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33화 (33/220)

33화. 악녀를 포섭하는 중입니다 (2)

“처, 철퇴?”

아, 아니, 그 철퇴, 내가 해야 하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극히 분노하셨다며, 에델이 어젯밤에 저의 누옥에 방문해서 밤을 새우고 갔지요.”

“에, 에델 공이?”

이 가족의 과보호 속성이 형부에게도 옮았나!

어쩐지, 레오폴트가 입궁한 시간도 꽤나 일렀지만, 재상이 아버지를 알현하기에도 시간이….

“아우렌바흐 소공자, 폐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니 각오 단단히 하게.”

“…예. 달게 받겠습니다.”

레오폴트의 얼굴이 전에 없이 결연했다.

아니, 뭘 달게 받아…?

그 알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나는 그날 저녁에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오늘의 일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겸 나와 만찬을 하러 프리지어궁으로 행차한 것이었다.

내 신변에 관한 우리 가족의 주의도는 한층 격상되어서 나는 당분간 프리지어궁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스튜를 음울하게 뒤적였다. 희귀 버섯을 때려 넣은 보양식이었다.

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레오폴트는 정말 대황실 사과를 할 기세였다고 했다.

“폐하, 제가 미욱하여 4황녀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점 경을 쳐 마땅합니다. 게이블스의 영식이 주제도 모르고 4황녀 전하를 연모하고 있던 것을 알면서도 그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게이블스 영식이 우리 세실을, 말이냐?”

“폐하, 이참에 아룁니다만 부디 게이블스와 혼담이 오갈 일은 없다고 못 박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제 또래 영식들 사이에서 4황녀 전하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와중에 나를 두고 뒷이야기까지 했다 이거지.

시녀들을 통해 들어온 소문이 순화된 판본일 것을 생각하면, 실제 그들의 입을 타는 이야기가 어떤 것일지 짐작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입맛이 떨어져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 표고버섯처럼 생긴 게 먹기 싫어서는 단연코 아니고….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아버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이 의뭉스럽게 빛났다.

“세실, 아우렌바흐의 소공자와 그저 말동무인 줄 알았더니, 혹여 더 친밀한 관계였던 것이냐?”

레오폴트? 나랑?

“예에? 아뇨!”

당황한 나는 전생에서처럼 황실의 품위는 다 까먹은 말투로 대꾸하고야 말았다.

가뜩이나 사춘기 레오폴트에게 철벽 치기가 힘든데, 속 모르는 소리를 하셔도 참.

“아우렌바흐 정도면 네가 지내기에 좋은 가문이란다. 황성에서도 가깝고, 다양한 지방에 영지가 있어서 사시사철 놀러 다니기도 좋고.”

“아버지께선 벌써 저를 황궁에서 내보내고 싶으신가 보아요.”

나는 버섯스튜를 바라보던 울적한 낯 그대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아차 싶은 마음 반, 세실리아가 귀여운 마음 반을 정확히 얼굴에 그려 넣고 있었다.

“저는 계속 황궁에서 아버지랑 어머니랑 지내고 싶은데요.”

“이 아비도 부디 그러길 바란다만, 몇 년 뒤에 세실이 홀랑 다른 사내를 따라 우리도 버리고 나가고 싶다고 할 테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거란다.”

아버지께서 은근한 말투로 농담을 반쯤 섞어 내게 말씀하셨다.

또 그 소리.

내가 다이아 수저를 쥐었는데 남자에게 홀랑, 어휴, 그게 말이 되나.

나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아버지, 저는 성인이 되면 행정부에서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께서 선위하시면 그레이스 언니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러냐.”

“…진심입니다.”

나는 결연하게 대꾸했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그 얄팍한 마음 따위에 의지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데.’

전생의 기억은 날로 희미해져 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받았던 느낌까지 잊은 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는 한참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내 말이 참이든 거짓이든, 그렇게 말하는 나를 기특히 여기는 것이리라.

“그래, 그래. 우리 세실처럼 영특한 인재가 궁정을 떠나면 제국의 큰 손실이지.”

식사 중이어서 그러진 못하셨지만, 아바마마의 따뜻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으음, 이 정도면 분위기 좋고.

‘지금쯤 말을 꺼내볼까?’

나는 아버지의 심기를 살펴,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아버지, 그런데 게이블스에 어떻게 철퇴를 내리실지 여쭈어도 될까요?”

“으응?”

“피해자는 저이니, 저도 의견을 보태고 싶어서요.”

이미 상황은 속수무책으로 흘러갔지만, 게이블스를 혼내는 데 내가 숟가락 얹지 않으면 분할 것 같아서 말이지.

짙은 금발 아래 빛나는, 내가 아는 두 여인과 비슷한 빛깔의 금갈색 눈동자.

게이블스 후작을 이리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스칼렛 미모가 다른 데서 온 건 아닌 게 미남은 미남이네.’

조금 비열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지금 이곳은 본궁의 알현실.

아버지와 재상인 로젠하르트 백작의 주재로 게이블스 후작 영식의 황녀 폭행 사건에 대한 치죄의 자리가 열렸다.

“송구하옵니다만, 폐하. 저의 미욱한 아들놈이 중병에 걸려 앓아누운 바람에 오늘 자리에 부득이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공의 성의 있는 변론, 잊지 않겠네.”

이 자리에 오자마자 그 낯을 엄숙하게 굳혀두었던 아버지는 후작의 변명에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딱 들어도 거짓말 같았으니까.

‘물론, 그날 루시페우스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진짜일 수도….’

그의 마지막을 목격한 나로서는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은 거였지만.

아버지는 형형한 눈빛으로 로젠하르트 백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엄숙한 낯으로 고개를 끄떡여 보인 로젠하르트 백작이 사회자 격으로 심의를 진행했다.

“게이블스 후작. 그렇다면 공의 변론을 피의자인 윌로우 게이블스의 의견으로 간주해도 되겠소?”

“피, 피의자라니….”

“어흠…!”

습관적으로 반론하고 보았던 게이블스 후작은 분기탱천하는 내 아버지의 기세에 쭈그러들었다.

나는 통쾌하다는 표정을 숨긴 채 무해하고 유약한 황녀 연기를 펼쳤다.

“괜찮아요, 아버지. 마주쳤다면 좀 무서웠을걸요….”

사실 아주 없는 소리도 아니기는 했다. 우악스럽게 내 어깨를 잡으며 그가 면상을 들이댔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연무장에 놀러 갔다가 그만한 덩치의 남기사들을 보면 놀라곤 했으니까.

“들었소, 공?”

“송구합니다, 폐하….”

게이블스 후작의 한숨이 회의실 바닥을 뚫을 기세였다.

“그렇다면.”

로젠하르트 백작이 끼어들듯이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얼마 전 알현실 앞에서 아버지가 철퇴를 내릴 거라 선언하던 그 엄중한 것이었다.

“윌로우 게이블스는 지난 10월 열한 번째 날 아카데미 후원에서 세실리아 4황녀 전하께 물리력을 행사한 것이 사실인가?”

“…예.”

오, 생각보다 빠른 시인이었다.

“증인, 패티샤 뷰케인.”

“네.”

“그날 피해자의 상태가 어땠지?”

“양쪽 어깨에 누군가에게 잡히셨던 자국이 선명하였습니다. 단순한 손자국이 아닌 게 신성력을 행사한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제 아들놈도, 그날 누군가에게 당해서 지금….”

게이블스 후작이 꽤나 억울한 목소리를 내었다. 윌로우 놈의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걸 내가 저지른 일이라 추측하는 거였다.

“당했다고?”

“예, 신관들의 말에 의하면 마법에 당한 것 같다고….”

아버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내게 마력은커녕 신성력도 없으니 이 사달이 난 건데.

아버지께서는 그 분통을 꾹 눌러 참으며 내게 물으셨다.

“세실, 네가 그랬느냐?”

“설마요, 아버지. 제가 어떻게 그를….”

그리 말하며 나는 내 얼굴 앞에서 합장하듯 양손을 모아 보였다. 참 작고 가녀리고 무해해 보이는 손이었다.

마력이 없다고 말하는 게 즉효였겠지만, 그것 또한 황실의 기밀.

게이블스 후작에게는 억울하게도 나는 세실리아의 외모를 한껏 활용하여 무고함을 주장했다.

“저는 그날 정말 너무 무서워서….”

내가 짐짓 목을 움츠려 보이자, 아버지와 로젠하르트 백작의 낯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헤헷, 메롱이다.

“해서, 짐은 윌로우 게이블스에게 10년간 황궁 출입을 금한다.”

“폐하! 그는 제 후계자로….”

“맞아요, 아버지.”

미리 정해둔 아버지의 발언에, 나는 긴급히 눈시울을 그렁그렁하게 만들고서는 가련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과한 처사 아닐까요? 그가 곧 성년이 되면 게이블스의 소후작이 되는걸요.”

“과하다니, 세실. 은사를 진 자를 해하려 했다.”

“아버지께서 부당하게 귀족파를 탄압하신다는 오명을 쓸까 무섭습니다.”

“황실이 입은 모욕감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거늘.”

“그래도, 게이블스 영식에게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

더 큰 헛짓거리를 해서 사교계에서 축출될 기회 말이다.

로젠하르트 백작이 내게 물었다.

“그럼 어떤 처벌이 합당하다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이번 일로 게이블스 영식이 한 가문의 후계자로서 제 언행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면 좋겠네.”

로젠하르트 백작의 질문에, 나는 손을 다시 기도하듯 모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까 매달아둔 눈물방울이 큰 효과를 발휘했을 거였다.

“책임감이라… 하시면.”

게이블스 후작의 얼굴은 그야말로 혼란투성이였다.

지금껏 내가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한 탓에, 내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 또래 귀족들하고 못 친해진 건 다 네 아들 때문인데 말이지.’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감춰두고서, 겉으로는 내숭을 계속 떨었다.

“게이블스 영식은 곧 게이블스의 미래지 않은가. 자신의 행동이 게이블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면 좋겠네.”

“이미 제 아들놈은 뼈저리게 후회….”

“말로 하는 반성은 정성스럽기야 하지만,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걸….”

가장 값싼 반성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오늘만큼은 유약하고 어리숙한 막내 황녀였으니까!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미 입을 맞춰둔 내용임에도 내 연기에 놀라, 아버지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니, 아버지.”

“어어, 그래. 세실. 무엇이 좋겠느냐?”

대사를 잊으신 아버지가 황급히 목소리를 내자마자 나는 한참 고심하는 연기를 시작했다.

“저는 이 기회에, 게이블스 영식이 게이블스에게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 좋겠어요.”

“그, 그건 제가 후계자 교육으로 이미….”

“잃어봐야 더 확실히 아는 법 아닐까요…?”

끄응, 대충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게이블스 후작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게이블스 후작가의 재산 중 가장 중요한 것. 바로 대륙에서 가장 질 좋은 포도밭이 있는 앤더슨령과 대규모의 대리석 광산이 있는 에버렛령이었다.

여기서 어설프게 거짓을 말했다가는 아버지의 진노를 살 상황.

게이블스 후작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렸다.

훗, 고민을 좀 덜어줘 볼까?

“으음…. 게이블스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앤더슨령의 포도밭인가요…?”

제가 잘 몰라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4황녀의 영특하심이 아수라마수라 사교계에 유명한 일이었지만, 게이블스 후작에게는 이런 연기가 먹힐 거였다. 윌로우 놈 말본새를 보면 미성년에 여자라고 그가 나를 얕볼 게 빤했으니까.

게이블스 후작의 얼굴이 치욕으로 빛났다.

‘아마 앤더슨령과 에버렛령을 제외한 것 중에 무엇을 갖고 입을 털까 고민 중이었겠지.’

소 뒷걸음질에 쥐 잡았다고 착각할 거라 기분 나쁘지만, 지금은 도움 되니 봐준다.

나는 속눈썹을 한껏 떨며 처연하게 웃었다.

“아, 게이블스 공. 내가 후작가의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소리는 아닌 거, 알지?”

“그, 그럼요, 전하….”

후작의 얼굴에 아주 미약한 안도의 빛이 비쳤다.

“그럼 세실, 한 5년쯤 에버렛령을 황실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할까?

“5, 5년….”

게이블스 후작의 눈동자가 일주일 내내 밥 대신 소주만 퍼마신 사람의 손처럼 떨렸다.

“아니에요, 아버지.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게이블스 후작의 얼굴에 다시금 안도의 빛이 스쳤다.

바보, 내가 무슨 생각인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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