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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4화 (14/220)

14화. 악역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2)

내가 기대한 이는 바로, 아멜리를 소유하기 위해 어떤 악행도 불사하는 서브 남주이자 흑막.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앞서 알비누스 후작가가 신년 하례를 올릴 때 내 또래의 흑발 어린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알비누스 후작이 양친을 잃은 조카를 제 밑으로 입적시킨 거라 했는데.’

나는 무해한 눈빛을 꾸민 채,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는 알비누스 후작가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후작 부부의 주변에는 갈색 머리칼을 지닌 소년만 있을 뿐이었다.

‘아직 입양하기 전인 건지, 여기에 올 만큼 나이가 차지 않은 건지.’

명색이 서브 남주인데 그에 대한 설정은 많은 것이 두루뭉술해서, 나보다 나이가 적은지도 많은지도 몰랐다.

‘금욕적인 흑발 냉미남의 어린 시절 모습이 궁금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면 알비누스 후작은 이 세계에서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부터,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모였다. 어디서 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도대체 저 집안에서 어떤 유전자의 조합으로 그 냉미남이 나오는 걸까? 친부가 북부 대공이라도 되나?’

나는 이 세계에 없는 작위를 갖고 혼자 농지거리하며 입맛을 다셨다. 쩝.

첫술에 배부르랴, 이제 시작인데.

‘하다못해 내 이름으로 어린이 귀족 연회를 여는 방법도 있고.’

나는 스칼렛과 다른 예비 악역 어린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것에 만족하고 프리지어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까 수많은 사람 앞에 섰을 때의 아찔했던 그 긴장감이 뒤늦게 몰려오면서, 급속히 피곤해지고 만 것이었다.

“전하, 아까 정말 잘하셨어요.”

“역시, 우리 전하께서는 어디서든 빛나셔서 말이에요.”

아까 나를 테오도르의 손에 맡겨 보낸 뒤, 따로 제 가족들과 하례식에 참석한 메리제인과 패티샤였다.

처음 보는 얼굴들의 물결에 피로해진 뒤여서인지 반가움이 배가 되어, 나는 절로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나 너무 피곤해. 얼른 방으로 가서 쉴래.”

“앞으로 계속하셔야 할 일인데요.”

“으응, 한번 해봤으니 다음부터는 괜찮겠지.”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서로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고단한 발걸음을 이끌고 프리지어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전하!”

목소리만 들어도 천사 같은 아이가 이편으로 달려왔다.

“황궁 안에서 잘도 뛰어다니는구나?”

“전하께서 다리가 어찌나 기신지 안 뛰면 못 잡을 뻔했잖아요.”

어느새 나보다 주먹 하나는 더 커진 레오폴트가 숨을 고르며 넉살스레 말했다.

“연회 안 따라가니?”

“제가 가봤자 발길에 차이기나 하지 않을까요? 전하랑 프리지어궁 밖에서 뵈니 좋기도 하고요.”

레오폴트가 해사하게 웃었다.

뒤이어 뒤풀이 격인 하례연이 열렸기에, 하례식에 참석한 귀족들은 모두 연회장으로 이동한 터였다.

하지만 연회는 아무래도 어른들의 것이어서, 나부터가 하례연에 참석하지 않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니까. 레오폴트도 그럴 수야 있지만….

“비슷한 처지의 영식들이 있지 않겠어?”

나는 또 조련사의 마음이 되어, 황실파의 수장이 될 몸이 사교 활동을 소홀히 할까 싶은 우려를 내비쳤다.

“제가 전하 말고 또 친구가 어딨나요. 아시면서….”

“뭐어.”

아까 마주한 스칼렛의 적개심을 떠올린 나는 말꼬리를 늘이며 넌지시 덧붙였다.

“게이블스 후작 영애도 네 또래고….”

“게이블스요?”

“응. 아무래도 안면이 있지 않아?”

레오폴트의 눈이 댕그래졌다.

“모르는 사이인데요?”

스칼렛을 모른다고?

나는 당황했지만, 태연히 표정을 추스르며 물었다.

“우연히 본 적도 없고?”

“오늘 처음 봤어요. 전 부모님이나 할머니 사교 모임에 따라다니지 않아서요.”

제가 알아야 하나요? 레오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나는 당혹스러워졌다.

스칼렛이 나를 싫어하는 기색이기에 당연히 둘이 어떻게든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에 빠진 나는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그럼 귀택하지 그래? 매번 오는 황궁 뭐가 재밌다고.”

“어른들께서 다 여기 계시니까…. 아니, 전하께선 또 칼 같으셔요. 저희 우정이 이 정돈가요?”

습관적으로 철벽을 치고 말았더니 레오폴트가 조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시무룩해지는 것이, 꼬리나 귀만 없다뿐이지 마치 풀 죽은 강아지 같았다.

‘아까 본 스칼렛을 생각하면 이런 애가 취향은 아닐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우리 나이 또래에는 두 살 차이가 커서, 열두 살 스칼렛이 열 살 레오폴트에게 반하기란 어렵기도 할 것 같았다.

뭐, 까칠한 영애님의 비밀스러운 취향일는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모르는 사이다 이거지…?

“그래, 네게 친구가 나뿐이어서 나랑 놀려는 거지?”

레오폴트를 남주로 좋아하거나 친구로 아끼는 것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 레오폴트에게 어떤 여지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내 과대망상이 아니라, 전생의 간접 경험에서 우러난 조건 반사적인 반응이랄까?

그러니까 나는 전생에 남주가 빙의자에게 반하거나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설정이 있는 로판을 너무 많이 봐버린 것이었다.

“네에, 그럼요. 이제 전하께서도 황궁에 마음대로 돌아다니실 수 있으신 거잖아요. 새로운 곳을 탐사할 동료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먼 길 온 김에 더 오래 놀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을까? 레오폴트는 이미 몇 년째 겪고 있는 내 철벽을 여상하게 받아넘겼다.

“그래요, 전하. 기왕 나오신 김에 조금 더 둘러보시고 가셔요.”

“아우렌바흐 소공자님이랑 맨날 프리지어궁 정원만 다니셨잖아요.”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레오폴트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메리랑 패티가 연회에 참석할 짬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메리와 패티는 올해 스물둘이 되어 혼기가 찼지만, 내 시녀로 일하느라 사교계 재미를 맘껏 누리지 못했을 테니까.

‘내 시녀여서 혼처가 잘 들어오기야 할 테지만, 재미는 따로 있는 거 아니겠어?’

하아, 나는 참 배려심 깊은 주군이야.

피곤한 마음을 갈무리하며, 나는 짐짓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알겠어. 내가 은사를 졌으니 어쩔 수 없지. 한 시간쯤 레오폴트와 산책을 하고 있을 테니, 너희들은 나 대신 연회장 구경이라도 하고 오렴.”

“어머, 전하. 저희 연회 참석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한 시간이 넉넉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사실 혼자서 궁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는 것이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보니, 레오폴트의 제안이 매력적이기도 한 것이었다.

“어머, 전하. 어느새 이렇게….”

메리제인이 감격한 목소리를 내었다. 패티샤는 옆에서 덩달아 양손을 모아 입을 틀어막았고.

아이고, 이 주책들.

내가 저들이 모시는 분만 아니었어도, 어느새 이렇게 다 컸냐고 할 기세였다.

“그럼 전하, 호위 기사분들 말씀 잘 들으시고요.”

“날 추우니까 호수 근처에는 가지 마시고요.”

“알았어, 알았어.”

나는 훠이훠이, 멀리 보내는 것처럼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느새 하례연에 참석할 이들은 모두 연회장에 들어갔고 귀택할 이들은 귀택하여 복도는 한산했다.

“소공작 부부가 기다리라고 했어?”

“마음대로 하라고 말씀은 하셨는데, 다 같이 돌아가는 게 마부에게도 좋겠죠.”

공작저가 아무리 황성 가까이에 있대도, 레오폴트 하나를 위해 먼저 움직이는 것이 고단하리라는 상냥한 마음씨였다.

그것을 기특하게 여긴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발랄한 목소리를 내었다.

“본궁 안에 인공 정원이 있는데, 거기 가볼래? 연못도 있어.”

“좋아요!”

어디서 본 건 있다고 레오폴트가 손을 내밀기에, 그걸 맞잡고서 발걸음을 떼려 할 무렵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연애 사업을 하고 싶으시면 알아서 하시라고요!”

옥구슬 같은 목소리란 건 이걸 뜻하는 거였을까? 또랑또랑한, 그러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소리가 울린 쪽을 바라보니, 연회장 입구 쪽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듯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싸우나 봐요. 우리 또랜 것 같은데.”

레오폴트가 그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우리의 천진한 소공자님께서는 열 살이 되었는데도, 다른 가문의 사정은 모른 체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손가락 내려, 레오.”

“아, 아차.”

얘도 친구가 나밖에 없어서 큰일이지.

그나저나, 어른의 목소리 같지는 않았는데.

황궁 복도에서 간도 크다고 생각하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누구인지 살펴보니….

“어, 게이블스의 영애 같네요.”

“보여?”

“헤헤, 전하께서는 신성력 수련 안 하셔서 모르시죠? 얼마 전에 배웠어요. 눈에 신성력을 불어넣어서 멀리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아직 수련은 한참 더 해야겠지만요.”

망원경을 콘택트렌즈처럼 쓰는 느낌인 걸까? 레오폴트는 물색없이 제 성취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말을 듣고 나니, 화려한 황궁 복도의 장식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던 주홍빛 머리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남다르네, 정말.’

뭔가, 오늘 스칼렛에게 여러모로 놀라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그때.

스칼렛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쪽으로 오나?

나는 나도 모르게 레오폴트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레오폴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스칼렛의 안색을 주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완벽한 예법의 걸음걸이에서는 기품마저 배어나는 듯했는데, 도도하게 굳힌 소녀의 낯에서는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찰나.

한 쌍의 꿀빛 눈동자가 내게로 와서 붙박였다.

그러니까 스칼렛이 눈에 담은 것은, 레오폴트가 아니라 나였다.

우연히 마주친 거였지만 일말의 동요도 없이, 스칼렛 게이블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 흐트러짐 없는 자태에 나는 속으로 경탄했다.

‘우리 언니들과 다른 종류의 우아함이네, 이건.’

태생이 고귀한 언니들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이 선연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은 칼 같은 우아함이랄까?

내가 다시금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스칼렛은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4황녀 전하. 저는 게이블스 후작의 여식 스칼렛이라 합니다.”

인사마저 완벽했다. 나도 교사들에게 완벽한 예법이라고 찬사를 받지만 그저 정석일 뿐, 스칼렛의 예법에는 잘 벼려진 고아함이 배어 있었다.

‘사교계의 일인자는 집안 배경과 타고난 미모만으로 되는 게 아닌가 봐.’

나는 그녀의 자태에 수런거리는 마음을 눌러두고서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하례식장에서 인사드렸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인사드리게 되니 정말 영광입니다.”

이어지는 말까지 청산유수. 있었던 적도 없는 그녀에 대한 팬심이 무한대로 증폭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정말 나를 싫어해…?’

스칼렛의 도도한 눈매에 일종의 불쾌가 담겨 있는 것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어른의 이성으로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갈 정도이긴 했지만, 굳이 분류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일종의 적개심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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