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조력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3)
이윽고 지원 서류들이 황궁으로 날아들었다.
서류 심사는 모집 취지에 걸맞게 그 출신 영지가 기준 이하로 가난한지 확인하는 정도여서, 케인이 떨어질 리는 없었다.
지원만 했다면.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원자들의 서류를 훑었다.
첫 심사는 3대대의 인사과에서 할 거였지만, 설렌다는 이유로 그 사본을 받아본 차였다.
「마르셀 | 15세 | 게르닉 자작령 출신」
「페터 | 14세 | 롬멜 남작령 출신」
「엘런 | 17세 | 갈리아 자작령 출신」
지방에서 기사가 되기 위해 올라오는 소년 소녀들의 수가 어찌나 많은지…. 로즈버리만큼 곤궁한 영지 출신을 지원 자격으로 삼았는데도 그 수가 꽤 많았다.
꽤…. 아니, 정말로 많았다.
“아니, 왜 넘겨도 넘겨도 끝이 안 나?”
“지원자가 거의 100명은 됐다나 봐요.”
“배액? 제국에 그렇게 힘든 영지가 많았어?”
내 질문에 패티샤가 웃으며 내 앞의 잔에 자몽 오렌지차를 채워주었다. 잠행을 다녀온 이후로, 한 달 내내 이런 비타민 폭탄 차만 내주는 것이었다.
“사정이 어려운 곳에서 아이들이 상경하자면, 기사가 되는 게 출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니까요. 돈으로도 그렇고, 명예로도요.”
“그렇구나….”
머리로만 생각해서는 알 수 없는, 이 세계의 생리 중 하나일까.
그러고 보니 몇몇 영지 출신의 지원자 비중이 높았다. 케인 외에도 로즈버리령에서 올라온 다른 지원자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렇게 지원자가 많은데, 서넛 뽑고 마는 것도 너무 인색한가….’
케인 하나만 달랑 뽑을 순 없어서 서넛 정도를 뽑기로 이야기해둔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케인이 합격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열몇 명은 뽑고 싶었지만….’
내 곁에 새로운 이들이 갑작스레 많아지면 또 다른 위험이 생길 수 있다는 로젤리아의 단호한 거절에 우선은 한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이 아이들 중에 원작에서 이름 좀 떨친 애 있으면 미리 포섭해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며 서류를 훑는데…. 흐음, 이름들이 다 낯설었다.
‘원작에서 딱히 악행 저지른 적 없는 이들이란 거겠지. 하긴, 어차피 악역들은 모두 귀족들이었으니까.’
평민 기사 출신의 악역은 없었으니 아무나 뽑아도 상관없으려나.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서류들을 넘기던 내 눈에, 드디어 기다리던 이름자가 들어왔다.
「케인 | 16세 | 로즈버리 남작령 출신」
‘찾았다!’
혹시라도 신청서가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래, 그 정도로 소문을 냈는데.
‘얘를 6소대에 넣고, 숙소 생활을 시키다가 나중에 기사 서임받을 때쯤 선물이라고 2구역 집 하나 하사하면 아멜리의 근거지가 업그레이드되는 거야!’
그 김에 겸사겸사, ‘공주와 쏙독새’의 미트볼과 ‘폴리나네’의 밀빵도 사오라고 하고 말이다.
‘지금 그 동네에 살고 있을 테니. 어려운 임무도 아닐 거고 말이야.’
히힛, 나는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직 얼굴은 못 봤지만, 이 소년의 10년 뒤 행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인지 나는 굉장히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레오폴트 다음으로 첫 등장인물 지인이 될 테니까.
그것도 다른 누구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뽑아, 내게만 충성할 사람 말이다.
‘케인이 옛 아가씨인 아멜리에게 의리 챙기던 거 생각하면, 나한테도 충성하겠지.’
나는 흡족한 마음에 어깨를 들썩이며 다른 서류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내 사람, 내 수족, 내 부하, 내 발닦개.”
어찌나 신났는지, 나는 근본 없는 노래까지 절로 흥얼거리게 되었다.
내 옆에 서 있던 패티샤가 목구멍으로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것마저 개의치 않을 정도로, 나는 내 계획이 거의 성공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럼, 또 어떤 애들이 뽑히려나. 아니, 로젤리아랑 얘기 잘해서 조금 더 넉넉히 뽑을까?’
이건 케인뿐만 아니라 모든 수련생들에게도 좋은 기회일 테니 말이다.
이 서류 더미를 보기 전까지 생각도 못 했던 계획들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세워지기 시작했다.
‘아예 본격적으로 내 직속 소대를 꾸려 볼까. 내가 성인이 되면 호위 수는 좀 줄여도 되겠지만, 눈과 귀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케인에게 기회를 줘서 그의 충성을 사려던 만큼, 그런 이들을 많이 만들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였다.
내가 성인이 되어 무슨 일을 맡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기왕 뽑으면 케인과 똑같은 대우를 해줘야 할 텐데.
‘사실 서넛한테 집 구해주는 것도 내 내탕금으로 가능할지 계속 고민하긴 했었지….’
으음, 그래.
이번에 뽑는 수련생들은 다 내 수하가 될 거니까, 높은 확률로 나중에 내 일을 돕게 되겠지.
그렇다면, 내가 상의해야 할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고민을 마치고 가뿐한 얼굴로 패티샤에게 말했다.
“패티, 황태자 전하께 조만간 오찬 함께해 주십사 청해줘.”
그레이스는 바로 이튿날 내게 오찬을 청했다.
석류궁에서 남편 에델 공과 지내는 그레이스는 어느새 딸 하나 아들 하나, 황손 둘을 야무지게 생산한 ‘워킹맘’이었다.
거기에 국정도 바쁘니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만나기 힘들 정도였다.
“바쁘신데 뵙자고 해서 죄송해요, 언니.”
“무슨 소리니, 세실. 자매끼리 오붓하게 식사하는 것도 미리 정해야 한다는 게 슬플 따름이란다.”
곧 서른이 될 그레이스는 여전히 멋졌다. 이제는 관록이 깃든 기품이랄까….
‘여기의 서른은 전생의 서른이랑은 장르가 다른가 봐.’
전채로 나온 새우 냉채를 거의 다 먹었을 때, 한쪽으로 길게 내린 앞머리 너머로 그레이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 세실이 무슨 청이 있어서 단둘이 보자고 했을까?”
실리를 중시하는 그레이스답게, 오찬 시간의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거였다.
꿀꺽, 나는 입에 든 것을 삼키고 재빨리 레몬 조각이 들어간 물로 입가심했다.
“언니, 제가 성인이 된 후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았는데요.”
“해군 제독이나, 재상 말고?”
그렇게 말하는 그레이스의 말소리에 웃음기가 배어났다.
나도 내 미래를 어떻게든 안전하게 만들지 못해 안달하던 그날의 형제들이 생각나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진짜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렇구나.”
그레이스가 언제나처럼 멋있는 미소를 그리며, 의자에 깊이 기대어 앉았다.
“그래, 세실 너는 예전부터 줄곧 황궁에 남고 싶다고 했었지. 행정부 일을 맡아서 말이야.”
“네, 언니.”
“벌써 마음을 정한 거니?”
네 나이 열 살인데. 그레이스가 빙긋이 웃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언니께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세실리아의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언니, 저는… 귀족 사회와 민심을 감찰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감찰이라?”
“신께서 보우하셔서 황실이 부강하고 제국군이 막강하기는 하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죠. 혹시 제국에 해가 되는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큼큼, 나는 목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낮췄다.
“예를 들면 귀족파의 수상쩍은 움직임이라거나.”
“귀족파는 황실을 견제하여 폭정을 막는 소금과 같은 존재다.”
그레이스가 짐짓 얼굴을 굳히며 즉답했다.
말은 그리 해도, 그것이 그레이스의 진심은 아님을 나는 알았다.
아수라마수라는 황권이 굉장히 강력했다. 마계의 침략을 막아낸 강대한 신성력으로 본대륙을 수호하는 황실이었으니까.
신성력이 곧 권력인 신성 시대에 성기사단장도, 교황도 대부분 황실에서 배출되었고.
하지만 그 권력도 500년이 지나면 의심하는 자들이 생기는 법.
귀족파들은 슬금슬금 반황실파처럼 굴기 시작할 거였고, 그것이 본격화되는 때가 ‘공제눈’의 무대였다.
그래서 남주인 레오폴트와 서브 남주인 루시페우스의 갈등은 한편으로 황실파와 귀족파의 반목이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은 채, 그 의중을 알겠다는 것처럼 미소 지으며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레이스는 뜸을 들이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종들이 빈 접시를 치우고 메인 디시를 가져왔을 때.
“부를 때까지 나가들 있거라.”
그레이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종들은 나와 그레이스의 잔에 물을 채우고는 모두 식당에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그레이스는 식탁에 팔꿈치를 올려 손깍지를 꼈다.
이럴 줄 알고 지시한 건지, 메인 디시는 식어도 괜찮은 칠면조 샌드위치였다.
“그래. 귀족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거지.”
“네. 귀족 사회를 감찰하려면 밑바닥에서부터 캐내야 할 것들도 있으니까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막둥이다운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세실리아의 외모에 걸맞은 동생 언어로는 그레이스를 설득할 수 없었으니까.
그레이스는 내 엄마가 아니라 언니였고, 나아가 내 주군이 될 사람이었다.
“언니의 혼처를 정하실 때 귀족파에서도 그들의 자제를 부마로 밀었다 들었습니다. 에델 공과 혼인하신 것은 합당한 선택이었음에도 귀족파는 황실파만 싸고도는 처사라고 불만이 많았다고요.”
합당하기는 정말 합당했지.
재상인 로젠하르트 백작은 역사에 남을 명재상이고, 나의 형부인 에델 공은… 정말 키 크고 다정한 미남이니까.
그와 별개로, 로젠하르트 백작가에서 지참금 명목으로 채굴량이 어마어마한 수정 광산 하나를 100년간 황실에 무상 임대하기로 한 게 결정적이었다.
그레이스가 결혼하기 얼마 전에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큰 피해가 있었으니, 신성력을 저장하고 증폭할 수 있는 수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성기사단의 무기에는 수정이 필수였으니까.
“귀족파의 공세는 심해지면 심해지지, 덜해지지는 않을 거예요.”
“…….”
내 단언에 그레이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건 일종의 예언이었다. ‘공제눈’의 무대가 시작되면 귀족파의 갖은 음모가 정세를 어지럽힐 거니까.
“그들을 탄압할 건 없지만 수작에 놀아날 필요도 없지요. 아버지의 치세가 태평성대라지만 그렇다 해서 하찮은 수를 묵인할 이유도 없지 않겠어요?”
나는 그레이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래의 주군이 될 언니가 내 이야기에서 나의 쓸모를 찾길 바라면서.
“…혹시 렌틸 자작과 이야기한 바니?”
“아뇨, 렌틸 자작은 정치에 개입하기를 꺼리니까요.”
렌틸 자작은 거침없이 사회 비판을 하는 사람치고는 정치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학자의 탑 간부여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마 그녀의 출신 가문이 정치적으로 세력이 큰 가문이어서라고 나는 추측했다.
“이번에 잠행 나갔을 때 시장의 백성들을 보면서 느낀 거예요. 민중들 사이에서는 사소한 일도 크게 부풀려지기 쉽고 민의는 거기에 쉽게 휩쓸리죠.”
어렸을 때 잠행을 많이 다닌 그레이스에게 공감대를 사기 위한 이야기였다.
‘내가 잠행을 나간다고 했을 때 가족들 중 유일하게 지지해줬을 정도로 그레이스는 백성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으니까.’
나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황실보다는 귀족이 그들에게 가까우니, 자칫하다가 귀족파의 선동에 민심이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귀족들이 정보전을 할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거지…. 귀족파가 황실을 무너뜨리려 할 거라 생각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