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흑막의 어린 시절을 주시하는 중입니다 (4)
뭐라고?
황당한 말소리에 놀라 그쪽을 바라보니 도미닉의 앞쪽, 소년들의 틈바구니에 안경을 쓴 소년이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나만 아는 반가움이 인 것도 한순간.
‘와, 진짜 못됐다. 아무리 루시페우스의 어머니가 후작의 이복누이라도 그렇지, 방금 내 말을 들어놓고….’
한데 제 의형의 같잖은 말소리를 듣지 못한 듯, 소년은 반질반질한 낯을 단정히 굳혀 둔 채였다.
안경 너머 그의 다갈색 눈동자가, 마치 한참 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한 것은…. 착각이겠지?
‘무, 물론, 얘가 세실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니 놀라서 그런 건지도….’
그 눈빛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아, 나는 재빨리 고개를 휙 돌렸다.
‘내가 반갑든 어쨌든, 너도 세실 얼굴에 반하면 안 된단 말이야.’
‘형이라는 게 출신 성분 다르다고 광고하고 다니니 아카데미에서 어떤 처지일지 벌써 빤하네.’
그거 갖고 따돌리는 것들이 잘못한 일이지만.
그 블라우베르 소년도 나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니, 아카데미에서도 시달리고 있을 게 빤했다.
‘역시 학교는 세계관 불문하고 아이들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곳인가….’
그렇게 연회에서의 일을 곱씹으며 나는 응접실에서 내 기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블라우베르 그 애가 그리 감격한 걸 보면, 사실 이런 일에 황실이 나선 적은 전무하다시피 한 거겠지….’
블라우베르 소년의 시선이 어찌나 열렬했던지, 당장에라도 내게 충성 맹세를 할 기세였다.
그리고 출신 성분을 갖고서 악담을 들었던, 또 다른 소년.
‘루시페우스가 아카데미에서 따돌림당해서 결정적으로 흑화한다지만, 그게 결정적이라는 건 이미 쌓일 만큼 쌓였다는 거니까….’
도미닉의 폭언에 익숙해진 듯한 그의 덤덤한 낯을 떠올리면… 역시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이 드는 것이었다.
‘짠해도 너무 짠해.’
코코아 대신 올라온 생강라테를 홀짝이며 루시페우스의 예정된 불행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응, 들어와.”
주위를 모두 물려둔 덕에 내가 목소리를 높여 답하자, 기다리던 이들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새하얀 정복 차림의 케인과 엘런이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성기사단 3대대 6소대의 케인입니다.”
“…엘런입니다.”
오늘 기사로 임관됐다고, 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첫 정식 인사를 해냈다. 엘런은 또 엘런다웠고.
나는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란셀만큼 덩치가 커진 케인과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본 여성 중에 가장 큰 키를 지닌 엘런.
‘이 둘이 내 첫 기사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해.’
가까이서 보니 다시금 감격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들의 기사 임관을 진심으로 축하해. 다들 고생 많았어.”
“다 전하께서 보살펴주신 덕입니다.”
케인이 감격에 차서 하는 말에 엘런은 고개만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케인이 매사에 빠릿빠릿하고 진지하게 임한다면 엘런은 매사에 심드렁하니 균형이 잘 맞는다 싶달까….
당분간 단둘이 애써야 할 텐데, 좋은 콤비가 되지 않을까?
“일단 앉아들 보렴.”
케인과 엘런은 조금 의아한 낯이 되어 응접탁자를 사이에 놓고 내 양옆에 자리했다.
“내일부터 정식으로 6소대에 배속되는 거지?”
“네.”
“1대대도 아니고 3대대인데, 괜찮아?”
나는 그들이 해야 할 정답을 마음속에 정해두고서 물었다. 앞으로 할 이야기를 위한 포석이었다.
“3년 전 발탁된 이후로, 저는 전하를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길이란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예, 뭐, 저도.”
“케인은, 어렸을 때 꿈이 근위 기사였다고 했잖아.”
“어쨌든 이제 당당한 성기사단원이잖습니까.”
성기사단은 신성력을 웬만큼 운용할 줄 알아야 입단할 수 있었기에, 황실 기사단보다 조금 더 상위로 쳤다.
반면 황실 기사단은 신성력이 부족해도 무예만 있으면 갈 수 있어서, 진짜배기 실력자들이 간다고들 하는 거였고.
그리고 케인은 원작에 따르면 황실 기사단 산하 근위대에서 근무할 예정이었다.
그만큼 기본기가 탄탄한 와중에, 란셀에게 사사하여 신성력 운용력마저 끌어올리며 성기사단에 합격한 것이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도 1대대도, 2대대도 아니고 3대대잖아.”
“대대가 무슨 소용입니까? 저는 수련생으로 들어온 이래 전하 이외의 주군을 모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다.”
그의 말에 엘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장에선 아웅다웅해도 기본적으로 생각이 통하는 거였다.
“성기사단의 새로운 일원으로서 주신과 황실에 충성을 맹약했으니…. 나 한 사람을 주군으로 모신다고 말하면 안 될 텐데?”
“…아, 저, 그게.”
두 사람이 기사 서임을 받으며 읊은 맹세를 언급했더니, 케인이 당황하여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나는 작게 웃고는 엘런에게도 질문을 이어갔다.
“엘런도 6소대에 남는 것, 괜찮아?”
“예에, 저야, 뭐.”
엘런은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면 엘런은 6소대 수련생을 모집할 때 낸 지원 서류에, 기사로서의 꿈에 대해 적으라는 항목에 아무것도 적어 내지 않았더랬다.
그래서 엘런이 무얼 위해 기사가 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아까 좋은 제안도 많이 받았을 텐데.”
새로이 임관한 기사들은 성기사단이나 황실 기사단에 속했다가, 5년의 의무 복무 기간이 지나면 자유롭게 퇴직할 수 있었다.
그때 자기네 사병으로 영입하기 위해 임관 때부터 공을 들이는 귀족들이 많다고 했다.
‘어쩌면 굉장한 금전을 약속받았을 수도…. 딱히 기사로서의 성취에 목표가 없다면, 돈이 목표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엘런을 주시했다. 3년간 지켜본 그녀가 만족할 만한 답을 주리라는 신뢰 반,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불안함 반.
‘케인의 성격에 대해서는 원작을 참고하면 되지만, 엘런과 관련된 건 오로지 나 혼자 판단한 것밖에 없으니까….’
자꾸만 시험하게 되어 미안하기도 했지만, 전생에 사람의 마음이 너무도 쉽게 변하는 걸 많이 보아서일까? 나는 버릇과도 같이 사람들을 시험하게 되는 것이었다.
‘케인은 놓아줄 수 없지만, 엘런은…. 앞으로 할 일은 극비 사항이니 내게 완벽히 충성하지 않으면 곤란해.’
내가 쉬이 질문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이자, 잠시 고민하던 엘런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난한 영지의 평민 여자애가 신성력을 좀 쓴다고 해봤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엘런이 내뱉은 말은 다소간, 예상 밖이었다. 그녀가 이처럼 자기 얘길 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엘런의 주홍색 눈동자가 내 쪽을 향했다. 거기에는 평소와 달리 일말의 의지 비슷한 게 깃들어 있었다.
“사내 녀석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체력을 단련해도, 여자 기사는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고요.”
평민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엘런은 그렇게 덧붙이고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느릿하게 내뱉었다.
“애초에 제게 주어진 기회가 6소대뿐이었으니까요, 뭐….”
거기까지 말한 엘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내 덕에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거나, 기사가 될 기회를 잡았다거나…. 케인이라면 그런 감사 인사를 하고도 남았을 건데.
‘그걸 굳이 언급 안 하는 게 저답긴 하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 아래서 무슨 일을 해도 괜찮겠네?”
케인과 엘런은 슬쩍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리 뭐 이상한 일 해야 해?
난들 알아?
잠시간 그런 말이 오간다고 느껴졌을 무렵. 케인이 얼빠진 낯으로 답했다.
“그렇…겠죠…?”
여전히 그의 낯에는 의문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그 ‘무슨’ 일에 대한 상상의 여지가 너무도 적었으리라.
내가 아이치고 비범하긴 하지만, 그래 봤자 그들 눈에 아직 열세 살이니까.
‘미트볼 가게라도 차리자는 건 줄로 착각하는 건 아니려나 몰라.’
나는 속으로 웃으며, 미리 탁자에 올려두었던 벨벳 주머니를 턱짓했다.
“하나씩 가져.”
케인과 엘런은 의아해하면서도 주머니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꺼내봐도 좋아.”
그 안에는 열쇠 두 개와 금화 수십 개, 은 배지가 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두 사람의 낯에 의문이 가득 찼다.
“너희… 아니, 경들에게 시킬 일이 많아.”
“네?”
“내가 경들에게 은인이긴 하지만 그거 말곤 당장에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잖아? 황실 직계라도 아직은 미성년이니 권력도 없고.”
대번에 두 기사의 낯이 진지해졌다.
“그 안에 종이가 있어. 거기 써 있는 게 그 열쇠의 주소야.”
“발레아 거리 53….”
“슈타이너 거리 17…?”
“2구역인가요?”
크으, 주소 읊는 소리 한번 달다.
그레이스의 지원으로 구해주게 된 목 좋고 깔끔한 동네의 집이었다.
“경들의 집이야. 언제까지 생활관에 머무를 수 없잖아?”
“네에?”
케인이 놀라서 내뱉는 소리와 함께, 엘런의 눈이 보기 드물게 커졌다.
“내가 경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우선 이런 물질적인 것밖에 없어. 앞으로 나를 위해 일할 경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뇌물이라고 생각해줘.”
“뇌, 뇌물이라뇨. 이런 게 없어도….”
“예. 굳이 이런 것까지는….”
“나중에 입 씻더라도, 받을 수 있을 때는 무조건 받는 거야.”
케인과 엘런은 당황한 낯이 되어, 그 열쇠를 손에 쥔 채로 어설프게 굳어 있었다.
“둘 다 연립 주택 정도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 그래도 방 세 개씩은 딸려 있으니, 원한다면 가족들하고 지낼 수 있을 거야.”
나는 내가 케인에게 하사한 발레아 거리 53번지의 3층에 언젠가 아멜리가 머물 날을 고대하며 말했다. 물론 그 전에 케인이 제 아버지도 모셔올 테고.
“그럼 저희 말고도….”
“응, 직속 소대원이 정식 기사로 임관하고 6소대에 정식으로 배속되면, 모두 말이지.”
부담 갖지 말라는 양, 나는 가볍게 말했다.
아멜리에게 번듯한 숙소를 선물하기 위해 나는 총 스무 채의 집을 하사하게 된 셈이었다.
‘사택처럼 한 건물에 다 지내게 할까도 생각했지만, 보안 위험이 있으니까….’
나는 얼떨떨한 낯으로 열쇠만 바라보고 있는 두 기사에게 중요한 내용을 덧붙였다.
“당연히 앞으로도 나를 위해 뛰어 줄 기사들만을 위해서지만.”
“다, 당연하죠! 이런 것이 없어도….”
케인의 올바르기 그지없는 대답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3년 뒤, 리나랑 데릭까지 1기 모두가 임관하고 나면 기존의 6소대 기사들은 모두 1대대로 전출될 거야. 이번에 경들이 6소대원으로 정식 편입되니, 아마 에릭 경과 앤디 경… 정도가 1대대로 가겠네.”
나의 두 기사가 긴장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제 스승들을 향한 아쉬운 감정도 녹아 있었다.
“경들이 6소대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결정됐던 바야.”
케인과 엘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닐 거였다.
그들이 로젤리아에게 힘이 될 날을 기다리는 기색을 보였을 수도 있고, 자신들이 기사로 임관하면 소대 편성이 달라지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6소대는 내가 성년이 됐을 때를 기점으로 내 호위뿐 아니라 주요 임무도 달라질 거야. 내가 성년이 되었을 때 맡을 일을 경들이 함께해야 한다는 소리야.”
나는 쥐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숨을 골랐다.
케인과 엘런이 긴장하는 기색이 났다.
“내가 하려는 일은 황태자 전하께서 무탈히 정권을 이어받으시도록 귀족 사회를 안정시키는 거야. 귀족 사회를 살피는 눈과 귀가 되어서 말이지.”
그러는 와중에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도와주고.
“그럼 이 나머지는….”
“금화는 착수금, 배지는 황태자 전하의 증표.”
“예에?”
케인이 깜짝 놀라 그 배지를 살펴보았다. 엘런도 건조한 낯으로 성은(聖銀)으로 된 그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기사단이나 경비대나… 공공 기관에 도움을 요청할 때 이걸 보여주면, 경들이 황태자 전하의 공무를 수행 중인 걸 다들 알 수 있을 거야.”
일종의 마패 같은 거랄까.
쓸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 내 기사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거였다.
내가 그레이스를 위해 일한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훨씬 더 와닿을 테니까.
케인과 엘런은 심각한 얼굴로 그 배지를 살펴보았다.
“우선, 경들이 할 일은 귀족파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두 가문을 감시하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