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악역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1)
“정말 소문대로 요정처럼 사랑스러우시네요.”
“천사 같으셔라….”
“황실 분들이 다들 미인이시지만, 4황녀 전하처럼 어릴 때부터 아름다우시기도 힘들 텐데요.”
“총명하기로도 따를 자가 없으셔서. 벌써 아카데미 과정을 다 떼셨다고 하던데….”
“어쩜 저렇게 기품이 넘치실까.”
이거 참, 수줍구먼.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다른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석으로 걸어가는 길.
나에 대해 수군대는 귀족들의 말소리에, 나는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다.
‘나쁜 소리 하나 안 나오는 걸 보니 황권이 강하긴 강하구나.’
내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잘 숨겨두고서 마치 이날만을 위해 연습한 듯한 걸음걸이로 단상에 올랐을 때였다.
“나의 막내 세실리아, 이리 오려무나.”
예복을 갖춰 입은 아버지가 단상의 앞쪽에서 내게 손짓했다.
테오도르는 빙긋 웃으며 나를 그쪽으로 보낸 뒤, 단상에 놓여 있는 의자들 중 한쪽 끝에 가서 앉았다.
반대쪽 끝의 의자가 비어 있는 것을 보니 그쪽이 내 자리인 것 같았다.
‘내 자리라니…. 황실이 진짜 내 가족인 게 실감 나네.’
난생처음 예복을 입고 참석하는 신년 하례식, 온 귀족들의 호의적인 시선, 그리고 절로 권위를 세워줄 것만 같은 고급스러운 만듦새의 의자까지.
나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숨을 깊게 내쉬며 아버지 쪽으로 향했다.
나를 당신의 곁에 세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신년을 맞아 어려운 걸음 해준 나의 신하들에게 감사하네.”
좌중의 모든 눈동자가 빠짐없이 나와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귀족들의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듯 좌중을 한번 훑어본 아버지가 허리를 숙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오늘은 아수라마수라 황실의 마지막 축복, 짐의 막내 세실리아를 그대들에게 소개하는 기쁜 자리요.”
아버지께서 반걸음 옆으로 비켜서자, 나는 그 단상의 한가운데에 홀로 있게 되었다.
알현실을 가득 메운 제국의 모든 귀족들의 눈이 모두 내게 붙박였다.
순간 아찔해지는 마음…. 나는 홀에 들어설 때의 마음을 열심히 되새겼다.
‘관객의 자세, 관객의 자세!’
누가 봐도 관람의 대상은 나인 상황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내가 세실리아로 태어난 이상 익숙해져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은사를 진 이들에 대한 그대들의 충정이 짐의 막내에게도 빠짐없이 향하길 기대하겠네.”
은사를 진 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불리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정말 ‘공제눈’ 속 황녀님이 된 거야!’
그 설레는 마음을 담아,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손을 들어 좌중에 흔들어 보였다.
“4황녀 전하 만세!”
“만세!”
“아수라마수라에 영광을!”
“영원히 존귀하소서!”
누군가의 외침을 필두로,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양감과 수많은 이들에게 주목받는다는 떨림에 나는 정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익숙해져야 해…!’
내가 진짜로 기절해 버리기 전에 나를 소개하는 시간이 끝난 뒤, 그제야 나는 눈여겨 두었던 그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가운데 옥좌에 자리하면서 본격적인 신년 하례가 시작되었다.
시종장이 의전 서열에 맞추어 가문들을 호명했다.
“아우렌바흐령과 악센령, 자벤트령, 마이슨령의 주인 아우렌바흐 공작 인사드립니다!”
그중 첫 번째는 누가 뭐래도 황실파의 수장인 아우렌바흐 공작가였다.
“새해에도 황실에 축복이 깃드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도 축복받으소서.”
“그래, 공작도, 공작 부인과 식솔들 모두 새해에도 잘 부탁하네.”
아우렌바흐 공작이 옥좌 아래 단상에 올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숙였다.
공작 부인은 여러 번 봤지만, 레오폴트의 할아버지인 공작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역시 남주 할아버님이셔서, 그 연세에도 미모가!’
나는 어느새 평온을 되찾아, 내 진짜 목적인 등장인물 감상을 시작했다.
원작 무대에서는 ‘선대 공작’으로 등장할 그는, 공작가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아멜리에게 마음을 여는 인물이었다.
‘〈작은 아씨들〉의 베스와 로렌스 할아버지의 오마주인지, 그래서 제목에 제비꽃이 들어간다고 했던 것도 같고.’
그 뒤편으로는 ‘시댁의 반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레오폴트의 고모, 레오폴트의 부모님인 소공작 부부가 포진해 있었다.
‘저 사람들의 생각까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힘내렴, 레오야.’
예비 시댁의 반대 정도야 원작에선 고구마 축에도 못 끼고 말이다.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도 모르고, 레오폴트는 오늘도 천사같이 생글생글 웃으며 내 시선이 제게 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이구, 내가 짐짓 이맛살을 찌푸리자 그마저도 좋다고 키득대며 고개를 숙인다.
‘밖에서 보는 게 처음이라 더 신났겠지…. 아까 레오를 찾을 수 있었다면 마음이 조금 편안했을 텐데.’
우리 우정이 벌써 3년째니, 저 해맑은 어린이를 심적으로 의지하게도 되는 것이었다.
‘저 철부지를 어엿한 남주로 잘 길러내야 할 텐데.’
아우렌바흐 공작가의 어른들도 안 할 걱정을 하며, 나는 곧이어 만나보게 될 다른 등장인물들을 기다렸다.
남은 세 공작가의 하례가 이어지고, 뒤이어 후작가들의 순서가 되었다.
‘스칼렛과 루시페우스의 가문 모두 후작가니까, 이제부터 시작이야.’
나는 속으로 후후 웃었다.
내가 가장 기대한 것은, 원작에서 ‘악녀’ 역할을 담당하는 스칼렛의 가문이자 귀족파의 실세인 게이블스 후작가였다.
스칼렛의 패악도 패악이거니와, 게이블스는 원작의 무대에서 황실에 반기를 들기까지 할 예정이었다.
‘완벽한 빌런 가문이란 소리지. 뭐, 그건 천천히 대비하면 되고. 스칼렛이 어마어마한 냉미녀라고 묘사돼 있었는데, 지금도 그 싹이 보이려나?’
내 기대를 읽기라도 한 듯이, 게이블스 후작가는 후작가 중 제일 먼저 하례를 올렸다.
“게이블스령, 앤더슨령과 에버렛령의 주인 게이블스 후작과 그 식솔 인사 올립니다.”
“새해에도 성스러운 축복이 황실에 깃들기를 바라나이다.”
“새해에도 축복받으소서.”
나는 앞으로 나선 게이블스 후작을 흘끗 보고는, 시선을 돌려 그 뒤를 자세히 살폈다.
게이블스 후작가의 직계와 방계들이 가슴에 손을 얹거나 치맛자락을 잡은 채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눈으로 인사를 받는 척하며 그들의 면면을 훑던 나는, 대번에 내가 찾던 이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얘다…!’
빛깔 좋은 주홍빛 머리칼을 가운데서 가르마를 타 귀 뒤에서 풍성하게 굽이치도록 넘긴 소녀.
나무랄 데 없는 자태로 인사를 마친 뒤 우아하게 고개를 드는 그 소녀가 바로….
‘스칼렛!’
열두 살에 불과한 아이의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미 그 자체임에 나는 경탄했다.
‘역시 미래에 사교계를 휘어잡을 재목은 남달라.’
주변에 아는 귀족 영애가 없는 나도, 스칼렛이 독보적으로 우아한 자태를 선보인단 건 알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선 그 오라비가 건들거려서 더 그래 보이는지도….
‘어쩌면 내가 스칼렛의 미래를 알아서일 수도 있고.’
나와 레오폴트보다 두 살이 많은 스칼렛은 원작 시점에서 사교계의 일인자로 몇 년째 군림하고 있을 예정이었다.
본인의 외모가 아름다운 건 두말할 것 없고, 게이블스 후작가가 위세가 높고 부유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스칼렛은 공공연하게 아우렌바흐 공자를 연모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사교계의 영애들이 감히 레오폴트에게 눈독 들이지 못하도록.
두 가문이 대대로 대립해온 것만이 걸림돌이니, 어떻게든 정치적인 타결이 나기를 기다려 정략혼을 맺고자 한다는 설정이었다.
‘해맑은 레오폴트야 그저 허허거릴 뿐이었고.’
그런 이유로 스칼렛은 극중에서 이 세계에서 혼기가 다 됐다고들 하는 스물넷임에도 그 누구와도 정혼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와중에 가문도 능력도 뭐 하나 볼 것 없는 아멜리가 나타나 레오폴트의 사랑을 받으니 얼마나 짜증이 났겠어?’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여자의 적은 여자’, 즉 ‘여적여’ 콘셉트의 악녀…가 바로 스칼렛이었다.
이는 기실 ‘공제눈’이 내 길티 플레저였던 이유 중 하나였다.
여자의 적이 여자라니, 이 얼마나 고릿적 유물이야?
‘게다가 이유가 있대도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서는 안 되고…. 저렇게 우아한 애도 사랑 앞에선 별수 없다는 건가?’
스칼렛에 대한 생각에 빠진 나는, 그 애의 아름다운 자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레오폴트가 아멜리와 이어질까 전전긍긍하는 표독스러운 이미지로만 상상했었는데.’
그러나 오늘 마주한 스칼렛은… 전생에서 수많은 로판을 읽으며 상상했던 기품 있는 귀족 영애, 그 자체였다.
‘이런 애가 우리 허술한 레오에게 어쩌다가 코가 꿰여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공제눈’ 작가에 대해 원망의 마음까지 들려던 찰나.
‘어라?’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껏 하례를 올린 귀족들은 세실리아의 용모를 가까이서 본 순간 경애 또는 신기함을 담은 눈빛을 보냈건만, 스칼렛의 경우에는….
‘나를… 싫어한다…?’
세실리아가 되고서 처음 겪는, 적의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포시 좁아진 미간이나 올라간 눈꼬리 같은 것이… 정말 그랬다.
상상도 못 했던 적의를 받는 것은 조금, 무서운 느낌이었다.
‘벌써 레오를 좋아하나?’
레오폴트가 나의 말동무로 황궁에 드나드는 것은 사교계의 상식이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덕담이 끝나고 게이블스 후작가의 일원들이 물러날 때까지, 좁혀진 스칼렛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하례식이 끝나고 참석했던 이들이 알현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니까, 쟤가 나중에 스칼렛에게 붙어서 아멜리 소문 나불댈 애고. 아, 적금발 남자애면…. 그렌트우드 백작가 아들이니까. 아멜리한테 빠져서 레오한테 결투 신청할 애지.’
아멜리의 사교계 생활을 험난하게 할 영애들, 아멜리에게 반해 레오폴트와 신경전을 벌일 영식들, 한미한 남작가의 영애가 소공작의 관심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망신을 줄 사람들이 다 거기에 있었다.
‘쟤는 가짜. 얘는 진짜. 쟤는 음, 판단 보류….’
내가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사랑을 도와주기로 다짐하고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악인들을 분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악행이 두 사람의 사랑을 깊어지게 하면 진짜 악역, 쓸데없는 고구마만 선사하면 가짜 악역으로 말이다.
‘그리고 가짜 악역들이 악행을 못 저지르게 하면 되는 거지.’
예를 들어, 아멜리가 레오폴트와 마주칠 수 있도록 아멜리를 외톨이로 만드는 인물은 진짜 악역이었다.
레오폴트의 편지를 가로채 두 사람이 오해하게 만드는 인물은 가짜 악역이었고.
‘오해할 시간이 어디 있어? 하루라도 빨리 이어져야지.’
가짜 악역들을 미리부터 지켜보고 회유하면, 그들의 악행도 막을 수 있으리라.
‘스칼렛의 악행은 대부분 가짜 악역감이고, 진짜 악역이라고 하면 역시.’
그렇게 고민하던 내 생각의 끝에, 오늘 만나보기를 기대했던 다른 어린이가 떠올랐다.
‘왜 아까 없었던 거지? 아직 열 살이 안 됐나?’