을 답습한 걸까? 나도 원작의 억지력에 휘말린 걸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원작을 따라버렸다고 생각하면, 내가 노력하는 게 소용이 있나 싶어지는 것인데….

‘…아냐. 설령 그렇대도,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 잘하면 돼. 어차피 원작 시작될 때까진 그대로 가려고 했었으니까.’

원작 내용 잘 기억하고서 정신만 차리면 된다.

그리 다짐하고서,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우선 게이블스를 제어하기 위해 후계 싸움을 붙이려고 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