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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3화 (23/220)

23화. 조력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6)

“네. 아…. 그렇죠, 조금 머시죠, 아무래도.”

“저도 시력 강화하는 거 배웠는데, 아직 저 정도는 무리여서요.”

맞다, 예전에 레오폴트가 스칼렛이 윌로우와 싸우는 걸 신성력으로 시력을 강화해서 봤었지.

레오폴트의 말에 아차 싶었던 기사들은 쪼그리고 앉아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잠시만요, 실례할게요. 눈 감아 보세요.”

스콧이 레오폴트를, 유진이 내 어깨를 감싸 안고는, 다른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감은 눈꺼풀 위로 무언가 둔중한 것이 슬며시 누르는 듯한 느낌이 났다.

“한번 눈을 떠 보세요.”

깜빡깜빡, 뭐지? 눈을 뜨고 시야를 돌리니,

“와, 신기해!”

마치 눈 바로 앞에 망원경을 갖다 댄 듯이 먼 곳의 풍경이 가깝게 보였다.

여섯 개의 철봉은 물론 그 옆에 서 있는 두 기사의 표정까지 보일 정도였다.

“제가 배운 것보다 훨씬 정교해요! 성기사단에 입단하면 이거 배우나요?”

레오폴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내 세뇌 때문에 성기사단을 막연히 지망하면서도 지금껏 큰 의욕은 보이지 않던 레오폴트였는데.

신성력의 새로운 경지를 경험하여, 그 의욕이 치솟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신성력으로 검기 덧씌우는 훈련을 하면서 배우죠.”

“지금은 저희 신성력으로 구현해놓은 거예요. 두 분의 신성력을 조금씩 보충하시면 초점도 조정하실 수 있고, 더 오래 유지하실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레오폴트의 눈이 더없이 빛났다.

어렸을 때 신성력 수련을 하기 싫어서 황실 기사단에 들어갈 거라던 애는 어디 갔는지, 내 기사들의 전문적인 말투나 제복 같은 것에 꽤나 매료된 눈치였다.

‘그나저나 신성력으로 조절해야 한다니.’

신성력이 없다는 내 체질은 호위 기사들조차 모르는 황실의 극비였던 것이다.

나는 레베카의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의 셋째 언니, 늘 고맙지만 오늘은 더 고마워요.

나는 레베카의 신성력을 운용해, 지원자들이 모인 쪽을 살펴 케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초점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내 적응한 나는 어렵지 않게 케인을 찾을 수 있었다.

‘참가 번호 29번, 로즈버리령 케인! 맞네!’

다들 수련복 앞뒤로 참가 번호를 크게 달고 있었는데, 번호표 귀퉁이에 이름자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쌍안경 써도 이렇게까지 자세히 보이진 않았겠지. 신성력, 꿀이네.’

부럽다. 나만 신성력 없어.

하지만 이런 건 굳이 내가 할 필요 없으니까. 곧 내 수하들도 생길 거고.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케인이 매달리기 심사를 받으러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윌로우 게이블스랑 또래인가? 키가 비슷해 보이네.’

목덜미를 살짝 덮는 갈색 머리의 케인은 체술을 단련해서인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음에도 꽤나 단단한 몸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의 체력 심사에서 탈락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케인은 근면 성실한 소년이랬으니까, 됐어! 황실 기사단에 들어갔을 정도니 검술도 나쁘지 않겠지.’

케인을 포함해 여섯 명의 지원자들이 철봉 앞에 가서 섰다.

“하나, 둘, 셋, 시작!”

란셀의 구호와 함께 여섯 명이 일제히 철봉 위로 고개를 올리며 매달렸다. 케인도 꽤나 가뿐히 철봉에 매달렸다. 그리고….

“저 갈색 머리 애는 체격은 좋은데 근지구력은 영 꽝인가.”

“이제 1분인데 벌써 얼굴이 빨갛네.”

그러니까, 그는 고전하고 있었다. 맙소사….

“이거는… 오래 매달릴수록 좋은 거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나는 심사 기준을 정확히 알고자 천진한 낯을 꾸며 기사들에게 물었다.

유진이 빙긋 웃어 보이며 답했다.

“1분을 버텨야 통과고요, 30초 단위로 재서 5분을 넘겨야 만점이에요.”

“우, 우와….”

나는 철봉 아래 매달리고도 초 단위로 한 자릿수에 수렴했던 전생의 내 기록들을 떠올리며 조금 얼떨떨해졌다. 지금 세실리아의 허약한 몸으로는 더더욱 언감생심이었고.

전생으로 치면 체육 특기생 같은 애들이니 그리 어렵지 않기야 하겠지만….

나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다시 케인 쪽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점점 새빨개지고 있는 그는, 정말 악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잘하고 있어, 케인!’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꾸욱 쥐었다.

그때, 케인이 제 오른쪽을 곁눈질하는 게 보였다. 마치 견제하듯이.

“그 옆의 애가 체력 안배를 잘하네.”

“회색 포니테일 말이지?”

마침 스콧과 유진이 케인 옆의 소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케인 또래로 보이는 그 소녀는, 시간이 퍽 오래 지났음에도 굉장히 가뿐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니, 가뿐하다기보다….

‘묘하게 무성의한…?’

저 애의 평소 표정이 어떤가 궁금할 정도로, 소녀는 크게 긴장감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흘끔대며 이를 악무는 케인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시간이 흘러 케인의 왼쪽에 있던 소년이, 뒤이어 포니테일 소녀의 오른쪽에 있던 소녀들이 떨어지고서 둘만 남았다.

케인의 얼굴이 뻘겋다 못해 거무죽죽해 보일 때쯤.

“그만!”

란셀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리자마자, 케인은 철봉에서 떨어져 주저앉았다.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오, 만점이 둘이나.”

반면 회색 포니테일의 소녀는 태연한 발걸음으로 땀만 닦으며 대기열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녀의 선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분 안에 50개를 해야 통과예요. 그 이후로는 시간제한 없이 등이 땅에 3초 이상 닿지 않게 해서 지칠 때까지, 300개가 만점이고요.”

매달리기에서 탈락한 이들을 내보내고 윗몸 일으키기 심사가 시작되었을 때.

고전한 것이 언제였냐는 양, 케인은 마치 기계처럼 척척 윗몸 일으키기를 해나갔다.

그리고 한 200개쯤 했을 때. 케인의 몸놀림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기왕이면 만점!’

나는 전생 경쟁 사회 출신답게 그를 응원하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꼬옥 쥐었다.

매달리기 때와 달리 모든 참가자가 다 함께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있었는데, 탈락자들이 나가고도 스물은 넘게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삑-

등이 3초 이상 땅에 닿으면, 등에 붙어 있던 이름표에서 경보음이 났다.

삐익, 삑- 조금씩 자주 들리기 시작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지원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지금 나가도 탈락은 아니지만, 10등 안에 들어야 하니까! 로즈버리령에 두고 온 아버지를 생각해!’

가닿지도 않을 말소리를 속으로 되뇌며 점점 더 속도가 느려지는 케인을 지켜볼 때였다. 상체를 일으킨 케인이 고개를 꺾어 제 옆을 바라보았다.

매달리기 때 케인의 오른쪽에 있었던 회색 포니테일의 소녀였다.

그녀는 마치 지금 막 시작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지친 기색 없이 느긋하게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있었다.

“저 회색 포니테일이 영리하네.”

“시간제한 없는 걸 잘 이용한 거지. 3초도 사실 은근히 긴 시간이니까. 괜히 조급해지면 체력만 깎이는데 말이야.”

“자기 속도를 찾는 게 관건이니까.”

일찍 나가떨어진 이들이 과한 속도로 폭주한 것과 달리, 50개를 채워야 하는 1분이 지나자마자 느긋하되 일정한 속도로 횟수를 채워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 규칙적인 움직임이 얄미울 정도인지, 그 근처에서 먼저 나자빠진 소녀 하나가 주먹을 휘두르며 그녀 쪽을 노려보았다.

케인은 제 앞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포니테일 리듬에 맞춰 나동그라질 듯 말 듯, 계속해서 꾸준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케인은 그 소녀와 함께 최후의 3인으로 심사를 마무리했다.

‘혼자서 페이스메이커로 삼은 건지, 단순히 경쟁심인지.’

어쨌든 케인이 덕분에 좋은 성적을 내서 다행이었다.

‘이 정도로 성적이 좋으면, 저 애도 6소대에 들어오겠지?’

다음번 오래달리기에서도 케인은 그 소녀, 참가 번호 28번 갈리아 자작령 출신의 엘런을 곁눈질하며 달렸다.

앞선 심사들에서 힘이 빠진 지원자들은 대부분 통과 기준인 다섯 바퀴를 간신히 넘고서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엘런은 철봉에 매달렸을 때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윗몸 일으키기를 할 때처럼 특별하지 않은 속도로 꾸준히 달렸다.

처음에는 선두 그룹을 따라가다가 지친 케인은, 결국 엘런 근처로 뒤떨어져서는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달리기 시작했다.

‘케인이 복이 있네. 아는 사이 같지는 않은데. 바로 옆자리에 실력 비슷해서 자극되는 경쟁자가 있는 것도 복이니까.’

물론 그의 가장 큰 복은 내 눈에 든 것이지만, 후후.

결국 케인은 페이스메이커의 활약과 함께 체력 심사를 뛰어난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 페이스메이커, 엘런을 나는 벌써부터 총애하기 시작했다.

그녀 덕분에 케인이 무사히 시험을 치러내고 있었으니까.

‘묘하게 성의 없어 보이는 게 걱정스럽긴 하지만….’

엘런은 연무장에 남은 30여 명의 지원자 중에서 여러모로 남달랐다.

그 고된 체력 심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도 그다지 지친 기색도 없었고, 무엇보다….

“저 애는 뭔가 성의가 없네.”

“그러게. 다른 지원자들이 우스워질 정도로….”

그치, 나만 느낀 거 아니지?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스콧과 유진의 평가에 속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마지막 심사인 기초 검술 테스트. 남은 지원자들이 다 함께 제국 검법 기초 초식을 선보이는데,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녀의 몸짓이 묘하게 건성…이었던 것이다.

“틀린 건 없는데.”

“그치? 각도랑 손 모양, 동작, 모든 게 틀림이 없는데 뭔가….”

영혼이 담겨 있지 않다고 말하려는 건가?

스콧과 유진은 최우등으로 이 체력 심사를 통과할 게 자명한 미래의 제자 겸 후배를 두고 벌써 깐깐하게 굴기 시작했다.

“체력도 좋고, 몸 쓰는 걸 보면 꽤나 영리한데.”

“그래. 근성이 없어 보인달까. 제 안위가 최우선인 것 같기도….”

“가르치는 대로 쑥쑥 익히기는 할 테지만….”

“혼자 잘하면 뭐 해. 나이를 보니 동기들 중에 맏이일 텐데, 걱정이야.”

“그러게. 저 옆에 갈색 머리 남자애 정도가 딱 리더감인데.”

바로 곁의 케인은 선배님들이 좋아하시게도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었다.

나는 재롱 잔치에 참석한 학부모의 뿌듯한 심정이 되었다. 케인과는 오늘이 초면이었지만.

‘자, 그럼 케인의 인성 점수를 만점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움직여볼까?’

사실 체력 심사 구경은 여흥에 불과했고, 내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보닛을 쓴 바람에 세실리아의 얼굴을 활용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어 레오폴트를 바라보았다.

“있지, 레오.”

“네, 전하.”

지원자들의 동작에 맞추어 검술 초식을 연습하는 듯 몸을 움찔대던 레오폴트는 곧바로 이편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너도 성기사단에 들어가면 이 연무장에서 훈련하겠지?”

“…정말 그렇겠네요.”

“내 기사들이 1대대로 가면 네 상관이 될 수도 있고.”

“아, 앗차.”

그 말을 들은 레오폴트는 갑작스레 허리를 꼿꼿이 폈다. 뒤에 서 있는 스콧과 유진을 의식해서인 듯했다.

정작 두 기사는 우리가 무슨 말을 떠들든, 지원자들을 품평하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오늘 합격한 애들이 너보다 먼저 임관할 테니 네 선배도 될 거고 말이야.”

“그렇…네요?”

내가 또래 호위 기사를 뽑는다는 사실에 꽂혀서 샐쭉대던 건 언제였냐는 양, 레오폴트는 감격한 얼굴이었다.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이 될 건지, 가까이 가서 보지 않을래?”

“좋아요!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2황녀 전하께 말씀드리겠어요!”

후후, 레오폴트는 참 좋은 친구란 말이지.

나는 씨익 웃으며 내 호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유진, 스콧. 여기까지 온 김에 언니들께 인사하고 가고 싶어.”

체력 테스트를 통과한 지원자들은 마지막으로 내 언니들과 6소대장인 란셀을 면접관으로 인성 면접을 볼 예정이었다.

지원자들이 면접을 위해 대기하는 때가, 바로 내가 노리는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수선화궁으로 들어섰을 때.

“스콧, 유진! 지금 여기 왜 있어?”

우리는 6소대의 기사들에게 딱 걸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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