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흑막의 어린 시절을 주시하는 중입니다 (1)
“그흑, 으… 으흐흑….”
꿈속에서 이 방에 오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열 살 때 잠행 나갔다가 어린 루시페우스를 마주친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그가 나오는 꿈을 꿀 수가 없으니,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어 궁금했더랬다.
혹시 그날 그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 꿈을 꿨다거나…?
‘하지만 오늘 나타난 걸 보니, 딱히 그런 건 아닌가 봐.’
루시페우스는 원작에서 내게 특별할 것 없는 등장인물이었다. 그래서 꿈속의 그 아이가 루시페우스인 걸 안 순간, 아이에 대한 연민이 꽤 사그라들었었다.
‘저렇게 불쌍한 애가 나중에 어떤 짓을 하는지 아니까….’
하지만 달빛 아래 웅크리고 앉아 목 졸린 듯 울고 있는 그 애를 보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긴 했어.’
사그라든 줄 알았던 연민이 빼꼼히 고개를 쳐들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나와 비슷한 체격이었던 루시페우스는 어느새 나보다 키가 조금 커진 듯했다.
더벅머리 정도였던 머리칼은 이제 어깨를 덮고 있었다. 그 끝이 삐죽빼죽한 것이 마지막 이발도 딱히 성의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3년 만이네.’
나는 그 애 옆에 쪼그려 앉았다.
자그마한 창에서 흘러들어 오는 달빛을 받으며 옹송그리고 누운 루시페우스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안경을 낀 그의 눈동자는 언젠가 내가 읽었던 것처럼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안경이 눈동자 색을 다르게 보이게 해주는 마도구인 모양이었다.
“…흑, 흐윽….”
직접 봤을 때도 그렇고, 소리 높여 울 애는 아닌데….
뭐가 그리 서러운 걸까.
내가 몇 번이고 꿈에서 찾아드는 동안, 이 집에 온 뒤로는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던 애였다.
알비누스 부자와 사용인들이 그리 모질게 굴어도….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바닥에 눌린 그 얼굴에는 연신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눈물 범벅된 낯이 달빛에 처연하게 빛났다.
“왜 울어?”
나는 그 말소리가 가닿지 않을 걸 알면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때, 어린 루시페우스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간 눈 한 번 비비지 않았던 건지 그제야 벗는 안경이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바다에 빠진 저녁놀처럼 이지러졌다.
“으, 윽, 으흑….”
멎을 기색 없는 울음소리.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늘 단출한 살림이었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그러했다. 마치 주인이 방을 비웠던 것만 같은….
‘아, 혹시?’
그러고 보니 문 근처에 짐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퍽 작아 한 사람의 거처를 옮기는 데 쓰이기는 힘들 듯했지만, 이 방의 수수한 구색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까, 짐을 꾸렸었다면.
‘마탑에서 거절당하고 온 날인가 보구나….’
루시페우스가 흑화한 계기로 언급되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마탑으로부터 거부된 일이었다.
세계관 최강자 수준의 마력을 보유했지만, 마탑은 영 탐탁잖은 이유를 핑계로 그를 거절한다.
마력의 성분이 순수하지 못하다나 뭐라나.
‘가르칠 능력이 안 되는 자들이 할 법한 비겁한 변명이지.’
이복누이의 아들을 체면상 버리지도 못하고 고민이던 알비누스 후작은 그가 마력을 발현하자마자 신나서 마탑으로 보냈다.
지난번처럼 몇 번이고 가출을 감행한 루시페우스에게 그건 한 줄기 빛과도 같았을 거였다.
‘안전하고 정당하게 후작가를 나갈 기회가 생겼으니 얼마나 설렜겠어?’
그 설렘을 담아 꾸렸을 짐 가방은 문가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가 결국 돌아오게 된 것을 두고 비웃었을 사용인들의 악의였을 터.
“…흑…. 크흑, 끄윽….”
그러고도 루시페우스의 울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것 같았지만, 목구멍 막히는 소리만 길어질 뿐이었다.
가을의 청명한 하늘 아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수선화궁의 소연무장.
“야호오! 전하, 오셨어요?”
내가 레오폴트와 연무장에 들어서자, 훈련 중인 수련생들 틈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직속 소대에서 열심히 수련 중인 리나였다.
“리나 선배는 전하를 정말 좋아하네요.”
“그게 좀 그렇지.”
허허,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내가 저 말고 또래 측근을 들인대서 경계했던 것도 잠시. 레오폴트는 어느새 내 직속 소대원들을 선배라 칭하며 친근히 여기기 시작했다.
훗날 성기사단에서 함께할 거란 설명이 먹힌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선배들이랑 대련할 생각에 어제부터 잠을 설쳤다고요.”
레오폴트의 녹색 눈동자가 호승심으로 빛났다.
열세 살이 되어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된 레오폴트는 전처럼 자주 입궁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대신 한번 오면, 내 직속 소대원들하고 꼭 시간을 보내다 가곤 했다.
그래, 직속 소대.
나는 3년 전 선발한 6소대의 수련생들을 두고, 훗날 나만의 기사가 되리라는 기대를 담아 그렇게 불렀다.
‘아직 다들 기사로 임관하려면 멀어서, 나 혼자 그렇게 부르는 거지만.’
첫해에 뽑은 열 명이 모두 빼어난 기량을 보여준 덕에, 이후로도 매해 다섯씩 충원하여 현재 총 스무 명이 소속돼 있었다.
‘크으, 황녀 스케일이 크다. 전용 발닦개 스무 명.’
그중 나와 가장 오래 본 1기 열 명은 차례차례 성년이 되어 기사 임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젤리아의 오른팔인 란셀이 책임지고 가르치는 데다 그 또래 평민 아이들 중 가장 재능 있는 이들을 모은 셈이라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면 내가 성년이 될 때쯤엔, 직속 기사가 스물.’
히힛, 나는 나만 아는 설렘을 숨기며 레오폴트에게 물었다.
“아카데미에선 검 좀 겨뤄볼 만한 학우들 없어? 검술 수업 있댔잖아.”
“뭐어, 다들 나름으로 배울 점이 많지만요.”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건성으로 말하는 게, 마음속으로는 ‘없다’라고 답한 게 분명했다.
‘남주 버프, 재수 없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폴트는 남주답게 쑥쑥 자랄 예정이었고, 재능도 뛰어난 데다, 나의 독려로 성실히 수련하기까지 했으니까.
나는 ‘공제눈’ 속 멋진 공자님이 되기까지 9년쯤 남은 내 친구를 뿌듯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그새 키가 더 커서, 어느새 반 뼘이 차이가 났다. 재수 없게.
‘얘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나 빼고 다 무럭무럭이지, 분하게.’
그때, 막 훈련을 마친 수련생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개중 붉은빛이 감도는 금발의 리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사들의 인사를 과장되게 해보인 그녀는 우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눈높이를 낮춰 주겠다는 건데…. 나 이제 그렇게 안 작거든?
“전하, 오늘도 한층 어여쁘시네요.”
“하하. 리나는 매번 참.”
“농담이 아니랍니다. 가을 햇살을 머금으니 은사가 더욱 신비로워 보이는걸요.”
그리 말하며 눈 찡긋.
‘세실 얼굴이 가장 잘 먹히는 건, 어쩌면 리나가 아닐까…?’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리나는 예쁜 얼굴에 약했으니까.
“소공자님, 오늘도 발리러 오셨나요?”
어느덧 소년의 얼굴이 된 레오폴트에게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듯했지만….
“야, 소공자님께 발리는 게 뭐야.”
“제게 패배하러 오셨나요?”
“넌 진짜 그 입, 입, 입!”
그녀가 무슨 사고나 안 칠까 따라왔던 케인이 제 땀을 닦던 수건으로 리나의 입을 때렸다.
아푸푸, 리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 배워 먹은 예법을 고칠 생각 없는 리나와 고지식한 케인은 만났다 하면 으르렁거렸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니 다행이었지만.
“엘런,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전하, 훈련 2부제로 하면 안 될까요? 둘이 붙여 놓으면 너무 시끄러운데.”
“하하. 내가 뭘 바라겠냐.”
케인은 체념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이면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빡침이 서려 있었다.
“오늘도 시끌벅적, 보기 좋네요!”
하지만 나의 친구, 꽃밭 남주 레오폴트는 미소만 보고 이리 해맑게도 해석하는 것이었다.
매사에 성실한 케인은 매사에 심드렁한 엘런과의 온도 차 때문에 고통이었다.
그녀 덕분에 그 옛날 체력 테스트를 통과했대도 그건 심사 위원들의 생각이었으니까.
‘케인이 리더감이어서 참 잘됐어. 가까이 두고서 심복으로 삼으면 아멜리 돕기도 편할 테고 말이야.’
곧 엘런과 케인이 기사 서임도 받겠다, 내 직속 소대도 슬슬 본격적으로 굴릴 때가 되었다.
케인에게 소대장 자리를 주고, 슬슬 계획한 일들을 시켜야지.
나이로 따지면 케인보다 한 살 많은 엘런이 최연장자였으나….
“엘런, 리나가 네 말은 듣는 것 같잖냐.”
“너도 나처럼 어쩌다 한번 말하면 들을 거야.”
그녀는 기본적으로 남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내게 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엘런은 휙 생활관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사전에 초과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란셀의 혹독한 가르침을 쑥쑥 흡수하는 걸 보면 대단한 재능이었다.
“아아, 오늘도 엘런 선배하고는 대련 못 하게 됐네요.”
“너도 포기할 때가 됐는데.”
“저를 못 이기시면 엘런이 상대 안 해 줄걸요?”
리나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바싹 끼어들었다.
나는 리나를 이기건 말건 엘런이 레오폴트와 어울려줄 리가 없다는 데 한 표였지만….
‘레오가 5년쯤 뒤에 다 자란 뒤라면 또 몰라.’
초과 훈련도 안 하는 엘런이 의미도 없는 여흥에 어울려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리나에게 퍽 고맙단 말이지.
“선배께서 야비한 수만 쓰지 않으시면 오늘의 승부는 장담 못 할 것 같네만.”
“야비한 게 아니라 실전입니다요, 소공자님. 그럼, 전하?”
“그래, 가서 대련해. 봐주지 말고.”
“명 받듭니다!”
“…전하!”
내가 손을 살랑살랑 내젓자 레오폴트는 서운하단 표정을 지었다.
제가 리나에게 지금껏 단 한 번도 못 이긴 게 실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나는 레오폴트와 리나가 연무장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리나가 레오하고 잘 놀아줘서 고맙네.”
“잘 놀아주기는요? 아우렌바흐 소공자님께서 역정 내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감사합니다.”
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모두 평민인 직속 소대의 아이들은 처음에 레오폴트를 보고서 꽤나 경계했다.
나야 황녀고 주군이지만, 주군도 아닌 귀족은 사정이 다른 법이니까.
개중에는 직속 소대에 들어오기 전에 속했던 기사단에서 평민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 귀족에 대한 적개심이 큰 아이들도 있었다.
귀족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보다 더 높은 황실에 들어가겠다며 지원한 애들도 있을 정도로.
‘그걸 내 앞에서 일부러 티 내진 않았지만, 나한테는 빤히 다 보여서 말이지.’
특히 리나가 그랬다.
귀족파인 프렘린 백작가의 기사단에 있었다는데, 평민이라서, 여자애라서, 와중에 선머슴 같다고…. 별의별 이유로 차별받은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6소대 선발에 목숨을 걸어, 그리 거친 행동도 보였으리라.
‘리나야 레오폴트가 예뻐서 애초부터 거슬려하지 않았지만….’
그런 배경을 가진 애들 눈에 귀족 도련님이 저도 검 좀 잡는답시고 알짱대니 가소로웠을 거였다.
티는 못 내도 말이지.
하지만 레오폴트는 어디서나 사랑받는 어린이이며, 동시에 이 세계의 남주인공이지 않은가.
누가 레오폴트를 진심으로 싫어할 수 있겠어?
‘루시페우스 같은 자를 빼면 말이지. 나중에 아멜리를 놓고 적대할….’
그때, 옆에서 케인의 앓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녀석 또….”
“푸훗.”
검을 몇 합 주고받는가 싶더니 리나가 재빨리 발을 걸어, 레오가 콰당 엎어지고 만 것이었다.
멀리서도 레오폴트의 귀가 새빨개진 게 다 보였다.
“아우렌바흐 소공자님도 전하 앞에서 망신당하셔서 어쩌신대요.”
“으응, 레오는 나 좋아하는 거 아니래도.”
“…매번 그리 말씀하시네요.”
케인이 작게 웃었다. 내가 뭘 몰라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 봐야 저도 열아홉이면서.
‘레오폴트가 아카데미에서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사귀고 있을 테니, 슬슬 이 집착도 덜어질 거야.’
저 천사 같은 외모의 공작가 후계자라면,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수많을 테고 말이지.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