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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5화 (15/220)

15화. 악역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3)

나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스칼렛이 왜 나를 적대하는 건지.

‘레오를 소문만 듣고 좋아했나? 이 애의 매력은 얼굴을 직접 봐야 진가를 발하는데….’

게이블스 후작가가 귀족파이긴 했지만 그것이 반황실파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반황실파라도 그 댁 영애가 황녀를 미워할 일은 없었으며.

무엇보다 우리는 정말로 오늘이 초면이었다.

‘아차.’

정신이 팔려 표정 관리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네.

한참 얼빠진 표정이었겠지만, 세실리아의 요정 같은 이목구비가 간신히 수습했을 거였다.

내 낯을 한참 들여다보던 스칼렛은 눈치도 없이 생글거리는 레오폴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아우렌바흐 소공자시죠? 처음 뵙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게이블스 영애. 아우렌바흐의 레오폴트입니다.”

오구오구. 처음에 나 봤을 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거에 비하면 많이 컸다, 우리 남주.

스칼렛의 건조한 기색과 레오폴트의 중립적인 태도를 보니, 정말 얘네 둘 오늘 처음 본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럼 도대체 왜 나를…?’

여전히 스칼렛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진 채였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이 불편한 걸까.

그때였다.

“스칼렛, 말은 그리 해도 미래의 가주인 이 오라비를 위해 기회를 잘 잡았구나?”

내가 스칼렛에게 집중하느라 인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새 한 소년이 그녀의 뒤로 따라붙어 있었다.

붉은빛 머리칼을 깔끔히 빗어 넘긴 마르고 길쭉한 소년이었다.

그러니까, 오라비라면….

‘윌로우 게이블스. 게이블스의 개새끼…!’

아멜리같이 한미한 가문의 영애들에게 집적대는 악당 놈.

나는 저 놈팡이의 설정을 떠올리며 작게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면 스칼렛이 아멜리를 괴롭히는 이유 중에 제 오라비를 홀려서…도 있었지.’

절로 드는 꺼림칙한 표정을, 나는 애써 숨겼다.

윌로우 게이블스는 태연자약한 발걸음으로 스칼렛의 바로 옆에 섰다.

같은 예법 선생에게 배웠을 텐데 건들거리는 것이 참 제 인격에 어울렸다.

“게이블스의 윌로우가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양 또한, 미묘하게 허세가 배어났다.

그에 대해 이미 안 좋은 감정을 가진 나로서는 무엇 하나 좋게 봐줄 구석이 없었다.

‘진짜 별로다.’

그 마음을 숨기며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반가워.”

그리고 스칼렛의 기세는 뭔가 더 흉흉해졌다….

뭐지, 왜 이러는 거지? 제 오라비한테 화가 났나? 근데 왜 나를 보면서 표정이 더 굳어졌지…?

‘웃어주면 안 됐나? 설마 나도… 얘를 홀린 셈이 되는 거야?’

내가 스칼렛의 의중을 짐작하며 더욱 깊은 혼란에 빠져갈 때였다.

“전하께서 요정과도 같이 아름다우시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는데, 이리 존안을 직접 뵙게 되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윌로우는, 허리를 숙여 내 눈높이를 맞추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에엥?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그런 것을 느끼하게 말하는 그의 갈색 눈동자는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이거 혹시….

‘황녀에게 다짜고짜 들이대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야? 게다가 난 열 살인데.’

어른의 이성으로 나는 최대한 무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당황했다.

이 개새, 아니 망나니 꿈나무에게 황녀로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그때.

“오라버니, 전하께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칼렛의 고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느끼하게 빙글거리던 윌로우의 얼굴은 일순 싸늘하게 굳었다.

그 변화는 일견 섬뜩할 정도였다.

“스칼렛, 게이블스의 가주가 될 나를 망신 주는 것이냐.”

윌로우가 느릿하게 말했다.

아니, 망신당할 짓을 하는 건 네 편인 것 같은데. 게다가 스칼렛이 한 말은, 맞는 말이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잠시 맞닿아 있었다. 스칼렛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제가 생각으로라도 어찌 그러겠습니까. 다만 전하 앞이니 체통을 지키시라 말씀드린 게죠.”

“체통? 네가 부리는 그 가식을 말하는 거냐?”

“…….”

이건 또 무슨 설정이지? 윌로우가 윽박지르는 것에, 스칼렛은 별다른 대꾸도 없이 표정만 굳히고 있었다.

‘원작에 둘이 붙는 장면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집 오누이 관계 한번 특이하네.’

아무래도 아멜리에게 시련을 선사할 이 가짜 악역 오누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칼렛 캐릭터부터 다시 파악하고.’

내가 거기까지 생각하는 동안, 윌로우는 내내 스칼렛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가워, 게이블스 영식.”

나는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목소리를 또랑또랑하게 내었다.

“오늘은 일행이 있어서 청은 거절해야겠어. 그럼 먼저 가보도록 할게.”

그러고서 나는 레오폴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서둘러 자리를 파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니 윌로우의 표정이 와락 굳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내가 인상을 굳히는 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저, 저, 나를 황녀가 아니라 저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로 본다고 아예 광고를 하지, 나 참….’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빨간 눈의 아이가 꿈에 나타난 것은.

마지막으로 본 것이 내가 레오폴트와 친구가 될 때쯤이었나….

아이는 그새 부쩍 자라 있었다.

여전히 그 창고 같은 방에 있었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체구는 왜소했지만.

다만 쪽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그 붉은 눈동자만은 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창가의 바닥에 옹송그린 채 모로 누워 있었다.

그 곁에는 내가 언젠가 읽었던 제국 귀족 자제들의 필수 교양서 몇 권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글공부는 시켰나 보네.’

발치에는 허름한 트레이에 그의 식사로 제공됐던 것들이 담겨 있었다. 우유에 마른 빵, 감자, 소시지 등등….

양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의 있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그마저도 아이는 별로 손에 대지 않은 듯했다.

‘이 아이가 정말 이 세계에 있는 앨까? 그렇다면 그 가주란 자가 오늘 온 이들 중에 있을 텐데….’

벌컥, 갑작스레 방문이 열렸다.

복도의 불빛이 방 안으로 길게 늘어져 들어왔다. 복도를 이 정도로 훤히 밝히는 재력이라면, 촛대 하나 없는 이 방 세간은 명백한 방치의 흔적이었다.

“야, 이 마귀 놈아.”

변성기가 갓 지난 듯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윌로우 게이블스 또래일까?

복도의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 그 얼굴은, 여느 때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엄청난 소식을 하나 알려줄까?”

방문을 등진 채 모로 누워 있는 아이는, 소년이 무슨 말을 하건 미동도 없었다.

“이 자식이,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윽.”

별로 넓지도 않은 방이어서, 고작 몇 걸음만으로 소년은 아이의 등짝을 걷어찰 수 있었다.

보드라운 양모 슬리퍼를 신었기에 고통이 크지야 않을 테지만, 그런 걸로 폭력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는 건 아닐 거였다.

“기분 좋으니까 이 정도로 봐주는 줄 알아.”

퍽, 녀석이 가벼운 발짓으로 아이의 어깨를 툭 쳤다.

아이의 낯은 여전히 대리석을 깎은 듯 무감정했으나 그 눈빛이 약간, 일렁이는 듯도 했다.

“오늘 황궁에 가서 내 반려가 될 이를 보았지.”

오늘 황궁에 갔다고?

이게 정말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이었나….

“아버지가 어떻게든 나를 부마로 넣으시겠다고 했어. 넌 그러니까, 악마 주제에 감히 황실의 사돈이 되는 거야. 내 덕에 말이야.”

엥, 뭐라고?

쟤가 정말 제국의 귀족이면 그 황실이 우리 가족인데.

그레이스는 결혼했고, 로젤리아는 미혼이지만 쟤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고, 레베카는 사제니까….

‘나?’

왜 다들 나를 못 건드려서 안달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이 풍경이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그 전에 내가 너를 화형대에 올릴 수도 있고.”

녀석이 즐거운 듯 목소리를 울렸다.

화형대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다른 세계나 다른 나라의 일일 수도…. 여긴 화형 없으니까.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아이의 엄마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전사한 기사인 게 확실하니까…. 끄응.’

녀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아이의 머리통을 발끝으로 툭툭 건들다가, 흥미를 잃었는지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아이를 괴롭힐 거리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녀석은, 이내 바닥에 놓인 트레이에서 마른 빵을 하나 쥐어 들었다.

먹고 싶어서 집어 든 게 아닌지 그저 한입 베어 물고는 퉤, 바닥에 뱉었다. 한눈에도 빵은 꽤나 딱딱해 보였다.

“…쯧. 잘 보여라, 이 악마 자식아.”

쾅.

이윽고 문이 닫혔을 때, 그 파동에 떨려나온 듯 아이의 눈으로부터 눈물방울이 또르륵 떨어졌다.

나는 예전 어느 날 그 막사 안에서처럼, 가닿지도 못할 손길로 아이의 이마를 쓸어 보였다.

‘달빛에 비친 그 머리칼은 분명 갈색이었지….’

갈색 머리는 너무 흔한데. 도대체 어느 가문일까.

녀석이 지껄인 이야기를 생각하면 제발 이 세계의 일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이 세계의 일이기를 바랐다.

적어도, 이 아이가 이토록 비난당하는 빨간 눈에 대한 인식은 내가 조금이라도 개선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에겐 권력도, 정보도 있으니까.

“세실, 다음 잠행에는 꼭 이 언니가 따라갈 테니 오늘은 호위들의 지시를 부디 잘 따라야 한다.”

열 살이 되고 또 좋은 것을 꼽으라면, 바로 황성 안이나마 궁 밖으로 잠행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니, 걱정 마세요. 다음번엔 꼭 같이 가 주시기예요?”

그렇게 말한 것과 달리, 이 잠행이 결정되고서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이 어떻게 로젤리아를 떼어놓을 것인가였지만!

‘내 호위 소대를 8인으로 구성한 것도 그렇고, 로젤리아는 내 안전에 병적으로 집착하니까….’

따로 목적이 있어서 나가는 건데, 로젤리아의 철두철미한 과보호 아래에선 될 것도 안 될 거였다. 로젤리아는 귓가에서 잘린 그 단발만큼이나 칼 같은 성미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성기사단의 주간 근무표가 나온 뒤에 모르는 척 로젤리아의 근무일에 나가기로 일정을 정했다.

그랬더니 못내 걱정되었는지, 로젤리아가 아침 댓바람부터 내 방에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신성력이 없는 게 극비이니, 원칙주의자인 로젤리아가 명분도 없이 근무를 바꿀 순 없었을 거야.’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나는 내 검지를 들어 실반지를 보였다.

실제로는 알이 굵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 그리 보이는 것이었다.

“테오 오라버니께서 여차하면 쓰라고 텔레포트용 반지도 선물해 주셨는걸요.”

내가 드디어 잠행을 나갈 수 있게 되자, 자선 재단을 운영하며 인맥이 드넓어진 테오도르가 마탑 최신 텔레포트용 반지를 여러 개 구해준 것이었다.

“그래, 나도 봤지.”

로젤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다만 마력이 없는 사람이 반지를 쓰면….”

로젤리아가 내 보닛을 동여매며 목소리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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