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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6화 (16/220)

16화. 악역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4)

“마력이 없는 사람이 반지를 쓰면 체력이 손상되잖니.”

그렇다. 나는 신성력뿐 아니라 마력조차 없는, 정말 비판타지적이기 그지없는 체질을 타고난 것이었다.

“너는 특별하잖니. 부디 이걸 쓸 일은 없어야 해.”

‘특별하다’라…. 황실 가족들은 신성력이 없는 나의 체질을 두고, 에둘러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내용 자체가 기밀인지라 황실과 유모만 사용하는 표현이었지만.

“걱정 마세요, 언니. 레베카 언니의 신성력도 있고…. 란셀 경과 브랜든 경이 같이 가니 괜찮아요. 테이 경과 제이크 경이 잠복하여 따라온다고도 했고요.”

“그래, 꼭 그들 말 잘 듣고. 다음에 나갈 땐 꼭 미리 나랑 계획을 잡도록 하자.”

로젤리아의 엄격한 눈동자에선 걱정스러운 빛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쓴 보닛이 머리 색을 바꾸고 인상을 흐리게 하는 마도구인지라 내가 다갈색 머리를 가진 다른 얼굴로 보일 텐데도, 로젤리아의 낯에는 걱정과 사랑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역시 로젤리아도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날 사랑해. 다음에도 로젤리아랑은 안 나가겠지만…!’

정말, 이 잠행을 따내기 위해서 얼마나 지난한 설득의 시간을 거쳤던가.

“책으로만 공부했던 제국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싶어요, 아버지. 언니들도 테오 오라버니도 다 열 살에 첫 잠행을 나갔다던데요.”

“그건 맞는다만, 아가. 너는 특별하지 않느냐.”

“제가 조금 모자라게 태어났으니 조금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못되게도, 이리 말하면 아버지가 당황할 것을 알았다.

“아가, 세실. 모자라다니. 그런 뜻이 아닌 걸 알지 않느냐.”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두 눈에 담고 싶어요. 제 장래 희망이 언젠가 궁내 요직을 맡아서 아버지를, 장래에는 황태자 전하를 보좌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처럼, 신성력이 없는 나를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과보호하는 가족들을 한껏 졸라야만 했던 것이었다.

얼마나 오랜 줄다리기 끝에 타결되었는지, 날은 벌써 봄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추울 때 안 나와서 다행이긴 하지.’

마차 바깥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가벼운 옷차림을 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내가 탄 마차가 온도 조절 마법을 건 세실리아 전용 특제 마차여서 아직 바깥 날씨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늘 많이 돌아다녀야 할 텐데, 옷이 안 무거워서 다행이야.’

이렇게까지 내가 잠행에 목숨을 건 것은, 여주인공 아멜리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궁 안에서 백날 연회를 열어봐야 절대 만날 수 없는 아멜리의 평민 조력자들을 만나는 것. 그게 나의 진짜 목표였다.

귀족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악역인데, 조력자들은 대부분 평민이니 신데렐라 신세가 안타까웠다.

‘물론 지금은 황녀가 하나 추가되었지. 후후.’

산간벽지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로즈버리 남작가의 둘째 아멜리는 지금으로부터 12년 뒤,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황성에 올라온다.

그런데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 영주 가문이 황성에 인맥이 있을 리가.

그래서 아멜리가 의탁하는 곳은 기사가 된 아들을 따라 상경한 옛 집사 니콜슨의 집이었다.

평민이 황성에 집 구하기란 역시 어려운 일인지 그들의 집은 3구역에 있었는데….

‘아무리 한미한 가문이래도 귀족은 귀족인데, 부호들이 사는 1구역도 상인들이 사는 2구역도 아닌 3구역이라니!’

3구역은 치안도 안 좋아서 아멜리에게 소소한 고난을 안겨줄 예정이었다.

뿐만이랴, 바래다준다는 레오폴트에게 3구역 주소를 대니, 가짜 주소를 대며 에둘러 거절하는 건 줄 알고 레오폴트가 잠시간 마음을 접는 일도 생긴다.

‘반드시, 최소 2구역 집을 구해준다.’

그래서 내 목표는 황성에 올라와 있을 니콜슨의 아들, 케인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어떻게든 내 수하로 들여서 후원하리라.

‘지금 어디 귀족 가문 사병들의 종자로 일하고 있을 거니까….’

상업지구의 으슥한 곳에 마차를 댄 뒤 황성 저잣거리로 빠져나왔을 때, 나는 왁자지껄한 시장의 풍경에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

황궁에서 늘 우아하게 이야기하고 품위 있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다가, 고래고래 악을 쓰고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일종의 문화 충격에 빠진 것이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 희미한 전생의 기억이 피어올랐지만, 지금 내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가 질려서, 평복을 한 채 나를 따라온 메리제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왁자지껄하지요? 황궁으로 돌아갈까요?”

“으응, 아냐, 괜찮아….”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횐데!

‘얼른 3구역으로 가서, 아멜리 단골 맛집들이 있는 동네만 찾으면 되는 거야.’

케인이 상경하고부터 살던 동네에 집을 사서 제 아버지를 모신 거라는 설정이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내게는 케인의 집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몇 개 있었다.

그 동네가 원작 초반 아멜리 일상의 주요 배경이었던 덕에, 니콜슨이 아침마다 빵을 사오던 빵집, 아멜리가 혼자 끼니 때우러 가던 음식점 등이 잘 묘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중 한두 가게 정도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운영하고 있겠지.’

다만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물을 수가 없어, 어찌하면 자연스레 3구역으로 갈 수 있을지가 고민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메리제인에게 호기심 가득 찬 낯을 꾸며 물었다.

“메리, 여기가 2구역인 걸까?”

상점들이 많으니 말이야. 나는 그 어떤 특별한 의도가 비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지어냈다.

메리는 흐뭇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아가씨께서는 영명하셔서. 맞아요.”

“그럼…. 3구역은?”

나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빛을 애써 숨기며 메리제인을 바라보았다.

황성과 1구역 안쪽의 타운하우스 밀집 지역만 오가는 자작 영애 메리제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을 짜냈다.

“음, 아마 이 길을 따라 한 시간은 걸어야 나올걸요.”

“한 시간이라고?”

그럴 리가….

전생에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도시들 다 엄청 작다고 했는데. 반나절이면 시가지 다 본다고.

한국인이 쓴 로판이면 끽해야 유럽 스케일 아닌가?

“그…렇게 황성이 넓어?”

“아가씨도 참. 본대륙에서 가장 큰 성이 황성인걸요.”

아, 아직 거리 단위에 익숙해지지 못한 게 패착이었나. 1페로가 말로 한 시간 거리라고 해봐야 내가 말 속력을 모르니까….

‘어쩐지, 고층 건물도 없는데 인구가 엄청 많더라니.’

‘공제눈’ 작가도 나처럼 유럽 여행 안 가본 걸까?

내 낯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는지, 메리제인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아가씨, 혹시 3구역에 가고 싶으셨던 거예요?”

“으응, 그게….”

나는 눈동자를 한 번 굴려, 일행인 듯 일행 아닌 느낌으로 서 있는 두 기사를 살폈다.

란셀과 브랜든. 특히 란셀은 로젤리아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로젤리아의 명이 우선이겠지만, 내가 굳이 로젤리아를 따돌린 것이 바로 이런 돌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지!

나는 최대한 갸륵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메리제인을 올려다보았다.

“기왕이면…?”

눈 깜빡깜빡. 일해라, 세실리아 미모!

‘마법 보닛을 써서 안 먹히려나…?’

하지만 메리제인은 언제나와 같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메리제인은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안 돼요. 절대로.”

메리제인의 단호한 말에 나는 울 것 같았다.

“아니, 왜? 잠행, 시찰, 이런 거 하면 원래 평민들 지구 가야 하는 거 아냐? 응?”

“2지구가 딱이죠. 평민들이 활기차게 일상을 일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요.”

“일상이면 거주 지구에 가서 봐야지. 오늘 란셀도, 브랜든도 있잖아. 다른 기사들도….”

“로젤리아 님께서 절대 2지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단단히 말씀하신걸요.”

“윽.”

일부러 로젤리아와 같이 나오지 않으려고 피했건만, 내가 상상도 못 하던 때에 이미 다들 포섭돼 있었던 것이다.

“경들….”

나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내 뒤의 기사들을 울먹울먹한 눈동자로 쳐다보았지만….

란셀과 브랜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히잉….”

진정 이대로 끝인가? ‘공주와 쏙독새’의 미트볼도, ‘폴리나네’의 밀빵도 못 먹는 거야?

겸사겸사 아멜리 인증 맛집을 가볼 생각에 얼마나 들떴었는데….

이대로 나의 완벽한 계획이 바스러지는 건가.

‘막무가내로 떼를 써볼까.’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한데 이들이 회유될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각고의 조름 끝에 성사되더라도… 기사들만 경을 칠 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로젤리아 언니는 무서운 상관이니까….’

나는 현대를 살다 온 바람직한 주군. 갑질 따위 하지 않아.

의젓한 주군답게 내 욕심쯤 포기할 수 있어.

그렇게 위안 삼아 보았지만…. 어쨌든 간신히 얻어낸 기회를 날리게 된 나는 그저 울고 싶어졌다.

‘히잉, 황녀 다 쓸모없어!’

“아가씨, 그래도 저잣거리 군것질하는 재미도 괜찮으시죠?”

내가 뭘 원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실망한 것만은 알아챈 메리제인이, 솜사탕이며 크레이프 같은 것을 자꾸 권하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맛있긴 한데, 네가 생각하는 만큼 신기한 맛 아냐, 이거….

“이번엔 나 저거 사줘.”

숯불에 구운 파인애플 꼬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왕 나왔으니 본전이라도 찾아야지.

애초에 나와 나올 때 이런 그림을 기대했던 양, 메리는 기꺼운 낯으로 나를 파인애플 구이 노점상으로 이끌었다.

잠행을 나온 것 자체는 좋았다. 책으로만 읽던 생활상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황궁 너머 세계로서의 아수라마수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금은보화로 가득 찬 황실 풍경만 보다가 평민들의 생활을 엿보니, 이 세계가 조금 더 피부에 와닿는 것이었다.

왁자지껄한 시장통에 두려워한 것이 언제였냐는 양, 나는 어느새 이 무질서한 소란에 적응했다.

‘한국인이 만든 세상이라 친근한 구석도 많고.’

전생에 다른 나라 여행 한번 못 가본 내게도 이 저잣거리의 구색이 친숙했으니 말이다.

파인애플 구이를 호호 불어 가며 메리제인과 나누어 다 해치운 나는 또 다른 걸 가리켰다.

“이번엔 저거 사주고.”

내 손끝에는 마시멜로 구이가 있었다.

…신기한 맛이 아니라고 했지, 좋아하는 맛이 아니라곤 안 했다.

오랜만에 먹는 자극적인 맛이 혀를 사로잡고 놓아주지를 않아, 나는 군것질을 멈출 수 없었다.

“2구역에만 머무르시길 잘하셨죠?”

“으응, 뭐….”

노점상에서 이런저런 군것질거리를 끊임없이 즐기는 나를 보고 메리제인은 그리 넘겨짚은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3구역에 못 간 게 보상받을 순 없다고.’

애초에 내가 오늘 먹기를 기대했던 건 3구역의 아멜리 인증 맛집 음식들이었으니까.

‘나중에 누굴 시켜서라도 꼭 미트볼과 밀빵을 맛봐야지.’

사실 음식 그 자체가 궁금하다기보다는 ‘공제눈’ 속 배경에 성지 순례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런 다짐을 하면서 마시멜로 구이 노점상에게 셈을 치르는 메리제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드는 묘한 느낌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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