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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30화 (30/220)

30화. 흑막의 어린 시절을 주시하는 중입니다 (6)

“아카데미에?”

“네, 조금 있으면 중간시험도 끝나서 교정이 한산해지거든요. 그때면 전하께서 몰래 오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내가 거기에 화답한 것은 무언가에 홀려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아카데미 정문 앞에 멈춰 선 마차 안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얼렁뚱땅 올해 첫 외출이라니.’

4년 전 루시페우스를 마주친 그날의 잠행 이후로 황궁 밖으로 나온 것은 정말 손에 꼽았다.

‘그리고 시작부터 이런 난관이라니.’

나는 세실리아로 태어나고서 처음, 마차가 검문에 걸린다는 상황을 체험하고 있었다.

황성 외곽에 위치한 아카데미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귀족가 자제들을 위해 기숙사 제도를 운영했다. 그래서 교문에서 상당히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우리 해맑은 레오폴트 소공자님께서 이런 것에 대해 언질해주지 않으신 덕에… 란셀이 교문 경비병과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던 것이다.

“화, 황녀 전하시라고요?”

“네. 4황녀 전하십니다.”

“이이이이사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으신 겁니까?”

“시찰 겸 친우분을 뵙기로 한 거고…. 몰래 오신 거라 이사장께는 비밀로 하시고 싶으실 듯하군요.”

란셀이 마차에서 내려 경비병들과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차창 너머로 흘러들어 왔다.

경비병들이 압도될 만도 했다.

황녀가 왔다는 것도 놀랄 일인데, 란셀은 그 견장에 그려진 별 두 개만으로도 이미 위압적이었으니까.

“그그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아카데미 내에는 군사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히익, 경비병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 나는 보지 않고도 란셀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야 10년 넘게 함께했으니 익숙한 거지, 처음 보면 무서울 거야….’

30대 초반인 그는 연무장의 햇볕 아래 그은 피부와 표정 없는 얼굴 때문에 종종 오해를 사곤 했다.

그 미미한 표정 변화를, 처음 본 경비병이 알 수 없음은 당연한 일.

결국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창을 열었다.

“란셀, 혼자 들어갈게.”

“하지만, 전하.”

“규칙이 그렇다잖아.”

나는 란셀에게 방긋 웃어 보이고는, 마차를 막아섰던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경, 미안한데, 그럼 아우렌바흐 소공자를 불러줄 수 있을까?”

“아….”

세실리아의 얼굴의 효과는 대단했다!

은사를 이토록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을 경비병의 낯은 황송함으로 허물어졌다.

“예, 예예예예, 전하. 망극하옵니다. 자자자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마워.”

나는 창문을 닫고, 아무도 없는 마차 안에서 은밀하게 미소 지었다.

란셀도 없이 다닐 수 있다니, 너무 신나잖아?

“죄송해요, 전하. 아카데미 학칙이 그런 줄 몰랐어요.”

“학년 수석을 하면 뭘 하니? 교칙도 모르면서.”

란셀을 비롯한 기사들을 아카데미 밖에 대기시킨 뒤, 나는 교문까지 뛰어나온 레오폴트를 마차에 태워 함께 교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마차를 가져가도 될까요?”

“마차 안에 탄 게 나인 것만 안 들키면 돼. 오히려 황실 마차니까 다들 피하지 않겠어?”

“아, 그게 그렇겠네요.”

내가 타고 있는 마차는 4년 전 내 첫 잠행에 맞춰 제작된 세실리아 전용 마차였다.

신성력 결계를 쳐서 외부로부터의 마력 개입을 막는 동시에, 외부에서 함부로 문이나 차창을 열지 못하도록 최신 기술을 쏟아부어 설계된 특급 경호 마차였다.

겉으로는 황가의 문장이 자그마하게 박힌 것이 내 형제들의 것과 구분되지 않았다.

이 마차를 타고 들어가니 란셀을 비롯한 기사들도 마음을 덜었을 거였다.

아카데미 밖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레오폴트의 검술 실력도 한몫했고, 황녀의 기사들조차 뚫지 못하는 아카데미의 철통 보안 역시 마찬가지.

‘부지 전체에 경비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니까.’

후후, 예상외의 수확에 나는 기분이 퍽 좋아졌다.

“오신 김에 보넨 자작을 보고 가실 건가요?”

보넨 자작은 내가 어렸을 때 과학을 가르쳤던 학자로, 현재 아카데미의 학장을 맡고 있었다.

“시찰을 나오면서 책임자를 만나면 진짜 시찰이 아니지 않니? 그냥 학생들 생활하는 데나 보여줘.”

“역시 그렇죠? 그럼 강의동으로 먼저 안내해 드릴게요.”

시험이 끝나서 교정이 한산해질 거라는 레오폴트의 추측은 과연 사실이었다.

함께 강의동을 돌아다니는 동안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마주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부터 1학년, 2학년, 3학년, 저기 끝이 6학년 강의실이에요.”

“선택 수업을 듣는데 학년별로 강의실이 있어?”

“공통 수업은 다 같이 들으니까요.”

“보통 한 학년에 몇 명 정돈데?”

“뭐…. 많아야 열다섯 되겠죠? 저희 학년에는 저까지 열한 명이에요.”

“뭐야, 학년 수석 별거….”

“별거 맞거든요! 전하께서도 어려서부터 귀족들 교양 공부 다 하셨으면서 말이에요.”

레오폴트가 복숭아 같은 볼을 부풀리며 툴툴댔다.

곧 수염도 슬슬 나는 것 같은데 아직도 천사 같은 어린 레오폴트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하긴, 아멜리도 스물두 살 레오폴트를 처음 만났을 때 천사인 줄 알았다고 회상할 정도니까….

“그러면 다른 학년이랑도 서로 다 알겠네?”

“그렇죠. 전체 학생이 백도 안 되니까요.”

그럼 혹시, 라는 말을 목구멍까지 올렸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해 뭐 하겠어. 너네 나중에 연적 되니까 미리 친해져 놓으랄 것도 아니고.’

‘공제눈’의 설정대로라면 지금쯤 루시페우스의 반사회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텐데 말이다.

대신 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

“혹시 아카데미서부터 귀족파…랑 벌써 부딪히지는 않니?”

“…아무래도 아니라고 할 수 없죠.”

레오폴트의 낯이 시무룩해졌다.

옳거니,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까치발을 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누가 제일 문제야? 혹시 따돌림받는 애가 있다거나….”

나는 혹시라도 루시페우스의 이름이 나올까 기대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교우 관계가 안 좋다는데 바로 위 학년이니 뭐라도 생생한 증언이 나오지 않을까?

내가 너무 가까웠는지, 귓불이 달아오른 레오폴트는 눈알을 데로록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문제는…. 글쎄요. 다 같은 사람이고 다 함께 아수라마수라의 기둥이 될 사람들인데 누굴 콕 짚어야 하나 싶어요….”

“으응….”

그랬지. 레오폴트가 이런 애였지.

내가 은밀히 물은 것이 무색하게도 레오폴트는 꽃밭 같은 소리를 주절거린 것이었다.

“정말 그래? 그러면 모두가 평등하게 너를 거슬리게 해?”

“예? 왜 말이 그렇게 되나요. 그냥 다 오해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일부러 그의 말을 곡해해 보았는데도 레오폴트는 그저 씁쓸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긴. 레오는 계속 이래야 하지.’

나는 다시금 원작을 돌이켰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관계성이 뭇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유.

지능 만점 무력 만점이지만 이 꽃밭 같은 레오폴트의 해맑음을, 가진 것 없지만 세상 물정에 밝은 아멜리가 보완해주는 관계가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보다는 철들면 좋겠는데….’

그 꽃밭 공자님을 철들게 하는 것에는 귀족파와의 갈등이 한몫할 예정이었지만.

나는 아멜리를 놓고 루시페우스와 대립하던 끝에 레오폴트가 뱉었던 회심의 대사를 떠올렸다.

「“경, 마지막 선은 넘지 말지 그래. 존중으로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크으으으으, 드디어 정신 차렸다며, 흑화를 하니까 이제 남주답다며 독자들이 난리를 피웠던 레오폴트의 명대사.

‘지금 1학년에 있을 걔가 나중에 저를 얼마나 엿 먹일 줄 모르니까 이러지.’

그러고 보면 그 꽃밭병의 화타는 루시페우스였으니, 역시 그가 원작대로 어느 정도는 움직여줘야 했다.

‘굳이 흑화하지 않고도 그럴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1학년 강의실 쪽에 시선을 던지는데, 마치 누군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레오폴트에게 말하지 않고 구경하는 척 들여다보았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착각이겠지…?’

레오폴트는 그 이후로 이동 수업이 이뤄지는 전공별 강의실, 학생 식당, 체력 단련실 같은 것들을 보여준 뒤 마지막으로 나를 기숙사 쪽으로 안내했다.

“너는 기숙사에 안 살잖아?”

“그래도 제 앞으로 나온 방은 있어서 출입할 수 있어요.”

“나도 갈 수 있어?”

“은사를 지신 분께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나요.”

아, 은사를 진 자. 몇 번을 들어도 짜릿한 표현이야.

나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레오폴트의 뒤를 따랐다.

궁중 예법 신경 안 써도 되고, 인적 드물어서 남 신경 안 써도 되니 발걸음이 말 그대로 가볍기 그지없었다.

‘기사들이랑 같이 못 들어온 게 신의 한 수였어. 아카데미 학칙, 칭찬해!’

기숙사는 수업이 이루어지는 본관에서 후원을 끼고 뒤편에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모두 고향에 내려간 모양인지, 역시 인적이 드물었다.

“저기는, 아마 휴게실…인 줄 알았는데, 체력 단련실이네요.”

“아, 샤워장, 샤워장이 어딨을까…?”

덕분에 레오폴트가 저도 잘 모르는 기숙사를 때려 맞히며 소개하는 동안 마주친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따금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층마다 간식 보관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이건 청소 도구함이네요.”

“쿡.”

“아, 웃지 마세요.”

“나 아닌데?”

갑작스레 들려온 웃음소리. 뭐지?

“누구 있어?”

레오폴트가 복도를 향해 소리쳐 보았지만, 돌아오는 소리 하나 없었다.

“뭐어, 아주 텅 비어 있을 린 없으니, 누가 있을 법도 한 거 아냐?”

“흐음, 그렇기야 한데요….”

“귀신한테 비웃음당하지 않게 제대로 설명이나 해 봐.”

기숙사가 정말 궁금했던 건 아니니 레오폴트가 설명을 제대로 하건 아니건 상관없었지만.

그저 궁 밖의 것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으니까.

기숙사 구경이 끝나고 본관 쪽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아우렌바흐 소공자!”

아카데미에 들어서고서 처음으로 우리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박힌 소년이 기숙사 건물 옆쪽에서 나오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겔프 자작 영식입니다.”

레오폴트가 내게 나지막이 속삭이고는, 그로부터 나를 가리듯 내 앞으로 옮겨 섰다.

‘진짜 많이 컸네.’

내 시야에 어깨가 들어오는 것이, 확실히 어른이 되는 중이구나.

나는 속으로 멋진 아우렌바흐 공자님에 한 걸음 다가선 그를 대견하게 느꼈다.

“무슨 일이야?”

“사육장에 문제가 생겼어!”

급한 일인지, 겔프 영식이라는 자는 기숙사 건물이 있는 축대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외쳤다.

겔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사육장에 뭐가 있는데?”

나는 그것보다 더 큰 호기심을 내뱉었다.

“닭이나 토끼도 있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수집해 온 소동물들도 있는데…. 설마.”

레오폴트의 목소리에 초조한 기색이 깃들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수집해 왔다면 분명 마기에 잠식된 동물일 텐데.

그런 걸 여기서 키웠다고…?

나는 뜨악한 얼굴로 레오폴트를 쳐다보았지만, 나를 등지고 선 레오폴트의 낯을 확인할 순 없었다.

“마(魔)멧돼지 우리는 아니지?”

“그거야!”

“이런…!”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차게 식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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