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조력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7)
면접 대기 중인 지원자들을 관리하는 중이어서인지, 그들의 목소리는 꽤나 무섭게 울렸다.
“어어, 그게 말이지….”
두 사람은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우리들을 눈짓했다. 지원자들 앞에서 아우렌바흐 공자가 어쩌고 전하가 어쩌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좇은 기사들은.
“아이고….”
우리 전하 고집도 참.
마법 보닛을 쓴 나를 알아본 기사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언니들한테 인사만 하고 갈게.”
관목 뒤에 숨어서 체력 심사를 구경한 것과 달리, 나는 당당하게 지원자들을 살폈다.
마도구라도 쓴 걸까? 어느새 뽀송뽀송해진 지원자들은 깨끗한 수련복을 입고서 복도에 길게 놓인 장의자에 일렬로 앉아 있었다.
나는 내 계획을 어떻게 실행할지 머릿속으로 예행연습을 하기 위해 복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케인 앞에서 적당히 우아하게 넘어지면 되는 거지.’
내가 계획한 것은 별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언니들의 과보호를 조금 이용하는 거랄까…?
케인에게는 집사의 아들로서 아멜리 자매를 여동생처럼 돌봐 왔다는 설정이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 친오라비처럼 돌봐준 이예요. 제가 넘어지면 업어주고, 누구랑 맞고 돌아오면 대신 싸우러 가주곤 했죠.”」
아멜리가 레오폴트에게 케인을 소개한 그 말에 레오폴트는 작은 질투심을 느꼈고, 독자들은 그런 오빠란 세상에 없다는 댓글을 달았더랬지.
그 덕분에 그는 여자아이들을 돌보는 데 익숙했고, 그것이 언젠가는 함정으로까지 작용할 예정이었다.
아멜리로부터 그를 떼어놓기 위해 일부러 엄마 잃은 여자아이를 투입하는 식으로 말이다.
‘케인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그의 설정이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니까.’
넘어진 나를 케인이 능숙하게 보살피고, 그걸 언니들이 목격하게 하는 것. 그게 오늘의 내 계획이었다.
‘언니들이 날 아끼는 걸 생각하면 특별 가산점쯤은 일도 아닐 거야.’
그래서 겸사겸사 보닛도 쓰고 온 거였다.
내 머리칼을 본다면, 내가 넘어져도 감히 손도 못 댈 테니까….
‘체력 심사 성적이 좋은 편이지만, 최종 면접자 수도 꽤 되니까. 확실히 해둬야지.’
나는 속으로 결의를 다지며, 레오폴트와 함께 대기 중인 지원자들을 기웃거렸다.
스무 명 못 되게 남아서인지 열심히 살피지 않아도 곧 케인을 찾을 수 있었다.
체력 심사 때의 참가 번호 순서대로 자리한 덕에 그는 이번에도 그 회색 포니테일의 엘런 옆에 앉아 있었다.
‘저 애도 별문제 없으면 합격하겠지?’
면접은 일종의 최종 검증 차원이니까.
무엇보다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은사를 진 자 앞에서 무례히 굴 사람은 없었을 거였다.
물론 케인은 반드시 합격해 줘야만 하기에 가산점 조작을 벌이러 온 거지만….
‘언니들은 언제쯤 오려나.’
본궁 쪽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흘끔댔지만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레오폴트에게 말을 걸었다.
“레오. 지원자 중에 누가 제일 인상적이었어?”
“저는 저 갈색 머리 남자요. 29번….”
지원자들에게 들릴세라 레오폴트가 속닥거렸다. 마치 준비해둔 양 즉답이었다.
나는 다시금 재롱 잔치에서 내 새끼를 보는 학부모의 심정이 되어 레오폴트에게 물었다.
“왜애?”
“동작 하나하나가 절도 있었잖아요. 슈나이더 경이 동작에 늘 성의를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렇구나.”
레오폴트의 검술 선생인 슈나이더 경도 엘런을 보면 좋게 평가하진 않겠네.
“그런데, 저는 저 사람도 인상적이었어요.”
“누구?”
“저기, 25번요.”
“아아, 그.”
레오폴트가 가리킨 25번은 엘런의 옆에 앉아 있는, 붉은빛의 금발을 짧게 깎은 소녀였다.
엘런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그녀는 아까 엘런의 느긋한 태도를 보고 약이 올라 주먹을 휘두르던 이였다.
그 욱하는 기질이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남은 걸 보면 6소대에 올 확률이 있겠구나.
그렇게 성격이 거칠어도 괜찮을까…?
“몸놀림이 굉장히 가벼워 보였어요. 초식을 쓰는 게 절도 있지는 않았지만 움직임이 유려했고요.”
검술 까막눈인 나는 레오폴트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나와 레오폴트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로 그 소녀가 우리 앞에 와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우, 우리가 하는 말 들었나…?
“너희들, 길을 잃었니?”
그녀에 대한 인상이 조금 무서웠던 나는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으, 응? 아, 아니, 네?”
콧잔등의 주근깨가 매력적인 그 소녀는 쭈그리고 앉아 우리의 눈높이를 맞췄다.
나와 레오폴트를 바라보는 미소가 천진한 것이, 아까 엘런을 향해 짜증을 내던 것과는 판연히 달랐다.
나는 눈동자만 때로로 굴렸다.
스칼렛보다 한두 살쯤 많아 보였을까. 수련복 가슴팍에는 하젠령 출신의 리나라고 적혀 있었다.
“부모님을 놓쳤어?”
“아, 아뇨….”
얼어 있는 나와 달리 레오폴트는 얼결에 대답을 곧잘 해주었다.
리나는 연신 싱글대며 나와 레오폴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는데, 그 표정이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아, 레오폴트가 예뻐서?’
나야 지금 마법 보닛을 써서 적당히 평범한 얼굴로 보일 거였으니까.
“그럼 왜 너희 둘만 여기에 있어? 어른은 어디 계셔?”
“어른은….”
레오폴트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원로원에 등청해 있을 아우렌바흐 공작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부모님의 정체도, 우리를 여기에 데려온 어른들의 정체도 말할 수 없어!
‘고지가 코앞인데…. 어떻게 황녀인 티를 안 내면서 이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머리를 재빨리 굴릴 때였다. 리나 너머로 익숙한 신형이 비쳤다.
저 멀리서 내 언니들과 란셀이 면접을 진행하기 위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 안 돼!’
하필 이런 타이밍에!
언니들이 보는 앞에서 케인에게 보살핌을 받아, 그의 점수를 올려야 하는데 말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니, 얘?”
당황한 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꾸밀 여유가 없어, 급한 대로 리나를 제치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언니들을 만나러 달려가는 것처럼….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내디딘 나는, 케인이 앉아 있는 즈음에서 혼신을 다해 넘어졌다.
삐빅, 내 구두의 밑창이 대리석과 마찰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나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혹시나 싶어 케인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가 나를 도와야 해!’
처음 본 여자애가 엎어지는 모습에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저도 모르게 반쯤 일어나고 말았다.
“안 돼!”
“아니, 저거 세실 아니니?”
“얘!”
“전하!”
“세실!”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외침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깜짝 놀란 케인은 어느새 나를 부축하려는 듯 훌쩍 다가와 있었다.
아, 성공했다.
다만 내가 계산하지 못한 것은….
“세실!”
“정신 좀 차려봐!”
“맙소사, 전하!”
“스콧! 유진!”
내가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박을 줄 몰랐다는 것과….
“헉.”
“저것은…!”
“맙소사, 은사…!”
“화화, 황녀 전하…?”
리나가 나를 돕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내 보닛을 벗겨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황실의 상징인 은발을 온 지원자들 앞에 드러낸 채 수선화궁의 복도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아, 정말. 다음부터는 절대 몸 안 써야지.’
신성력이 없으니 면역력이 떨어지는 거야 인정했지만, 체력 자체가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체력을 단련할 일이 없었다 보니 넘어지는 척을 하는 것도 버거웠던 것이었다.
‘레베카가 초커를 충전해준 걸 보면 신성력을 많이 쓴 것도 영향이 있었던 것 같고.’
나는 그날의 수치를 곱씹으며…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날 면접은 잠시간 중단되었다.
나는 곧바로 스콧과 유진에 의해 막 대신전에서 돌아온 레베카의 앞으로 이송되어 신성력 세례를 받았다. 뒤이어서는 내 뇌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황궁의에게 이름이 뭐냐, 지금이 신성력 몇 년이냐 등의 질문 세례도 받았다.
그리고, 한 달간의 프리지어궁 밖 외출 금지령.
‘…그래도 오늘부터 내 수족이 생기는 거니까.’
그러니 다 괜찮았다.
내 눈과 귀가 돼줄 이들만 있으면 이 안락한 황궁서 나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애초에 내가 이 난리를 부린 것도, 황궁 안에만 얌전히 있는 나 대신 눈과 귀가 돼줄 자들을 만들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날 이후로 내 뇌와 뼈 건강을 위해 매일 간식으로 나오는 호두 스무디를 들이켤 때였다.
똑똑.
“응, 들어와.”
“전하, 6소대에 입단한 수련생들이 왔습니다.”
“그래.”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온 란셀이 내게 짤막하게 보고하고는, 문밖으로 손짓했다.
뒤이어 열 명의 소년 소녀들이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2차 심사 때의 수련복이 아니라, 성기사단에서 정식으로 제공하는 수련복을 갖춰 입은 6소대의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 맨 왼쪽에는….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이번에 3대대 6소대에 들어오게 된 니콜슨의 아들, 케인이라고 합니다.”
그새 짧게 머리를 깎은 케인이 바싹 긴장한 낯으로 인사해 보였다.
‘크으, 그 수치스러운 일을 벌인 보람이 있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케인은 체력 심사 점수도 좋았지만 면접도 잘 봤고, 가족도 보증된 데다 심사 평도 좋았기에 내가 굳이 안 그랬어도…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그만큼 노력했다는 게 중요하니까.’
크흡.
나는 애써 그날의 기억을 묻으며, 인사하는 수련생 하나하나의 얼굴을 확인했다.
케인의 페이스메이커였던 엘런도 여전히 긴장감 없는 얼굴로 와 있었고, 레오폴트를 보며 눈을 빛내던 리나도 감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봐주니 내 창피한 모습은 잊은 것 같아 한결 안심이 되었달까….
‘오히려 혜택을 본 게 리나라고 했지.’
심사 중 보인 다혈질적인 모습 때문에 6소대 기사들은 나처럼 그녀의 불같은 성정을 걱정했다고 했다. 그런데 나를 구하려던 다급한 몸짓이 언니들에게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리나는 정말로 예쁜 얼굴에 약한 모양인지, 벌써 내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낯이었다.
‘저렇게 나를 좋아하니 잘된 건가?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뀌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레오폴트가 무예 실력도 인상적이라 했고.’
10인의 합격생 모두가 인사를 마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해. 기사들 말 잘 듣고, 열심히 수련해서 훗날 내 창과 방패가 되어주렴.”
간단한 대면식이니 나는 그 정도로 덕담을 마치기로 했다.
그러면, 내가 오늘을 기다린 이유만 남았네.
나는 란셀을 보며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다들 나가 봐도 좋아. 케인이라고 했니? 너는 잠시 남으렴.”
란셀의 인도에 따라, 케인을 제외한 모든 수련생이 방에서 나갔다.
리나가 조금 기분 상한 표정으로 케인을 노려보는 것이 일종의 질투심인 듯했다….
혼자 남은 케인은 영문을 몰라 창백한 낯이 되어 있었다.
‘으음, 황족 첫 대면에도 떨지 않는 담대함, 마음에 들어.’
그가 아멜리의 조력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드는 밑도 끝도 없는 호감을 감추며, 나는 내 생애 첫 지령을 입에 올렸다.
“있지, 3구역에 산다며?”
“네, 네넵. 맞습니다, 전하.”
“집 근처에 공주와 쏙독새 식당…. 있지?”
“그걸 어떻게…?”
“거기 미트볼 수프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내일 출근할 때까지 폴리나네의 밀빵이랑 사오지 않을래?”
“네, 네?”
어서 와, 발닦개는 처음이지?
처음으로 맞이한 내 수족이자 내 여주의 조력자에게, 나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