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조력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4)
내 예상대로인 그레이스의 질문에 나는 생긋 웃었다.
‘일부러 좀 자극적으로 말했는데.’
대화가 생각대로 흘러가, 나는 자못 흡족했다.
구상의 시작은 케인을 찾아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지만… 이는 한편으로 황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신성력도 없는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황실에 보답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
‘나는 12년 뒤의 미래를 아니까.’
레오폴트의 정적들이 마침 황실에도 골칫거리가 된다는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사랑을 도와주는 김에 우리 가족들도 더욱 평화로울 수 있다면 일석이조일 테니까.
나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단언했다.
“제국의 체제 아래서 권력을 쥐고 있으니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황실의 신성력이 막강하니, 체제 전복은 꿈도 못 꿀 거였다.
“다만 민심을 뒤흔들면 저들이 득세할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여긴다고는 생각해요. 황실파를 누르는 건 그들의 숙원이니까요. 그 때문인지 정보 길드가 성행하고 있다고 들었고요.”
나는 훗날 귀족파의 해결사인 루시페우스가 정보 길드를 활용해 음모를 꾸몄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알비누스 후작가와 루시페우스의 동태도 미리 주시해 놓으면 도움이 되겠지.’
얼마 전 성내에서 마주친 그 아이가… 그리되리라고는 선뜻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그들과 비슷한….”
“네,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대륙 내 첩보망을 만들고 싶어요. 이번에 제가 제 호위 소대에 평민 수련생을 들이기로 한 것 아시죠? 그 아이들을 활용해서요.”
“굳이 새로 창설하는 부담을 질 이유는?”
황실 기사단에서 동대륙과 남대륙 등 다른 대륙에 깔아 놓은 첩보망이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떤 조짐을 미리 파악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제국 내에서 귀족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할 거예요.”
나는 노파심에 덧붙였다.
“제국군과 경시청의 수사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고요.”
귀족파를 주시해야 한다는 내 말에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레이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연히 일리가 있겠지.
10년쯤 뒤에 황제파와 귀족파가 공공연하게 대립하려면, 지금쯤 그 균열의 조짐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네가 키운 기사들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고?”
“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이리저리 굴려보면서 어떻게 쓸 수 있을지 가늠해 보려고 해요. 제 예산은 내탕금밖에 없으니 언니께서 지원해 주시면, 언니께 필요한 일에 쓰도록 할게요.”
“겉으로는 네 호위 소대인 것으로 하면서 말이지.”
“네. 제가 성년이 되면 언니께서 쓰임새를 판단하셔서 적당한 직책을 주시고요.”
그레이스의 다부진 미간에 진중한 실금이 갔다.
간단한 고민은 아닐 거였다. 이게 잘만 된다면 그레이스가 시작부터 직접 관여한 일종의 첩보부가 신설되는 거니까.
반대로 이것이 수면 위에 오른다면 정치적 공세에 시달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순진무구한 열 살배기 막내 황녀님이니까. 사람들은 꿈에도 모를 거야.’
한참을 고민하던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어떤 지원을 해주길 바라니?”
“이번에 6소대 수련생으로 지원한 종자들이 많아요. 그들의 신상을 보다 면밀히 검토하고 싶고,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려면 사회적인 위신이 서야 하니 기사 서임을 받은 이후 숙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네 호위 소대에 들어갈 이들이면 신상 검증은 몇 번이고 꼼꼼하게 해야지. 네 제안과 별개로 그건 이 언니가 맡겠다.”
그레이스는 무엇도 즉답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나는 그레이스를 반쯤 설득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내 호위 소대의 수련생을 들이는 일은, 황태자와 성기사단 3대대장인 2황녀 로젤리아의 합작 사업이 되고 말았다.
그레이스는 그 길로 서류 심사에 합격한 70여 명을 대상으로 밀접 심사를 시행했다.
‘일종의 뒷조사랄까, 뭐랄까.’
어린 시절의 평판은 어떠한지, 가정환경은 어떠한지, 추천한 기사와 그릇된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등등….
훗날 그레이스의 정권에서 일할 나의 심복을 구하는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예정보다 심사 기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성기사단의 수사대와 경시청, 그리고 지방군까지 동원했으니… 크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신전 연락책을 가동해서 대민 행정 담당 신관들에게 문의도 넣어볼게요.”
그뿐만 아니라 레베카는 신성력과 신앙심이 결부된다며 신앙심 검증을 하겠다고 나섰으며.
“제가 빠질 수 없죠. 제가 친분을 쌓게 된 길드가 몇 있으니.”
자선 재단 사업을 하면서 정파를 막론하고 귀족들과 친분을 쌓은 테오도르의 인맥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정보 길드에 의뢰해 기사들이 양지에서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수집하기까지 했다.
‘나 잠행 나간다고 마탑 최신 마도구 공수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기사 지망생 애들 뒷조사하는 데 길드까지 쓸 일이야? 과하다, 과해….’
이 모든 것들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에 뒤이은 내 형제들의 과보호…로 해석되었다.
눈치 좋은 이들은 황태자가 4황녀인 나를 언젠가 중용하려는 신호임을 알고 때늦게 아쉬워했지만.
‘후후, 계산기 다 두드리고 나면 이미 늦은 거라고.’
어차피 그렇게 밀어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선발된 50여 명의 지원자들은 곧바로 2차 심사를 보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케인이 끼어 있었다.
‘아버지가 로즈버리 남작가를 위해 몇십 년을 일한 데다 지금은 집사이기까지 하니 신상이야 완벽 보증이지, 뭐.’
2차 심사는 황궁 시종들이 지원자들을 찾아가, 1차 통과를 알리는 동시에 그들을 황궁으로 데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서류 지원자와 다른 이를 대신 심사에 보내는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간단한 면접이랑 체력 심사 정도로 진행한다고 했지만…. 시종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본다고 했지. 첫날 하룻밤 재우면서 생활 습관도 본다고 했고.’
역시 과하다, 과해.
뭐, 황실 직계를 모실 테니 인성을 꼼꼼히 따지는 것도 맞기는 하지만.
나는 케인에게 맞닥뜨릴 시련을 따져보았다.
‘케인이 원래 일하던 황성 수비대는 황실 기사단에서도 고되기로 유명한 데니 체력 심사에서 떨어지진 않겠고. 인성은…. 원작 선역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원래는 이렇게까지 지원자가 몰릴 줄을 몰라서, 적당히 케인을 붙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뒷배 없이도 기사가 될 애니까 어떤 테스트에건 쉽게 떨어지진 않겠지만…. 경쟁자가 꽤 많아서 걱정이네.’
2차 지원자들이 속속 황궁의 성기사단 본부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 방에 앉아 초조한 마음을 숨긴 채 비타민 폭탄 오렌지 생강차를 호로록 마셨다.
‘가장 최선은 내가 직접 심사관이 돼서 케인에게 좋은 점수를 주는 거겠지만….’
열 살이 되었대도 공식 석상도 아닌 자리에 나를 노출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언니들은 모두 저들이 알아서 한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냥 놔둘 수는 없지.
‘괜찮겠거니 놔두면 안 괜찮아진다고.’
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케인이 심사관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을 몇 가지 구상했다.
만에 하나, 언니들을 졸라서 특별 추천으로 케인을 붙일 각오도 해두었고.
‘그러려면 심사장 근처의 동향을 살펴야 하니까….’
나는 내일 어떻게 하면 자연스레 프리지어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그 계획을 궁리했다.
“전하, 놀이 친구를 뽑으신다고요?”
“왔어?”
2주에 한 번 돌아오는 레오폴트와 만나는 날.
때마침 그날이 2차 심사와 겹친 것은 운명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날이 안 겹쳤다면 핑계를 대서라도 불러들였을 거지만. 억지 부릴 일 줄어서 다행이지 뭐야?’
나는 레오폴트와의 시간을 기회로 삼을 요량이었다.
같이 놀러 나온 척하면서 심사장을 기웃거리려고.
그런데 응접실에 들어선 레오폴트는 심통이 난 듯, 그 볼이 퉁퉁한 것이 아닌가.
“잘 지냈지?”
“황궁 도착하기 전까지는요.”
“얼굴이 왜 그래? 토라진 애처럼.”
“토라진 거 맞나 보죠.”
내가 가차 없이 하는 말에, 레오폴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벌써 우리가 친구가 된 지도 3년이 넘었지.
3년이라는 시간은 눈동자도 똑바로 못 두던 레오폴트 어린이가 어느덧 황녀 전하께 세모눈을 뜰 수도 있는 세월인 것이었다.
“너, 눈빛이 좀 무엄하다?”
“전하께서 놀이 친구를 뽑으신다면서요!”
“누가 그래?”
“…전하의 시녀들요.”
나는 반사적으로 문가를 노려보았다.
메리제인과 패티샤는 이미 다과를 준비하겠답시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애한테 별 농담을 다 했지? 나 원 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소공자님 긴장하셔야겠어요, 분명 그런 소리를 했겠지. 나랑 레오를 못 엮어서 안달인 애들이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간신히 10대에 들어서서인지, 한숨도 이제는 제법 한숨처럼 나왔다.
“놀이 친구 뽑는 거 아냐. 너도 얼마 전에 황성에 돌린 6소대 수련생 선발 공고 알잖아?”
“어쨌든, 저로는 부족하신 거잖아요?”
에엥? 나는 조금 뜨악한 표정으로 레오폴트를 쳐다보았다.
이게 웬 선 결혼 후 연애물에서 이혼 요구한 부인에게 집착하는 남주 같은 대사람?
“전하께서 2주에 한 번 이상은 입궁하지 말라고 하셔놓고 상주할 또래 기사들이 필요하다고 하셨다면, 그게 그 소리지 뭐예요.”
레오폴트는 여전히 심통이 나서 입술을 빼죽거렸다.
귀엽…긴 한데. 뭐에 기분이 상한 걸까?
“내 호위 기사들도 언제까지나 내 호위만 맡을 수는 없으니까. 후임 양성하라고 하는 일이야.”
“그래도 또래 기사가 필요하다고 하셨다면서요?”
…‘또래’라는 말에 꽂혔나 보구나.
아니, 또래를 갖고 늘어진 건 만찬장에서만인데, 이 말이 또 어떻게 흘러가서 메리제인도 알고 패티샤도 알아서 이 사달일까.
‘한 번쯤 내 사생활 존중해 달라며 사춘기 행세를 해야겠네.’
황실 직계에 사생활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아무튼, 오늘만큼은 레오폴트의 협조가 필요한 터. 나는 레오폴트를 달래기 위해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레오. 또래라고 해봤자 수련생으로 들어오려면 우리보다 서너 살은 많아야 하고,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기사잖아. 너는 친구인걸.”
‘친구’라는 부분에서 레오폴트가 조금 누그러진 듯 귀를 쫑긋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뭔가 단단히 작정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연신 꿍얼거렸다.
“저보고 기사 되라셨잖아요. 제가 전하 말씀 듣고 성기사단 들어가려고 얼마나 신성력 수련을 열심히 한 줄 아세요?”
“레오.”
“종소리 울린 거 아니고요.”
너무 자주 물어본 끝에, 레오폴트는 어느새 종소리 타령을 스스로 주워섬길 정도가 되었다.
그래, 친구 사이에 서운할 수도 있지….
“알아, 레오. 그런데 이번에 뽑는 수련생들과 너는 다르잖아.”
“…….”
레오폴트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분이 풀어졌는지, 불퉁대는 기색도 누그러진 채였다.
“그들은 내 수족이 될 사람들이야. 내 부하가 될 거라고. 너랑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