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조력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5)
“그래도요. 저도 기사가 되려고 수련하는데….”
“레오, 만에 하나 네가 기사로서 나를 모시고 싶다면 그건 임관하고 나서 얘기해.”
그런 건 아닐 테지만. 같은 기사가 된대도 저는 출발선이 다른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걸까?
“내 기사들에게 종자가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고, 나는 아우렌바흐 소공자를 내 기사들의 종자로 쓸 수 없어. 애초에 이건 그들의 후임을 양성하려고 하는 일인걸.”
나는 한 80퍼센트 정도의 진실인 이야기를 읊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 여상한 태도에, 레오폴트는 조금 위로받은 모양이었다. 입술이 아까보다 조금 들어간 걸 보면 말이다.
‘토라진 모습도 나름 귀엽긴 하지만…. 아무리 친구로라도 나한테 이리 집착해서 어째?’
종소리 이야기로 세뇌했으니 특별한 감정은 아닐 테지만…. 레오폴트에게 친구가 나 하나뿐인 것이 문제인 듯했다.
친구가 한 명인 건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나야 전생에서부터 집에서 혼자 노는 게 일상이었는걸.
‘아카데미 들어가서 친구 많이 사귀고, 나중에 아멜리를 만나면 이 순간이 엄청 수치스러워지지 않을까.’
하나뿐인 인간관계에 집착하던 이 순간 말이다.
내 말을 머리로는 납득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레오폴트는 여전히 샐쭉대었다.
‘차라리 저 서운해하는 마음을 차라리 이용해볼까?’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에 속으로 씨익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오. 그러면 혹시 어떤 이들이 지원했는지 보러 갈래? 네가 내 친구로서 나를 맡길 만한 자가 있을지 확인하면 마음이 좀 놓일까…?”
나는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며 말했다. 그 말에 여전히 삐쭉대던 입가가 조금씩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보였다.
‘…학문으로 영재면 뭐 해, 마음은 제 나이 그대론데.’
나는 내 친구에게 세실리아의 얼굴을 십분 발휘해 생긋 웃어 보이며,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응, 레오?”
“조, 좋아요.”
물론 레오폴트와 산책을 나온다고 해서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호위 소대의 기사들이 심사관으로 나가 있었지만, 근무 계획표에 맞추어 두 명의 기사는 늘 내 곁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레오폴트 핑계로 심사 구경 가는 거라고 핑계를 댈 순 있었다.
“와, 신기해요. 저도 써보면 안 돼요?”
“아, 안 돼. 이거 내 전용으로 맞춘 거라서. 다른 사람이 쓰면 전기가 흐른댔어.”
나는 혹시라도 레오폴트가 마법 보닛을 뺏어다 쓸까 봐 황급히 상체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레오폴트가 그런 무례한 일을 할 애는 아니었지만.
“전기…요?”
“아, 그러니까 왕 정전기 말이야. 머리가 따끔거리고 머리카락이 더덕더덕 붙어서 안 떨어진대.”
내 마법 보닛은 내가 신성력이 없는 것에 착안해 마력을 듬뿍 넣어서 만든 것이었다.
신성력이 적으면 모를까, 레오폴트처럼 신성력을 많이 타고난 이가 쓰면 부작용이 올 거라고 했다.
‘신성력 적은 사람만 쓸 수 있는 거라서, 테오도르가 사업상 알게 된 평민 부호에게 선물하는 거라며 제작했다고 했지.’
레오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충 이해한 낯을 지었다.
납득했으니 됐다. 나는 안심하며 보닛의 리본을 묶었다.
오늘처럼 복작대는 날 사람들 틈에 적당히 녹아들기 위해, 마법 보닛을 쓰고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리본도 잘 묶으시네요.”
“으응, 패티한테 묶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오늘도 레오폴트의 칭찬 한 스푼. 하긴, 옷도 혼자 안 입는 귀족들 눈에는 리본 스스로 묶는 게 생소해 보일 거였다.
“어머, 전하!”
“그러고 나가시게요?”
내가 마법 보닛을 쓴 채 레오폴트와 방을 나서자, 밖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응, 레오폴트가 내 호위 소대에 누가 들어올지 궁금하다고 해서.”
“어머나, 그러셨구나.”
“그래요, 그래요. 소공자님이 봐주시면 좋죠.”
두 여인의 광대가 한껏 치솟는 것에, 나는 그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들이 놀려먹어서 레오폴트가 질투하는 줄 아는 거지.’
뭐, 그리 생각해주는 덕에 마음 놓고 프리지어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조금 덜 괘씸히 여겨줘야지.
성기사단과 황실 기사단, 그러니까 제국군의 본부가 자리한 수선화궁은 멀리서 보기에도 부산스러웠다.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연무장으로 사람들이 한껏 몰려들고 있었다.
지원자들은 시종들과 함께 입궁했지만, 그들의 지인이나 보호자들이 참관하러 오늘 따로 온 탓이었다.
“어젯밤부터 심사를 시작했다고요?”
“응, 단체 생활에 잘 적응할지 살펴본다면서.”
“혹시라도 잠꼬대가 심하다거나 자면서 옆 사람을 걷어차면 탈락인가요?”
“으음, 글쎄.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걸 텐데…. 아마 사회성이 아주 떨어지지 않는지 정도를 보는 것 아닐까?”
“그건 어떻게 보는데요?”
“글쎄. 시간을 안 지킨다거나, 협동심이 없다거나,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거나…?”
나는 전생의 관찰형 예능에서 비호감으로 낙인찍힌 행동들을 애써 떠올리며 막연하게 말했다.
“제가 나중에 성기사단에 지원할 때도 이런 심사를 거칠까요…?”
“설마. 너는 검술 하나만으로도 바로 임관할 수 있어.”
나는 예정된 미래를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는 어렸을 때 병약했던 탓에 신성력 운용력이 다소 부족한데도 검술이 너무 뛰어나 수련생 시절을 거치지 않은 채 임관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특혜 의혹이 불거져 그의 기사단 생활에 불화가 생길 예정이었지만…. 뭐, 지금은 신성력 수련 열심히 했으니까.
‘공작가 후계자한테 고작 그런 걸로 특혜라고 하다니. 다른 차별은 전생보다 심하면서, 의외의 부분에서 열려 있는 건가?’
그런 것을 생각하는 내 얼굴을, 레오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 보닛을 쓰니까 얼굴이 달라 보이기는 하시지만, 표정은 그대로네요.”
“내가 무슨 표정 지었는데?”
“제가 절대 못 이기는 표정요.”
푸우, 레오폴트가 또 입술을 빼죽 내어 물고서 한숨을 포옥 쉬었다.
얘는 어린애가, 한숨 쉬는 걸 어디서 배운 거야?
나한테서 배웠다는 답은 생각도 못 하고서 그의 손을 잡아 연무장 쪽으로 재촉했다.
연무장에서는 한창 체력 심사가 진행 중이었다.
연무장의 입구와 연무장을 둘러싼 화단은 모두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내 키로는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뿐이었다면 다리 사이로라도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보닛을 쓴 만큼 황녀 전하의 기품은 홀랑 팔아먹고서 그렇게 생각했다. 지원자들의 친구들이 대부분인지 우리 눈높이가 딱 가로막힌 것이었다.
“잘 안 보이는데요…. 아예 안으로 들어가심이 어때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뻔히 들여보내 주겠다.”
“보닛을 벗으시면….”
“그럼 지원자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까? 방해되기는 싫은데….”
나와 레오폴트가 사람들의 벽 뒤에서 우물쭈물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53번 탈락!”
“9번, 코스를 벗어났다. 탈락!”
연무장 안쪽에서는 지원자들의 탈락을 알리는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란셀 목소리네. 소대장이어서 심사를 총괄하는구나.’
1차 심사인 체력 심사는 6소대에서 주관하고, 면접은 언니들이 본다고 했으니까.
타탓, 탓, 타탁.
모랫바닥에 자갈돌 긁히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심사의 일환으로 달리기를 하는 중인 듯했다.
‘어떡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못 보면….’
그리 고민하면서 흘끗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우리를 따라온 오늘의 호위 기사 스콧과 유진이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6소대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려서 오늘 심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내 호위를 맡게 된 거였는데….
‘종자로 들어오는 수련생들이 자기들 제자가 될 건데, 보고 싶지 않을까?’
연무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그 안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추억에 잠긴 듯도 했다.
나는 사람들 틈을 살피려는 레오폴트를 톡톡, 치고는 두 사람을 눈짓했다.
쟤들 꼬셔 보자.
좋아요!
흠흠, 나는 스콧과 유진을 향해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말을 걸었다.
“있지이.”
“네, 네.”
전하, 얼결에 그리 내뱉으려던 스콧은 대번에 입을 다물었다.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방법, 아는 거 없을까? 우리가 사람들 다리 사이로 볼 수도 없고 말이야….”
내 입에서 ‘다리 사이’란 말이 나온 순간 두 기사가 화들짝 놀랐다.
왜 없겠는가.
이 연무장 또한 스콧과 유진이 수련생 시절까지 합치면 15년을 구른 곳인데.
스콧과 유진은 다른 이들이 나를 심사장에 오지 못하게 했는데 이래도 될지 잠시 머뭇대는 듯했다.
“경들도 어엿한 6소대 기사들인데, 이렇게라도 참관하면 좋을 듯하구우….”
나는 그들을 위하는 척, 그들의 반항심을 슬쩍 긁어 보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심사에서 빠지는 건, 그래. 좀 억울하지.
내 말에 스콧과 유진은 재빨리 눈빛을 교환하고는, 우리를 연무장 뒤편으로 안내했다.
“뒤편 창고 쪽으로 가면 방해 안 하면서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사실 위험할 것도 없으니까요.”
후후. 쉽다, 쉬워.
‘레오폴트 앞에서 과보호하는 티 못 낼 때도 됐고 말이야.’
나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따라갔다.
스콧과 유진이 안내한 곳은 연무장 뒤편에 있는 쪽문이었다.
“기사들이 땡땡이칠 때 쓰는 문이야?”
“그럴 땐 보통 개구….”
“아뇨,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전하.”
6소대 막내인 스콧이 무방비하게 입을 열자, 유일한 여성 기사인 유진이 그의 발을 재빨리 밟으며 답했다.
뭐, 이미 답은 들어버린 셈이었지만.
‘엘리트 기사들이라도 땡땡이는 다 치는구나.’
쪽문을 통과하여 창고를 끼고 돌아가니, 연무장 쪽으로 길게 화단이 있었다. 그 뒤에 앉으면 관목에 가려 눈에 띄지 않을 듯했다.
나와 레오폴트는 관목 사이로 연무장 쪽을 빼꼼히 내다보았다. 열과 오를 맞춰 선 지원자들은 상기된 얼굴로 작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이는 것이, 달리기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흔적인 듯했다.
“단거리 달리기에서 벌써 탈락한 이들이 있다니.”
“쯔쯔, 정식 입단 심사였으면 체력 기록을 다 적어 냈을 테니 서류 심사에서 걸러졌을 테지.”
그리고, 거기에 따라붙는 스콧과 유진의 가차 없는 평가…. 어느 세계나 선배들은 다 똑같은 걸까.
내 호위 소대에 연줄을 대겠답시고 적당히 조건 맞는 아이들을 지원케 한 가문들이 없을 것도 아니니, 자격 미달의 지원자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어떤 시험이 남았어?”
내가 스콧과 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순발력은 달리기에서 봤겠고. 매달리기, 윗몸 일으키기, 오래달리기, 기초 검술 초식 같은 게 있겠네요.”
“대련 같은 건 안 해?”
“네. 수련생을 뽑는 거니까요.”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무장 쪽을 보았다.
내 옆에 앉은 레오폴트는 방금 들은 심사 과목들을 주워섬기며 중얼댔다.
그가 볼 입단 시험과는 꽤 다르겠지만, 지금은 성기사단이라는 말만 들어도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오, 보세요, 전하.”
스콧이 고개를 낮춰, 연무장 오른편을 내 눈앞에서 손짓해 보였다.
“저기 철봉들이 보이시죠? 저기서 매달리기를 하려나 봐요.”
“으응? 그러네…?”
거기에는 분명 철봉처럼 보이는 것도 여러 개 있었고, 철봉에 닿지 않는 이들을 돕기 위해 호위 기사들 중 가장 큰 브랜든과 앤디가 그 근처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워낙에 멀어서 잘 보이지 않을 뿐.
‘쌍안경을 어디 뒀더라.’
내가 드레스의 호주머니를 더듬으며 미간을 찌푸릴 무렵이었다.
“경들은 저 먼 곳도 다 보이세요?”
레오폴트가 해맑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