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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7화 (27/220)

27화. 흑막의 어린 시절을 주시하는 중입니다 (3)

소년이라기보다 청년이랄까?

고동색 머리칼 아래로 검은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그는 분명….

‘이름이 도미닉이랬나.’

루시페우스와 꿈속에서 마주칠 때 늘 그를 괴롭히고 있던 루시페우스의 의형이었다.

“아버지가 어떻게든 나를 부마로 넣으시겠다고 했어.”

그를 목격할 때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꿈속의 목소리.

그렇게 으스댔던 것치고, 그나 알비누스 후작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기색은 없었다.

‘뭘 갖고 그리 당당했던 건지.’

그는 알비누스 후작의 곁에 서서 양순한 아들인 척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루시페우스 괴롭힌 거 내가 다 안다, 이 악마야.’

나는 세모눈을 뜨고서 남몰래 그를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진짜 안 닮았네.’

알비누스 부자의 머리 색이 갈색 계열인 것과 별개로, 이목구비 또한 루시페우스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루시페우스의 엄마랑 알비누스 후작이 이복 남매라 해도 저렇게 안 닮을 수가 있나?

‘선대 알비누스 후작 유전자가 힘을 못 썼나…?’

루시페우스는 분명 코가 조금 더 조붓하고, 턱선도 더 섬세하고, 눈매도 저것보단 좀 날카롭고, 그러니까….

‘그래, 딱 저 옆의 애처럼.’

마침 알비누스 부자의 옆에, 딱 루시페우스랑 닮은 검은색 머리칼의….

‘응?’

맙소사.

안경을 쓴 깡마른 소년…. 루시페우스 본인이었다.

‘웬일이래, 저 후작이? 내년에 아카데미 들어가니까 소개하는 걸 더는 미룰 수 없었던 건가…?’

방치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 건지 머리도 깔끔히 깎고 옷도 잘 차려입게 하였지만, 아이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어찌할 수 없었다.

루시페우스 소년은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귀족파의 다른 가족들과 환담하는 알비누스 부자의 옆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짠해라.

‘저런 슬픈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흑화하게 되는 거겠지….’

그의 예정된 미래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담아 그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세실, 벌써 마음에 차는 영식이….”

“아니에요, 오라버니!”

아니, 이 오라버니는 아까부터!

나는 펄쩍 뛰면서, 한껏 흔들리는 테오도르의 동공을 위해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낯을 지어줘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시선이 내게 달라붙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시선이 그 이후로 한순간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은 것도, 그 시선의 주인공이 내가 조금 전까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피던 소년이라는 것도.

잠시 뒤 본격적인 무도회의 개시를 알리는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맨 먼저 부모님이 춤을 추시고, 또 황태자인 그레이스 부부가 춤을 춘 뒤.

자기들의 차례를 기다린 귀족들이 둘씩 짝을 치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슬슬 어린 황녀님은 빠져줘야지. 사람도 많은데.’

오늘 연회에는 여느 때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다.

새로이 기사가 된 이들이 모두 참석하는, 일종의 사교계에 데뷔 자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족 출신 기사들에게야 익숙한 자리겠지만, 갓 기사 작위를 받고 준귀족이 된 이들에게는 어리둥절한 자리.

동시에 새로이 제국군에 들어간 인재들에게 귀족들이 갖은 호의를 보이는 자리기도 했다.

엘런과 케인 또한 제각각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교계 물정 모르는 평민이라고 속으로는 무시할 거면서 겉으로는 성기사라고 알랑대는 거 봐.’

엘런의 낯에는 귀찮음이, 케인에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현혹되는 건 아니겠지?’

그들이 나를 위해 발탁되어 함께한 것이 벌써 3년이지만, 원작에서는 세실리아와 전혀 무관했던 인물들.

원작의 세실리아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만큼, 저들에게 원작의 억지력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흠, 내 수하들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탐나는 인재들이니 말이야.’

엘런과 케인이 인기 좋은 이유가 황녀인 내 측근이어서임을 잊어버린 나는 고민에 빠졌다.

“메리.”

“네, 전하.”

“나 슬슬 들어갈 건데…. 엘런하고 케인한테 밤 깊기 전에 나한테 들르라고 전해줘.”

“연회가 언제 끝날 줄 알고요?”

“늦더라도 기다리지 뭐.”

“…흐음, 그렇게 일러둘게요. 쉬시고 계세요. 아네트, 거품 목욕 준비하고. 오늘 추위에서 노곤하셨을 테니.”

“내가 애야?”

내가 입을 빼죽 내밀며 말했다.

내 옆에서 빙긋이 웃는 아네트는 작년에 메리제인의 신혼 휴가 때 새로 들어온 시녀였다. 아직 사교계 데뷔 전이어서 연회에 남을 필요가 없기에, 연회 때마다 내 시중 담당이었다.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연회를 조금 더 즐길 수 있도록, 나는 란셀과 아네트와 조용히 들어가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엘런과 케인도 바로 데려가고 싶지만…. 그래도 그들의 첫 연회니 조금 놔둬야겠지.

‘어쨌든 준귀족이 되고서 첫 연회니, 추억 쌓고 싶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귀족들이 왈츠를 추고 있는 곳을 빙 둘러 지나갈 때였다.

“서자 주제에. 반쪽도 귀족이라고.”

그 우아한 풍경에 퍽 이질적인 말소리가 울렸다.

악의적인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그쪽을 보니, 귀족파의 비행 청소년들이 한 소년을 위협하고 있었다.

“네 어미는 네 양말 값도 못 벌어서 구걸하느라 우리 눈도 못 마주칠 텐데, 너는 운이 좋은 줄 알아.”

평민이라고 다 가난할 거라 착각하는 것조차 정말 귀족적이어라.

“아, 자식 버리고 도망갔으니 길에서 만나도 못 알아보겠어?”

그 무리의 소년들이 와하하, 발작적으로 웃었다.

나는 황실 연회에서 이런 언행이 오간다는 것이 놀라워서 나도 모르게 붙박여 서고 말았다.

그 선두에는….

“아니, 이게 누구신가요?”

젠장, 눈이 마주쳐 버렸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전하. 제 모습을 보니 걸음을 옮기실 수 없으셨던 게지요?”

윽. 이 자식은 계속, 진짜.

저들이 목 좋은 곳에서 사람들 시선 다 모아놓고 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네 말소리가 황당해서 놀란 거거든?

“으응, 안녕, 게이블스 영식.”

스칼렛의 오라비, 윌로우 게이블스였다.

“오늘도 달의 요정 뺨치게 아름다우시군요.”

저 저렴한 말투.

열 살 때의 신년 하례식 이후로 윌로우는 황실 행사에서 나를 볼 때마다 자꾸 느끼하게 굴었다.

‘게이블스 후작도 소싯적에 한 추근거림 했다고 들었는데.’

내게 귀족 사회의 생리에 대해 아낌없이 조언해주는 스승, 렌틸 자작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들을 통해 전해 듣기로는, 4황녀 정도면 차대 게이블스 후작 부인에 걸맞지 않으냐는 소리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닌다나.

‘나는 천년만년 황실에서 꿀 빨고 살 건데, 뭐래.’

그런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가볍게 무시하곤 했지만, 녀석의 번들거리는 눈빛까지는 막을 수는 없었다.

‘원작에서 아멜리를 그리 쫓아다니더니, 그 전엔 세실리아였던 거냐….’

녀석이 추근대는 게 어찌나 골치 아픈지, 내가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원래는 어린이 귀족 다과회, 미성년 귀족 사교회 열려고 했는데…!’

미래 등장인물들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세웠던 계획들이, 윌로우 같은 애들이랑 쓸데없이 얽힐까 봐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윌로우 같은 애들’에는 알비누스 후작의 아들도 있었고.

‘그리 큰소리 떵떵 친 것치고 걔는 나한테 뭘 한 적은 없지만 말이야.’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주변을 살피니, 마침 그 무리의 뒤편에 도미닉 알비누스가 있었다.

같은 귀족파 소년들이라고 다 함께 어울려 있던 모양이었다.

‘씨, 얘랑도 눈 마주쳤어.’

나와 맞닥뜨린 그 눈매가 야트막한 호선을 그리는 걸 보며, 나는 표정을 단단히 관리해야만 했다.

‘저 부자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 알아서 다행이지.’

귀족파 놈들, 도대체 나랑 무슨 원수가 졌길래 내 미래를 저들끼리 망상하냐.

“야, 반쪽.”

나를 보며 꽤나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윌로우가 줄곧 괴롭히던 소년에게 말을 던졌다.

게이블스가 귀족파의 수장이니 이 무리의 우두머리도 윌로우인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께 인사 올려야지? 내 덕분에 너 같은 반쪼가리도 이렇게 가까이서 뵐 수 있는 거잖아?”

윽박지르는 그의 말투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또 한편으로 도미닉 알비누스의 눈빛이 굳는 게, 속으로 윌로우와 치정 싸움 중인 모양이었다.

대놓고는 나설 수 없지만 말이다.

‘게이블스가 귀족파의 실세니까 지금은 알비누스가 납작 엎드릴 때지. 루시페우스 덕에 힘 얻고 나서야 목소리 좀 낼 테고.’

아니, 그러니까 내 미래를 두고 왜 네놈들이 경쟁하는지, 참.

“네 어미라면 흙바닥에 머리 조아려야 할 텐데, 너는 그나마 상황이 괜찮잖아?”

윌로우 놈의 두툼한 손가락에 소년의 머리통이 툭, 툭, 밀려났다.

‘암녹색 머리칼…. 블라우베르 소백작의 아들이던가.’

나는 그 소년이 신년 하례를 올릴 때마다 엄마 없이 아빠와 단둘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블라우베르, 블라우베르…. 렌틸 자작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네.’

그 가문의 이름자가 퍽 낯선 걸 보면 원작에서 선역도 악역도 아닌 가문인 듯했지만, 귀족파 애들과 몰려 있으니 확인은 해보는 게 좋을 듯했다.

‘말끝마다 평민, 평민. 전생 소시민 열받게 만드네.’

정말,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데!

얼른 방 가서 이 답답한 타이즈 벗고 거품 목욕하고 생크림 올린 코코아 마시면서 엘런이랑 케인 기다리려고 했는데!

얘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네…?

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활용해 순진무구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아까부터 궁금한 건데…. 영식들은 다 같은 귀족이 아니야?”

“전하께서 영민하시다지만, 역시 아녀자가 세상 물정에 밝기란 어렵군요.”

내가 처음으로 대꾸다운 대꾸를 해주니 윌로우가 밝은 낯으로 입을 나불거렸다.

어떻게 그마저도 불쾌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도미닉 알비누스는 낯빛이 미세하게 굳는 게, 그나마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으응, 그게 아니라…. 혹시 영식은 귀족법 1조 2항에 대해 좀 알아?”

“제, 제가 그것도 모를 줄 아십니까? 그런데 그건 왜.”

모르는 거 맞네.

윌로우는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입만 떠벌이고 있었다. 역시 일찍이 퇴치되는 악역에게 지성을 안 주는 것이 당연지사.

내가 법 조항에 대해서 입을 올리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좌중과는 썩 대조적이었다.

“…귀족법 1조면, 귀족의 정의에 대한 조목이지?”

“응, 2항이면…. 혼외자든 평민의 피가 섞였든 동등한 지위의 자식이라고.”

“세례 받고 가주의 인지를 받으면 말이야.”

그리고 잠시 뒤, 기특하게도 주변의 소년들이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을 열심히 읊기 시작했다.

‘그게 실제론 적용이 안 되니까 이런 일도 생기는 거지만.’

나는 일부러 과장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수라마수라에 법적으로 서출이나 서자는 존재할 수 없는데, 황궁에서 그런 단어를 들을 줄은 몰라서 말이야.”

“그, 그….”

윌로우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양 얼떨떨하게 굳고 말았다.

‘에이, 진짜 별 같잖은 게.’

어느새 이편에는 수많은 이목이 집중해 있었다.

윌로우의 누이, 스칼렛마저도.

‘내가 윌로우와 얽힐 때면 늘 스칼렛이 내 쪽을 살피지.’

첫 만남 때 퍽 흉흉한 기색인지라 무서웠던 그녀의 표정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지는 꽤 오래되었더랬다.

윌로우 놈 때문에 게이블스들 근처도 안 가는지라 교류할 기회가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열받네. 걔 때문에 내가 스칼렛을 가까이서 살필 기회도 잃고.’

나는 내 말의 내용을 아직도 곱씹는 윌로우의 낯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황궁에선 말조심 좀 하라고.”

화룡점정하듯 내가 말을 마쳤을 때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의 황갈색 눈동자에 분기가 서렸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윌로우가 어금니를 사리무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이제 와서 노려보면 어쩔 건데? 여기 우리 집이거든?’

한편으로 열렬한 시선 하나가 느껴지는 것이, 높은 확률로 블라우베르 소백작의 아들일 거였다.

‘아아, 추종자를 늘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으쓱대는 어깨를 자제하며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좋겠구나, 동생아.”

일견 다정하게 울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 너머에는 적의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분명, 부마가 되겠다고 으스대던 그 목소리였다.

“그래도 너무 들뜨진 말면 좋겠다. 너는 반쪽도 아니고 반의반 쪽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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