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흑막의 어린 시절을 주시하는 중입니다 (5)
“네?”
두 사람은 다시금 놀란 낯이 되었다.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겠지.
나는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엘런은 게이블스 후작가. 그리고 케인은 알비누스 후작가.”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의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케인에게 루시페우스의 존재를 알려두기 위한 안배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루시페우스를 살피기라도 하기 위해서….
나는 몇 년을 머릿속에 담아 온 말들을 이었다.
“이 두 가문이 몇 년 안에 귀족파 안에서 유력 가문으로 떠오를 거거든.”
게이블스야 이미 귀족파의 실세고, 알비누스는 루시페우스의 합류로 그 세력이 크게 성장할 예정이었다.
“당장 유의미한 정보를 얻으리라 기대하진 않아. 사용인들과 친분을 쌓든, 길드의 도움을 받아서든 잘 살펴봐. 짐작했겠지만 외부에는 이 일이 흘러나가서는 안 돼.”
두 사람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 지령이 정확히 무엇을 위한 일인지는 몰라도, 중압감만은 느껴졌을 거였다.
드디어…. 드디어 시작이다.
“정말로 시작하셨어요?”
“그렇다니까. 자작이 내 각오를 얕봤던가 봐요?”
“진짜 실행에 옮기실 줄은 몰랐달까요.”
나는 렌틸 자작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황태자 전하께까지 말씀드린 일인걸. 내 10년 스승인 자작이 몰라주면 서운할 뻔했어요.”
황실 직계로서 배워야 교육 과정은 진즉에 다 떼었지만, 렌틸 자작은 여전히 한 달에 두 번씩 나를 방문했다.
내 스승으로서 그레이스의 신임을 받는 만큼,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다양한 방면의 조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귀족파를 감시한다고 하실 때 놀랐던 게 생각나네요.”
“기다려 봐요. 내가 자작의 숨겨진 꿈을 다 이뤄줄게.”
내 너스레에 렌틸 자작이 소녀처럼 웃었다. 연주황 머리칼 아래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마치 오후의 햇살 같았다.
어느 가문의 후계 싸움에서 밀려나 현자의 탑으로 들어간 렌틸 자작은 현재의 귀족 사회에 불만이 많았다.
‘그 비판적인 관점이 나랑 통해서 사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거고.’
그레이스에게 말한 대로, 처음에 직속 소대를 꾸릴 때만 해도 렌틸 자작과는 상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를 통해 사정을 들은 그녀는 내 계획을 꽤 재밌어하며, 귀족파 가문들에 대한 제 판단을 아낌없이 공유해 주었다.
‘렌틸 자작이 귀족파 가문 출신이라서 잘 아는 거겠지. 아마 그 가문은 높은 확률로….’
나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 소녀를 떠올렸다.
“참, 그리고 자작에게 조언을 얻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어떤 의견에 또 동조해주길 바라시나요?”
내 생각은 번번이 자작의 생각과 통해, 번번이 조언과 더불어 응원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법적으로는 혼외자라도 가주에게 인지된 자식이면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갖잖아요.”
“그렇죠.”
렌틸 자작이 빙긋 웃었다. 나는 이 화제가 그녀의 마음에 썩 들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이 인식을 차츰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건 루시페우스의 사정을 알면서도 당장에 손쓸 수 없는 나의 최선이었다.
“처벌 강화 같은 이야기는 고리타분하죠?”
“그런 걸로 될 문제가 아니란 건 나도 아는걸.”
처벌로 가능했다면 지금 이런 문제도 없었을 거였고.
“가장 쉬운 건 전하께서 서자 출신의 부마를 들이시는 일이죠.”
“미쳤어!”
“데릴사위 삼아서 황궁에서 같이 사시면 되잖아요?”
“내가 단순히 궁을 떠나기 싫은 게 아니라아….”
내가 늘상 황실을 떠나기 싫다고 말하는 걸 두고서 하는 말이었다. 그건 황실의 안락함이 좋아서도 있지만, 애정 관계라는 그 모래성에 의지하기 싫어서인걸….
거기까지 말할 수 없어 나는 입술만 빼죽 내밀었다.
“다음으로 좋은 건 전하의 측근을 모두 그런 출신의 이들로 꾸리시는 거죠. 6소대 수련생 뽑으신 이후로 기사의 꿈을 꾸는 평민 아이들이 많아진 것 아시죠?”
“…역시 어린 황녀는 정책 입안보다 캠페인 모델이 되는 수밖에 없나….”
“정책 입안은 나중에 입지 다지고 하셔도 늦지 않아요. 전하께서 원하시는 건 또 인식의 전환이잖아요?”
하긴, 고건 또 고렇지.
‘그래, 그럼 내 직속 소대의 행정 일을 도울 보좌관도 필요할 테니, 그때….’
내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이런저런 생각의 가지를 뻗고 있을 때였다.
나를 진중한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던 렌틸 자작이 느릿하게 말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전하께서는 이 나라와도 이 시대와도 참 안 어울리셔요.”
핫, 환생자라서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리 말할 수 없어,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충 눙쳐두려 했다.
“내가 은사를 졌는데, 어떻게든 어울릴 수밖에 없을걸요?”
“그러니까, 은사를 지셔서 참 다행이라고 늘 생각해요.”
내 스승의 눈동자가 깊이 빛났다.
엘런과 케인으로부터 제대로 된 첫 보고가 올라온 것은 그로부터 거의 1년이 다 돼서였다.
본업인 내 호위와 개인 수련을 하는 동시에 감찰 업무까지 수행해야 했으니 꽤나 바빴을 거였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을 하자니 배울 것도, 시행착오도 많았을 거였고.
신분을 숨기고 정보 길드에 드나들기도 하고, 사용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인력 알선소에도 드나들었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라고 착수금 넉넉히 줬으니까.’
나는 그들에게 준 벨벳 주머니에 1년 치 봉급에 맞먹는 금화를 넣었던 걸 떠올렸다.
“다음은 둘째입니다.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현재 13세로, 후작의 이복누이인 에리나 알비누스 경의 아들인데 에리나 경이 전사한 뒤 후작에게 입양됐습니다.”
첫 보고 자료를 가져온 케인은 긴장한 낯으로 개략적인 내용을 읊었다. 밤낮없이 애썼는데 내 의도에 맞게 했는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에리나 경은 성기사단 3중대장을 역임했었으나 11년 전 이중 일식 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전사했고….”
내가 꿈에서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기사…. 그녀도 영광의 홀에 안장되어 있을까?
“그를 아는 사용인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방치되어 자란 것으로 추정되며….”
케인이 읊는 루시페우스의 불우한 유년사는 원작 설정이나 내가 꿈속에서 본 것과 흡사했다. 케인이 제 성정답게 성실히 조사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아카데미 1학년에 재학 중이며, 교우 관계는… 늘 혼자 있는 모습이 목격된다고 합니다. 성적이 우수하여 첫 학기에 수석을 차지했고, 다음 학기도 아마…. 이 기세면 조기 졸업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가라앉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다음 말을 재촉했다.
“마탑에서 거부당한 이유는?”
“마탑 정보통의 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에리나 알비누스 경의 생모에 대해서는?”
“오래전의 일이어서 증거를 찾기가 어렵지만…. 알비누스 선대 후작이 그때쯤 동부 지역을 유랑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마을 단위로 수소문 중입니다. 알비누스 영식의 친부에 대해서도 알아보기 위해 당시 생존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 그간 애썼네.”
“…송구합니다.”
안심한 케인의 낯이 대번에 밝아졌다.
나는 그의 성실함에 흡족해져서 방긋 웃었다.
아멜리 지인이라서 영입한 건데, 믿음직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크으, 그때 포기하지 않고 찾아낸 보람이 있지.
“그…. 아버지께서는 황성 생활에 만족하신대?”
“당연하죠. 전하께서 하사하신 집부터 얼마나 근사한데요.”
케인은 짧게 깎은 갈색 머리칼을 긁적이며 답했다. 내게 집을 선물받고 얼마 뒤, 케인은 곧바로 제 아버지를 모셔온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살기에 비좁지 않고?”
“비좁기는요! 넓어서 문제죠.”
과연. 가본 적 없지만 그레이스가 내 일인데 허투루 할 리가 없었다.
‘이제 아멜리가 와도 문제없겠어.’
나는 속으로 후후 웃었다.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돌아 새초롬하게 물었다.
“막상 해보니 어때? 기사 됐는데 이상한 일을 해서 허탈한 건 아냐? 근위 기사가 못 돼서 아쉽다거나.”
“…제가 충성을 바친 분이 전하신데, 또 그러십니다.”
케인의 눈빛에 진심이 담겼다. 자꾸만 떠보게 되는 음험한 마음을 나도 어찌할 수가 없네….
전생의 부질없는 인연들을 원망하며 나는 말을 돌렸다.
“엘런은 어떤 것 같아?”
“애쓰고 있죠. 저는 걔, 아니, 엘런 경이 뭔가에 몰두하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다른 사람 안 볼 때 노력하는 유형이라고 생각해.”
내 해석에 케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료가 된 지도 벌써 4년인데,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모든 걸 잘 해낸대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알 때도 됐지.
“그래, 다른 애들 임관할 때까지만 둘이 좀 힘내줘.”
“당연한 말씀을요.”
똑똑.
이제 케인을 풀어 주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났다.
“전하, 아우렌바흐 소공자님 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케인, 나가 보렴.”
“예, 전하.”
케인이 꾸벅여 보이고는 내 서재에서 빠져나갔다.
‘눈빛이 예전보다 더 의욕적이네.’
전생이고 현생이고 수도에 내 집 마련은 힘든 일이어서, 그걸 해결해준 주군에게는 없던 충성심도 생기는 게 당연지사일 거였다.
나는 자본주의식 충성에 굉장히 만족하여 배부른 웃음을 지었다.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전하?”
“오랜만이야, 레오.”
어느덧 내 8년 지기가 된 레오폴트가 응접실에 들어섰다.
이차성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레오폴트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중이었다. 한두 달에 한 번 입궁할 때마다 눈높이가 달라졌으니까.
이제는 키도 나보다 한 뼘은 커서, 웬만한 어른들보다도 컸다.
‘입 헤벌리고 다니던 그 맹한 꼬마는 어디 가고 말이야.’
그런 심사를 숨겨두고서 나는 레오폴트를 반가이 맞았다.
“아카데미에서 오는 길이야?”
“네. 바쁘신 줄 알았으면 다른 날 뵐 걸 그랬나요?”
레오폴트는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변성기라니….
“아카데미에 팬클럽 생겼다며? 유명 인사를 뵙는데 어찌 약속을 미뤄.”
“저, 전하도 참….”
레오폴트가 맹하게 웃으며 낯을 붉혔다. 아, 이래야 레오답지. 나는 속으로만 웃으며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내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면 조금 인기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우리 사이에.”
귓불까지 붉어지는 것 봐.
친절하고 해맑은 저 금발의 소년은 아카데미에서도 따뜻하고 다정한 매력을 발산하며 뭇 소녀들의 마음을 홀렸을 것이다.
나는 밤마다 공자님을 앓을 그 얼굴 모를 영애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 공자님에겐 이미 저도 모르는 임자가 있으니까.
“그렇게 인기 좋으면 아카데미 다닐 맛 나겠어.”
“전하께서도 아카데미에 다니시면 재밌을 텐데요.”
“귀족들 노는 데 내가 껴서 뭐 해?”
전생에서 사원들끼리 한잔하는 곳에 눈치 없이 끼어서 술값만 덤터기 썼던 부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면 일개 사원 나부랭이에서 황족이라니…. 감회가 새삼스럽군.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응, 그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
사실 케인의 보고가 생각보다 늦어진 탓에, 별도로 루시페우스의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 차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으렇게 궁금하지는 않아졌어.”
케인이 하필 오늘 보고를 올린 덕에 괜히 사람을 오라 가라 하게 된 셈이 된 것이었다.
나는 멋쩍음을 감추려 세실의 얼굴을 활용해 생긋 웃어 보였다.
내가 레오폴트에게 짓는 미소가 워낙에 박한지라, 나의 착한 죽마고우는 마주 미소 짓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가 같이 탄 건 죽마가 아니라 궁내 마차였지만….
“아카데미가 궁금하셨어요?”
“응, 뭐 비슷했어. 그냥 어떤 사람들이 다니는지.”
루시페우스가 다니는지 말이다.
“수업은 들을 만한지.”
루시페우스가 듣기에 말이다.
“보통 교우 관계는 어떠한지.”
루시페우스의 교우 관계 말이다.
아, 사생팬이 된 것만 같네.
그가 잘 지내는지 살펴보고픈 마음과 별개로, 내 목표를 위해서도 알아둬야 하는 이야기였으니까….
훗날 레오폴트에게 시련이 되는 정치적인 에피소드도 아멜리의 피폐한 사정도 모두 그의 손에서 생겨날 예정이니, 그에 대한 정보는 하나라도 더 많으면 좋았다.
내 말을 곰곰이 듣던 레오폴트가 말했다.
“그럼 저랑 아카데미에 가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