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흑막의 어린 시절을 주시하는 중입니다 (7)
아니, 무슨 일로 마기에 오염된 멧돼지를 아카데미에서 키우는 거야…?
나는 그 궁금증을 토로하는 대신 상식적인 대꾸를 했다.
“얼른 다녀와.”
“하, 하지만, 전하. 혼자 계시면….”
“잠깐인데, 뭐. 아카데미에 뭐 험한 일 있겠어? 저거 급한 거 아냐? 그렇다고 내가 널 따라가면 더 위험하잖아?”
“아무래도 그렇죠….”
레오폴트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큰 신성력을 타고난 데다가 어려서부터 신성력도 검술도 철저히 익힌 그를 능가할 이가 아카데미에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이 레오폴트의 어깨를 톡톡 쳤다.
“괜찮으니까 다녀와. 나는 은사를 졌다고.”
여느 황실 직계처럼 신성력 많다는 허세를, 나는 레베카 언니의 초커를 만지작거리면서 부렸다.
테오도르 오빠가 선물해 준 텔레포트 반지도 제자리에 있었고, 그거 말고도 이것저것….
끄응, 잠시 고민하는 듯이 앓는 소리를 내던 레오폴트는, 아카데미 제복 재킷을 벗어서 내 머리에 씌웠다.
내 머리칼을 가리려는 거였다.
“저기 으슥한 쪽 벤치에 숨어 계세요. 혹시 모르니까….”
“알았어, 알았어.”
나는 재킷을 장옷처럼 걸친 채 레오폴트의 등을 떠밀었다.
레오폴트가 기숙사 뒤편 사육장으로 뛰어간 뒤, 나는 레오폴트의 말대로 정원의 으슥한 쪽 벤치로 가서 앉았다.
지금까지 다니면서 사람들을 별로 마주치지 못했다지만, 그래도 혼자 있을 땐 눈에 안 띄는 게 상책이니까.
나는 내 머리칼을 덮은 재킷을 바투 잡았다.
‘계속해서 1학년 애들에 대해서 떠봤지만, 레오폴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지.’
2학년이니까 1학년 아이들이 까불지는 않느냐, 갓 아카데미에 들어온 아이들은 적응을 잘하느냐, 나이도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수업 진도가 어떻게 다르느냐 등등….
루시페우스의 이름이 언급될까 싶어서 1학년과 관련된 질문을 잔뜩 내뱉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이미 아카데미 안에서 대차게 따돌림당하고 있을 텐데…. 저는 살기가 좋으니 아무려면 좋다는 건가?’
레오폴트의 꽃밭에 대해 갖은 음해성 추측을 잔뜩 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생리적으로 불쾌감을 자아내는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은 왜 여기에.’
붉은 머리칼에 황갈색 눈동자…. 윌로우 게이블스였다.
그는 황실 연회에서 날 볼 때면 비치던 그 느끼한 낯으로 빙글대면서 내 앞에 와서 섰다.
‘열아홉 아냐? 졸업 안 했어?’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가 내 앞에 바싹 붙어 선 덕에 햇볕도 들지 않고 목도 아팠다.
짜증 나.
“영식은 눈도 참 좋군.”
“제가 어찌 전하를 몰라볼 수 있겠습니까.”
“영식, 미안한데 좀 물러나지 않을래?”
아니면 몸을 숙이든가. 내 말에 윌로우 게이블스가 히죽대며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 야비한 면상이 내 눈앞에 들어찼다.
“전하께서 웃어주시면 말입니다.”
아오, 씨, 진짜.
윌로우 게이블스는 정말이지, 내가 전생의 기억은 흐릿해져도 전생에서 쓰던 비속어는 잊지 않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내 떨떠름한 낯에서 거절을 읽었는지, 히죽 웃은 그는 그제야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영식이 왜 아직 아카데미에.”
나는 은사를 진 자의 특권에 힘입어, 무례할 수 있는 직설적인 질문을 입에 올렸다.
아카데미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열세 살에 들어가서 열여덟 살에 6학년을 마치고 졸업하는 것이었으니까.
“뭐, 시험이 끝났어도 공부하는 것이 생도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내 말을 어찌 알아들었는지, 그는 아직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것을 자랑인 양 떠벌였다.
‘아니, 이 늦은 시간까지 있느냐고 물은 게 아니라 왜 아직도 졸업 안 했느냐고!’
게이블스가 후계자를 제 나이에 입학시키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유급했을 주제에 뻔뻔했다.
‘동생인 스칼렛은 우등생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지난번에 귀족법 그 기본적인 사항도 몰랐던 게 창피하지도 않나.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가 알아듣지 못할 반어법을 썼다.
“그렇다니 아수라마수라의 미래가 밝군그래.”
“예, 제가 잘 배워야지요.”
역시 못 알아듣는 거 봐.
녀석의 눈빛은 오늘도 불쾌했다.
‘분명히 제국의 부마가 되기 위해서, 라는 말을 혼자 생략한 걸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저런 놈이 귀족파 실세 게이블스의 차기 가주라니. 정말 미래가 밝다, 밝아.
“그나저나 일행께서는 자리를 비우신 모양입니다. 무책임하게도.”
“내 일행이 누군데?”
“아우, 크흠, 글쎄요, 여기 단신으로 오셨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아서요.”
…레오폴트 언급하려던 거지? 어쩐지, 겔프라는 이름이 익숙하더라니.
‘게이블스의 끄나풀….’
나는 순간적으로 귀족파의 계보에 대해 잊고 있던 것을 자책하고, 또 미심쩍어하는 레오폴트의 등을 떠민 것을 후회했다.
윌로우 게이블스가 나와 있을 시간을 만들자고 상황을 만든 거였다.
‘아까 기숙사에서 난 웃음소리도 얘인가…?’
아냐, 그 웃음소리는 저 기분 나쁜 목소리와 달랐고, 윌로우 놈이었다면 분명 거기서부터 거들먹거렸을 게 뻔했다.
제 몸을 사릴 필요를 모르고 자란 자니까.
“어쨌든 혼자시라면 저와 오붓하게 정원 산책이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윌로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보다 다섯 살 많으니 성인이나 다름없는 나이, 열아홉.
키도 큰 데다가 체격 또한 좋은 편이라 굉장히 위압적이었다.
“일행을 여기서 기다리고 싶은데.”
“길어질 텐데요.”
녀석이 히쭉 웃었다.
‘사육장을 일부러 훼손했구나.’
이 자식은 예전부터 다섯 살이나 어린 세실리아가 여자로 보이나.
하아, 나는 내어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전하께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친해지자는 것 아닙니까.”
“그걸 말로 요구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곤 생각하지 않아?”
“전하께서는 참 매번 말이 기시군요.”
윌로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 그때 그 표정.’
나는 4년 전 신년 하례식 때 스칼렛에게 험악하게 굴던 그의 낯을 떠올렸다.
‘수확제 연회 때 너무 하찮은 모습이어서 잊고 있었네….’
윌로우의 눈동자가 일순 험악하게 빛나더니, 내게 내밀었던 그 커다란 손이 순간적으로 내 어깨를 세게 쥐었다.
그의 손길에 나는 억지로 일으켜지고 말았다.
“악…!”
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로 센 악력이었다. 조금 뜨거운 듯한 느낌도 나는 게….
‘설마. 지금 신성력을 쓴다고? 돌았네, 진짜.’
제 딴에는 나를 겁박하겠답시고 조금 힘을 더 쓰는 거겠지만…. 세실리아의 유리 몸은 이걸 버텨내지 못할 거였다.
멍들면 시녀들 난리 날 테고, 그러면… 난 몰라. 책임은 네가 질 일이지.
나는 내 코앞까지 다가온 윌로우의 면상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영명하시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더니, 그리 노려보시면 남자들 기분이 안 좋아지시는 건 모르시나 봅니다.”
“영식은 내 기분을 신경 쓰지 않는데 나라고 영식 기분을 신경 써야 하나? 하물며 내가 은사를 졌는데.”
내가 쏘아붙이는 말에 윌로우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지는 것 같아 참고 있지만, 어깨가 아파오는 것에 절로 미간을 좁히게 되었다.
그때였다.
“…으악!”
전기라도 맞은 것처럼, 윌로우가 펄쩍 뛰었다.
“…으, 으윽….”
그러고는 마치 다른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몸이 뻣뻣해져서는 부들대기 시작했다.
그러는 바람에 나를 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는 떠밀리듯 벤치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제, 제기랄…. 이게 뭐, 뭐야….”
그의 입에 육두문자가 담길 때였을까.
“우욱! 억!”
맙소사, 저게 뭐야?
그의 팔이, 손목이, 손가락이 모두 기괴한 모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관절이 헛돌아버린 건 아닌데, 정상적인 범주의 행동은 아닌 느낌이었다.
“욱, 으윽, 크윽…!”
팔꿈치가 이렇게 꺾이고, 어깨가 저렇게 꺾이고, 또 손목이, 손가락이, 무릎이 꺾였다.
그 기괴한 풍경에 나는 레베카의 초커를 움켜쥐었다.
‘이 목걸이가 나도 모르게 발현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테오도르가 준 텔레포트 반지를 만져 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기미도 없었다.
내가 신성력, 마력 모두 없다지만 그 흐름마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면…. 마법?’
신체를 강화하거나 회복하는 것은 신성력이지만, 물리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력이니….
나는 순간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쓰는 인물이라면.’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윌로우는 갑작스레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으윽, 우욱….”
그러고는 저 혼자 몇 배의 중력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팔을 짚어 일어나려 하다가도 그 팔이 꺾이고 말았고, 간신히 팔꿈치로 지탱하다가도 끝내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숫제 바닥에서 기어댔다. 구토일지 침일지 모를 것들을 질질 흘리면서.
“이게 무슨….”
꿈틀대는 윌로우를 꺼림칙한 표정으로 살필 때쯤이었다.
인영 하나가 시야 끝에 걸렸다.
정원 가운데를 장식한 관목 사이에서 소년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귀를 덮을 정도로 기른 검은색 더벅머리 아래로는 품이 큰 아카데미의 교복 차림이었다.
창백한 얼굴, 깡마른 몸, 그리고….
‘빨간 눈.’
내가 어느 날 2구역의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 눈동자였다. 그리고 꿈속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년은 마치 내가 저를 알아봐 주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오래간 미동도 없었다.
‘루시페우스.’
마법을 쓸 수 있지만 마탑 바깥에 남은 유일한 자.
그를 마주쳤다는 반가움도 잠시.
‘벌써 마법을 익혔구나.’
윌로우 게이블스로부터 겪은 공포와 그가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몸을 뒤틀고 있는 기괴함, 그리고 맞은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소년의 안타까운 사정까지….
나는 아무 말도, 아무 몸짓도 만들지 못했다.
털썩, 그때쯤 불어온 거센 바람에 내 머리를 덮고 있던 레오폴트의 재킷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든 순간에, 루시페우스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낯에는 미동도 없었지만…. 어째선지 그가 나를 반가워하는 것만 같았다.
“너, 혹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소년 루시페우스는 내게 다가올 듯,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뎠다.
관목이 가리고 있던 그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
나는 간신히 마른침을 삼켰다.
몇 걸음 더 다가온 그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섰을 때.
“전하…시죠?”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미성.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순서를 뺏기고 말았네요.”
순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에 거품을 물고 반쯤 혼절한 윌로우를 일별했다.
‘그럼, 아까부터 느껴지던 그 시선이….’
그러고 보면 기숙사에서 났던 웃음소리가 꼭 이런 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던 것도….
“전하! 어디 계세요?”
그때, 축대 위에서 계단을 따라 재빨리 내려오는 레오폴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윌로우 게이블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
놀란 마음에 루시페우스 쪽을 보았더니, 그는 이미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안경을 쓴 채였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내가 언젠가 읽었던 대로 변해 있었다.
무감정해 보이는 다갈색 눈동자.
‘다음에…?’
소년의 입 모양이 그런 말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잠시 뒤, 작은 마찰음과 함께 그의 모습 역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